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세계시민] ‘일본판 쉰들러’ 후세 변호사 70주기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피신시키고 학살 진상 조사
독립운동가 변호 도맡아…일본인 건국훈장 1호
  • 등록 2023-09-09 오전 6:00:00

    수정 2023-09-11 오후 4:20:35

일본 지바현 후나바시 마고메 영원(靈園)에 있는 간토대지진 희생동포 위령비.(후나바시=연합뉴스)
[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 100년 전 일본 도쿄(東京) 인근에서 일어난 간토(關東)대지진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재(天災)로 숨진 10만여 명의 희생자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인재(人災)로 억울하게 살해된 6,661명의 원혼은 가해자 사죄가 이뤄지기 전에는 편안히 잠들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뜻있는 재일동포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일본 당국이 애써 감추려 한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간토대지진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은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려 흉흉한 민심을 달래려는 국가범죄이자 민족 혐오를 내세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며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 진상 규명, 사죄 촉구, 희생자 추모에 앞장서온 사람들은 정의감과 인류애를 지닌 몇몇 일본인이었다.

이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 있는 인물이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들을 구한 사업가에 빗대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다. 오는 13일 70주기를 맞는다.

그는 도쿄에서 학살극이 일어나자 공포에 떠는 조선인 100여 명을 피신시키고 숙식을 제공했다. 유언비어를 날조한 계엄 당국과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독자적인 조사에 나서 이듬해 9월 보고서를 냈다.

후세는 보고서에서 “조선인이 살해당한 상황은 글로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면서 “쇠갈고리·죽창·철사·권총·일본도 등을 사용한 방법에 몸서리가 쳐진다”고 폭로했다.

1926년 3월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사죄문을 보냈다.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후세는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宮城)현에서 태어났다. 1902년 도쿄의 메이지(明治)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대리로 임용됐으나 생활고에 시달린 끝에 딸과 동반 자살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1903년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그는 한일 강제병합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보고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1911년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해 일본 검찰의 호된 취조를 받은 데 이어 1919년 2·8 독립선언에 가담한 조선 청년들을 위해 무료 변론에 나섰다.

1923년 8월에는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기 위해 경성(서울)을 처음 방문했다. 재일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서 연설하고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 관계자들을 만나 격려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핑계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등 사상범을 대거 잡아들였다.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不逞社)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박열도 히로히토(裕仁)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체포됐다.

법정에서 변론에 나선 후세는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대역죄를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둘 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그는 둘의 옥중 결혼도 도왔다. 가네코가 감옥에서 자살하자 시신을 발굴해 화장한 뒤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 형에게 전해주었다.

1924년 1월에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도쿄 황궁 앞에 폭탄을 던졌다. 김지섭 변호 역시 그의 몫이었다. 이듬해 조선에 을축대홍수가 일어나자 수재민 구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1926년에는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으로 찾아와 도움을 호소했다. 후세가 의롭고 불쌍한 조선인을 돕는다는 소문이 외진 농촌에까지 퍼진 것이다.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하자 궁삼면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었다. 그는 총독부에 거세게 항의하고 여론을 불러일으켜 동양척식회사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하도록 함으로써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에도 후세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1927년 10월과 12월 조선을 방문했다. 후세는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맞서다가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1933년과 1939년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반전운동을 벌이던 셋째 아들이 교토(京都)형무소에서 옥사하자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라고 의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후세는 광복 후에도 민족학교 설립과 차별 철폐 투쟁 등 재일동포 관련 사건의 변호를 도맡았다.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에게 자신이 쓴 ‘조선 건국 헌법초안 사고(私考)’를 선물로 건네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원했다.

1953년 9월 13일 그가 타계하자 장례식에 참석한 재일동포는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맏형이나 다름없고 구원의 배와 같은 존재였다”며 오열했다. 도쿄 조자이지(常在寺)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란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2004년 한국 정부는 후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론 처음이었다. 2018년에는 그가 변호한 가네코도 애국장을 받았다. 정부가 지금까지 포상한 독립유공자 1만7,848명 가운데 외국인은 이들 두 일본인을 포함해 모두 76명이다.

◇글=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전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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