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강과 신천강이 갈라져 큰 섬인 잠실섬과 그 남서 쪽에 작은 부리섬을 만들었다. 또 잠실섬 왼쪽에는 무동이라는 작은 섬이 한강 수량이 변화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잠실섬과 부리섬이 육지가 된 것은 1971년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 때문이었다. 한강 본류인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육지로 만들고 잠실섬 북쪽은 흙을 파내 가라앉혀 신천강 폭을 넓히면서 강북과 가까웠던 잠실이 강남 쪽으로 편입된 것 역시 이때다.
1970년대 서울도시계획의 주역이자 개발의 산 증인이었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서울시는 1969년 1월 건설부에 공유수면매립인가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이유를 들며 서류를 반려하거나 회신을 미루던 건설부가 70년 중반 ‘이 사업은 민자로 하는 게 바람직함’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정부가 정치자금을 내는 조건으로 대형 건설사들에 잠실지구 매립사업권을 약속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현대·대림·극동·삼부·동아 기업 등이 참여해 물막이 공사가 시작됐다.
이에 잠실 주변 터까지 합쳐 1122만㎡의 넓은 땅에 5개 단지 규모의 잠실아파트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된다. 1974년 12월 잠실은 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됐고 서울시는 154만 2558㎡은 체비지로 만든 다음 125만 4000㎡은 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에 양도하고 나머지는 서울시의 아파트 건립지구로 지정했다. 서울시는 잠실시영아파트 119개 동 4520가구를 건립했고 주택공사는 125만 4000㎡ 중 56만 1000㎡ 규모 토지를 4개 지구로 나눠 잠실주공 1·2·3·4단지 1만 1660여가구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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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선수촌 아파트가 먼저 완공됐다. 이 아파트는 강남구 대치동과 가까워 입지가 좋을 뿐만 아니라 150%의 낮은 용적률 9층부터 18층까지 대각선 방향으로 내려오며 성냥갑 같은 판에 박은 듯한 꼴을 벗어난 대단지 아파트, 66만㎡이나 되는 공원을 앞마당에 둔 대한민국 최고의 웰빙 아파트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필로티 아파트인데다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57평형과 66평형에는 지하주차장까지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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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10일 매일경제 <투기 우려되는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기사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기사는 “돈 놓고 돈 먹는 아파트”라며 “가장 규모가 큰 66평을 경우 7당 6낙(7當6落)이라 7000만원 기부금을 내면 당첨되고 6000만원으로는 낙첨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뜨거웠던 청약 열기와 달리 실제 분양이 완료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정부가 세무조사 방침 등 강력한 투기 단속에 나서자 계약자들이 잇달아 포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두 아파트의 등장은 잠실·송파 일대를 강남권으로 편입시키는 강력한 모멘텀이었다. 1988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된 것 역시 이때다. 같은 기간 서초구가 강남구에서 분리되며 흔히 말하는 ‘강남 3구’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