신진서의 '끝내기 6연승' 기적, 하늘 나라 떠난 할머니의 선물

  • 등록 2024-02-26 오전 12:00:00

    수정 2024-02-26 오전 12:00:00

바둑 국가대항전 농심배에서 전인미답의 ‘끝내기 6연승’ 대기록을 세우며 한국의 역전 우승을 이끈 신진서 9단. 사진=한국기원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할머니가 저와 함께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바둑 국가대항전 농심배에서 ‘끝내기 6연승’을 거두고 한국 바둑의 자존심을 지킨 신진서(23)의 기적에는 하늘나라로 떠난 할머니의 도움이 있었다.

신진서는 지난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25) 9단을 꺾고 한국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농심배는 바둑 세계 최강인 한국, 중국, 일본의 대표 기사 5명이 출전하는 국가대항전이다. 이기는 선수는 계속 두고, 진 선수는 탈락하는 연승전 방식으로 우승국가를 가리는 대회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일찌감치 벼랑 끝에 몰렸다. 앞선 주자인 설현준 8단과 변상일·원성진·박정환 9단이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기 탈락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신진서 9단이 중국의 정상급 기사 5명과 일본팀 주장인 이야마 유타 6단을 혼자 모조리 꺾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한국의 역전 우승을 완성했다.

농심배 역사상 ‘끝내기 6연승’은 신진서가 처음이다. 신진서는 이번 대회 6연승 포함, 지난 22회 대회부터 파죽의 16연승을 이어갔다. 자신의 우상인 이창호 9단이 1∼6회 대회 때 수립한 종전 최다연승 기록 14연승마저 갈아치웠다.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돌아온 신진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대국을 치르느라 체력적, 정신적으로 지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우승의 기쁨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신진서는 농심배 우승을 확정짓고 시상식을 마친 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였다.

사연은 이랬다. 신진서는 어릴적부터 친할머니를 잘 따랐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이후 신진서가 프로기사로 성장하면서 부산에 계신 할머니를 자주 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회가 될 때마다 연락하고 직접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바쁜 대국 일정에도 불구,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보름 전 할머니를 찾아뵀다. 그때도 몸이 안좋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신진서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친할머니는 신진서가 농심배 출전을 위해 중국으로 출국한 날 지병으로 별세했다. 신진서의 부모님은 아들이 대회에만 집중하도록 일부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신진서는 마음 한구석에 할머니를 품고 대국에 나섰다.

신진서는 프로였다.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지만 이를 잘 다스리면서 연승을 이어갔다. 오히려 할머니의 존재는 ‘더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모든 숙제를 마친 뒤 우승 소식을 할머니에게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늘 그 자리에 계셨던 할머니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신진서는 귀국 인터뷰에서 “어제는 만감이 교차했다”며 “바둑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슬픈 날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즐기지는 않았다”고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어 “(대국에 들어갈 때) ‘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무너지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며 “할머니가 내 곁에서 함께 싸워줬다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편,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지만 신진서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바둑 레전드’ 이창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몸을 낮췄다. 신진서는 “이창호 사범님은 제 우상이다. 제가 레전드 선배 기사들과 비교되기에는 굉장히 멀었다”면서 “만약에 비교하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고 비교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불어“존경하는 선배 기사들을 앞지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제 바둑을 계속 성장시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신진서는 당찬 야망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올해를 좋게 출발했지만 제가 가진 목표는 더 크다”면서 “예전에 ‘세계대회에서 한 번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 있는데 올해 세계대회에서 항상 이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전성기의 시작을) 제가 처음 우승했던 스무살로 치더라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며 “앞으로 최소 5년에서 많게는 10년까지 전성기를 이어 나가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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