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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금발의 두 외국인이 발을 구르며 공연에 빠졌다. 두 남자 대학생도 어깨를 들썩이며 음악을 즐겼다. K팝 콘서트장? 아니다. 지난달 29일 정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이다. “꽤갱 갱갱, 꽤갱갱갱~.”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기념해 임실필봉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대가 풍악을 울리자 서울시내 한복판이 시골장터가 됐다. 경쾌한 꽹과리·장구·북소리에 잡색이 춤으로 흥을 돋우자 관객도 농악대가 됐다.
외국인과 잡색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춤을 췄다. 지켜보던 청년들도 공연에 뛰어들어 농악대를 따라 원을 그리며 덩실댔다. 경복궁까지 춤을 추며 농악대 행렬을 따른 멕시코 여성 나디아는 “정말 재미있고 신난다. 친근함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며 웃었다. 대학에서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한다는 홍시화(20) 씨는 “서로 소리를 맞춰가고 그 과정에서 관객과 함께하며 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는 게 농악의 매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판을 벌인 임실필봉농악은 남성적인 가락을 중심으로 개인의 기교보다 단체의 화합을 중요시하는 공연을 주로 꾸리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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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이지 뭐.” 농악대에 들어간 그는 “상모가 돌려보고 싶었는데 그땐 상모를 파는 곳도 없어 구하기 어려웠다”며 “농악대 사람들 잘 때 방에서 몰래 상모를 들고 와 달빛에 혼자 연습했다”고 옛 얘기를 꺼냈다. 4년간 밤마다 3~4시간씩 상모를 돌린 소년은 열여덟에 결국 농악대에서 상모를 돌릴 수 있게 됐다. “농악에 대한 신념? 어려서는 몰랐지. 꼭 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어. 그래서 가난하고 고돼도 여태까지 농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김 선생은 60여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묻자 경복궁 옆 궁정동 칠궁에서의 일을 꺼냈다.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가 여덟 살 때 김 선생의 어깨 위에 올라가 무동으로 공연하다 떨어진 일이었다. 김 선생은 농악이 전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된 데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고 기뻐하면서도, 농악에 대한 낮은 사회적 관심에 대한 걱정도 털어놨다. “한국사람이 외국사람보다 못한 거 같아. 외국인이 농악을 더 알아주니까.” 이어 김 선생은 “더 큰 문제는 농악을 이을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라며 “농악 하는 사람들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선생이 이끈 평택농악은 무동놀이 같은 기예가 보태져 역동성이 짙다.
▲“지역성 약화·빠른 동작으로만 예능화”
농악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농악의 지역성이 약화되고, 격렬하고 빠른 동작 위주로 예능화돼가고 있다는 우려다. 토착성이 강한 농악이 실제 생활과 분리되고 전문연희로서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생긴 변화다. 이를 두고 이재필 국립무형유산원 조사연구기록과장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농악행사 지원을 장려해 지역성이 약화되고 있는 농악이 지역에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농악의 대중화를 위해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사자격증제도와 문화가 있는 날 등과의 정책연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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