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시장 소멸이 불편한 이유

[목멱칼럼]
'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의 저자
  • 등록 2023-06-22 오전 6:15:00

    수정 2023-06-22 오전 6:58:47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정부는 돌연 “50~60년 동안 이어져 온 전세시장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전세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제도권 금융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던 소시민들 사이에 집을 매개로 한 사금융 거래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됐다. 서민들의 주거불안을 다소나마 개선하고 나아가 ‘내 집 마련’ 징검다리 기능을 해왔다. 변두리에서 전세살이로 시작해 차츰 늘려나가다 중심부로 이동하고 마침내 내 집을 마련하는 일이 고지식한 한국인의 로망이었다. 법제도가 아닌 스스로 진화해온 전세시장이 갑자기 소멸된다면 한국경제에 어떤 파장이 미칠까.

과거 기업자금 조달 위주의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 구조에서 예금금리는 공짜나 다름없이 낮고 기업이 아닌 개인대출은 나름대로 든든한 백이 있어야 했다. 그런 금융환경에서 전세시장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세입자는 근근이 저축한 전세자금을 은행에 예금하고 이자를 받아 집주인에게 월세를 내야 하는데 예금금리가 형편없이 낮으니 월급에서 떼어 내야 했다. 집주인은 필요한 돈을 대출받고 이자를 내야 하는데 월세만으로는 비싼 이자내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전세시장 발달이 소시민 가계를 덜 주름지게 하면서 주택건설과 나아가 자본축적을 통해 나름대로 성장에 기여한 셈이다.

금융중개기능이 취약한 환경에서 전세시장은 임대인이나 임차인의 이해관계에 부합해 시장 스스로 진화했다. 만약 전세시장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예대금리 차로 큰돈을 버는 은행들은 배를 더 불렸을 게다. 오늘날도 정도의 차이는 줄어들었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23년 4월 현재 8개 시중은행의 잔액기준 총평균 수신금리는 연 2.55%인데 평균 대출금리는 연 5.13%로 예대금리 차가 2배나 된다. 한때는 금리 차가 무려 3배가 넘기도 했었는데 감독당국의 연이은 창구지도로 많이 좁혀진 결과다.

경제적 약자들을 절망에 이르게 한 전세사기, 깡통전세 재앙은 ‘정부실패(government failure)’라는 점을 인식할 때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세계경제는 생산성이 급속도로 향상되면서거대 자본 없이도 성장이 가능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재정적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017년 36%에서 2022년 50%로 늘어나면서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생산부문으로 흐르기보다 자산시장으로 몰려 자산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자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던 정부가 종부세 폭탄에다 임대차3법을 만들어 전세가격 4년 인상분만큼 전세가를 단숨에 오르게 만들었다. 젊은이와 서민들의 주거 최초 단계인 빌라전세 부작용을 외면했다. 아무리 깜깜한 세상이라도 ‘빌라왕’들이 몇 백 채씩 갖고 있어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관리들을 그 어찌 공복이라 일컫겠는가,

법을 만들어 강제로 전세를 소멸시키거나 전세금을 예치(에스크로)하도록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23년 현재, 우리나라 전세시장 규모는 재정적자에 버금가는 1000조원을 넘어섰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그 큰 돈이 경제적 동기와 무관하게 예치돼 잠자도록 묶어둔다면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을 더욱 저하시킬 게 뻔하다.

장자는 박새가 숲을 차지해도 정작 필요한 것은 작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구름위에 사는 신선이 아니라면 장자 같은 성인도 먹고 자고 쉴 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모두에게 소중한 주거문제를 깊이 검증하지 않다가 시행착오가 나면 많은 서민들을 피곤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전세 폐지 이전에 현재 과점 상태인 금융중개기능부터 바로잡는 일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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