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별에 인간만 살진 않잖아요"

생태 다큐 '작별''어느 날 그 길에서' 찍은 황윤 감독
야생동물 입장에서 그려내 '선동'아닌 '공감'하며 대변
  • 등록 2008-04-02 오전 9:50:57

    수정 2008-04-02 오전 9:51:05

▲ 황윤 감독

[조선일보 제공] 전신거울로 추레한 나신(裸身)을 처음 제대로 쳐다보았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고 나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부끄러웠다. 지난 주말(3월 27일) 대학로의 작은 극장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한 생태 다큐멘터리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차가운 아스팔트와 동물원을 쫓아다니며 영화를 완성한 황윤(36) 감독을 1일 만났다. '생태학적 감수성'이란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느끼게 해준 이 여성 감독은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만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로드 킬(Road Kill·도로에서 죽음)을 당하는 야생 동물들의 이야기. '작별'은 아이들에게는 꿈과 낭만의 동산인 동물원이 갇힌 동물들 입장에서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소재 자체도 한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힘은 그의 겸손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Moore)였다면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삵의 시신을 상자에 담아 도로공사 사장이나 국토해양부 장관을 집요하게 쫓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황 감독은 '선동'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고속도로 위의 비명횡사와 동물원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풍경을 야생동물들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88고속도로 남원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팔팔이'의 비극에 가슴이 저린다. 도로 이름과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를 겹쳐 '팔팔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던 암컷 삵. 순천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구례에서 방사된 뒤 12개의 도로를 넘어 다시 고향 남원을 찾아간 팔팔이. 하지만 고향에서 당한 두 번째 교통사고와 죽음. 왜 위험하게 고속도로를 다시 건너갔냐고? 그들에게는 원래 수만 년 전부터 자기들 땅이자 터전이었던 것이다.

황 감독은 "선동은 순간적이지만, 성찰은 길다"면서 "욕하고 공격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의 동반자'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조화로운 삶'은 그리 멀리 있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문사 인터뷰실에서 그녀가 창 밖을 가리켰다. 하얀 목련이 막 피어나려고 안간힘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화단 이야기도 꺼냈다. 매화와 봄의 새순을 찾아온 주먹만한 작은 새들을 목격했을 때의 기쁨. 그 풍경의 '발견'과 그 새의 이름이 '오목눈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이 '조화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했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건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에요."

"함께 성찰하고 싶다"는 황 감독의 소망은 작지만 울림 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생면부지의 소프라노 조수미는 영화를 본 뒤 친필로 응원 편지를 보냈고, 황 감독의 취지에 공감한 배우 조재현과 방송인 김미화는 보수도 받지 않고 예고편 해설을 도와줬다.

고속도로 건설의 주체인 도로공사가 개봉 하루 뒤인 28일 황 감독을 초청해 자체 상영회를 열었고, 황 감독 영화 최대의 기여자인 야소모(야생동물소모임)와 이 영화를 응원하는 모임인 '팔팔이의 친구들'에도 격려의 글이 쇄도하고 있다. 그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통역자이자 영매(靈媒)가 되고 싶다"고 했다. 희디흰 목련이 막 터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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