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재벌집 막내아들'에 열광하는 '이생망 청춘'

  • 등록 2022-12-15 오전 6:15:00

    수정 2022-12-15 오전 6:15:00

[정덕현 문화평론가]“이번 생은 망했다.” 농담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회자되는 이 말은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잘 드러낸다. 줄여서 ‘이생망’이라는 신조어로도 쓰이는 이 말 속에는, 더 이상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허무가 담겨있다. 이번 생이 망했다면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이생망’에는 그런 기대가 담겨있지 않다.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가 하는 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이생망’을 외치는 삶일 수 있다. 다만 이 자조적인 신조어가 저격하고 있는 건 다음 생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태생으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현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나올 정도로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학교를 가고 그 스펙을 통해 어떤 직장을 얻고 또 누구와 결혼해 미래를 그려나가는가가 출발점부터 완전히 다른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른바 ‘이생망 정서’는 이를 소재로 하는 판타지를 불러온다. 웹툰과 웹소설을 통해 하나둘 생겨나면서 저변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회귀물’이라는 장르는 바로 이 이생망 정서의 판타지물들이다. 회귀물은 어느 경위로 인해 주인공이나 누군가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회귀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이생망 정서를 가진 이들은 회귀물이 그려내는 ‘인생 리셋’ 스토리에 빠져든다. 회귀물은 후회가 되는 어떤 사건 이전으로 회귀해 인생을 재설계함으로써 이미 겪었던 일들을 피하거나 혹은 이용하는 스토리가 그려진다. 현실의 결핍을 판타지로 채워주는 것이 콘텐츠가 갖는 힘이라고 볼 때, 회귀물이 폭발적으로 는다는 건 그만큼 이생망 정서가 사회 가득 채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 신드롬급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바로 이 회귀물의 판타지를 가져온 작품이다. 이 작품이 회귀물 중 특이한 점은 그 밑그림으로 현대사 그것도 굵직한 경제적 사건들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순양그룹 오너가의 머슴처럼 일하던 주인공은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을 겪은 후 1987년으로 회귀해 순양그룹 막내 손자 진도준(송중기)이 되어 다시 살게 된다. 이미 한 번 살아봤던 삶이라는 건, 그에게 모든 것들을 기회로 만들어준다. 1987년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모두가 김대중 혹은 김영삼 중 한 명이 차기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상할 때, 진도준은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노태우가 당선된다고 말함으로써 순양그룹 오너인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눈에 든다. 급기야 그는 그 해 벌어졌던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미리 알려줘 그 비행기를 탈 뻔했던 회장의 목숨을 구하고, 상으로 당시에는 아무 가치도 없었던 분당에 땅을 요구해 대학시절 이미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된다. 실로 당대를 살았던 세대들이 농담처럼 “그 때 거기에 땅을 사뒀으면...” 하고 말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이 판타지는 실제로 그려낸다.

이러니 보통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끌던 회귀물 판타지가 이 작품에서는 중장년 세대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외환위기가 터질 걸 미리 알았더라면, 반도체가 미래의 중요한 기간산업이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제조업의 시대가 가고 금융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심지어 9.11 테러 사건이 뉴욕 한 복판에서 터질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러한 변화나 위기 상황을 오히려 강력한 성장과 성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이 드라마는 판타지로 담아낸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사의 경제적 사건들이 과거로 회귀해 다시 삶을 설계하게 된 진도준에게 중요해지는 건 그가 마침 재벌가 막내손자로 살게 됐기 때문이다. 만일 평범한 어떤 서민으로 회귀했다면 이미 분당이 신도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그만큼 큰돈을 벌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결국 정보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그걸 현실로 만들어줄 백그라운드가 필요한 셈이다. 재벌가 막내손자라는 위치는 그래서 그가 아는 정보를 통해 좀 더 미래를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한국의 경제가 결국은 막강한 부와 힘을 가진 재벌가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다는 걸 부지불식간에 드러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치열한 노력에 의해 작은 정미소에서 시작해 순양그룹으로 성장시킨 진양철 회장과, 가난하게 태어나 순양그룹에서 머슴처럼 이용되다 살해당하고 회귀해 다시 재벌가 막내손자로 살게 된 진도준의 대결구도다. 진양철이 노력에 의해 미래를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 있던 기성세대들의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진도준은 태생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이생망’ 정서를 가진 현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생망’ 정서가 패배주의로 읽히기도 했던 시대의 인물과 ‘이생만’ 정서가 현실로 읽히는 시대의 인물. 이들의 대결구도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

그건 진도준 시대의 인물이 갖게 된 이생망 정서가 생겨난 이유가 진양철 시대의 인물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순양그룹만을 생각하며 함께 일하는 노동자나 서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들마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내치는 진양철 회장의 마인드는, 오로지 자신들의 성장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는 승자독식구조 속에서 못 가진 자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더 못가지게 되는 사회 시스템이 공고해지고 이 시스템 속에서 청춘들은 ‘이생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스스로 삶을 개척해낼 수 있었던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갖게 된 것을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그 시스템을 공고하게 하면서 이제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낼 수 없는 청춘들의 절망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라니.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드라마가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기성세대의 선택들과 맞서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현실은 그래서 뜨거운 만큼 씁쓸해지는 뒷맛을 남긴다. 그 강력한 판타지에는 그만큼 커다란 현실의 결핍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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