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우의 4언절구]류택현 '깨달음에 지각은 없다'

  • 등록 2007-06-25 오후 3:28:50

    수정 2007-06-25 오후 3:32:47

▲ LG 류택현 [뉴시스]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2년 5월 어느날 광주구장. 원래 올라갈 차례도 아니었다. 최창호가 뒤늦게 몸을 푸는 바람에 얼떨결에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어쩌면 이 경기가 끝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가야할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습관처럼 밀려들던 불안감도 이날만은 남의 얘기 같았다. '뭐 더 떨어질데도 없는데...'

별 생각 없이 커브를 던졌다. 뜻하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타자의 방망이가 크게 허공을 갈랐던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던져보고 싶던 커브가 커다란 각을 이루며 포수 미트에 멋들어지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한번 던져봐도 마찬가지였다. 겨우내 수천개의 공을 던지며 그렇게 갈고 닦아도 안되던 커브가 아니었던가.

가슴 속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감독(김성근 현 SK 감독)의 믿음까지 얻어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경기 중.후반 고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상대 주요 좌타자를 상대하러 마운드에 올랐다. 진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태어난 것이었다.

LG 좌완 스페셜리스트 류택현(36) 이야기다. 류택현은 2001년까지만 해도 그다지 존재감을 느끼기 힘든 선수였다. 좌완 투수로는 제법 빠르고 묵직한 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변화구를 구사하지 못해 늘 뒷켠에 밀려나 있었다. 공만 빠른 제구력 불안 투수가 설 수 있는 자리는 좁기만 했다.

OB(현 두산)시절엔 오전에 홀로 나와 불펜 피칭을 하고 경기에 나선 적도 많았을 만큼 땀을 흘려봤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늘 뭔가에 쫓겨왔기 때문이다. 마운드에만 서면 원하는대로 공이 가질 않았다. 다른 유명세는 없었어도 '새가슴' 선수를 이야기할때는 빠지지 않던 그다.

결국 해법은 마음 속에 있었다. 더 달아날 곳도 없다는 절박함은 어느날 갑자기 무겁게 짓누르던 가슴속 두려움을 사라지게 했고 이후 진짜 류택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류택현은 이후 없어선 안될 선수가 됐다. 2001년까지 8년간 281경기에 나선 그지만 이후 5년동안 무려 306경기를 뛰었다. 2005년엔 85경기로 시즌 최다 등판 기록도 세웠다.

지난해 부상과 세대교체의 물결에 밀려 16경기에 나서는데 그쳤다. 위기였다. 연봉도 2,000만원이나 삭감된 6,500만원에 재계약해야 했다.

그러나 김재박 감독이 부임하며 상황이 다시 달라졌다. 실력 위주의 실리주의 기용에 힘입어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시즌 절반 정도 지난 시점에서 벌써 40경기에 출장했다.

그런 그가 이제 650경기 출장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앞으로 7경기만 더 나서면 조용하지만 무게감 있는 기록의 주인공이 된다. 조웅천 가득염(이상 SK)에 이어 세번째다. 크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야구선수로는 중년인 서른살이 넘어 얻은 깨달음 덕에 묵묵히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점이 그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류택현은 자신의 연봉에 빗대 "일당이 겨우 10만원짜리인 야구 선수라는 뜻"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지금까지 그가 쌓아올린 탑은 절대 싸구려가 아니다.


깨달음에 지각은 없다

깨달음을 말하기엔
낯부끄런 일이지만
그날얻은 자신감은
새인생을 열어줬네

별의별짓 다해봐도
안통하던 새의가슴
마지막을 각오하니
새로운눈 뜨게됐네

두려움이 사라지니
마운드는 나의세상
출근하듯 오르내린
육백오십 출장기록

많은박수 없더라도
가치만은 빛날지니
더욱오래 살아남아
좋은경험 전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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