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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 이 작품] 고통을 잊게 하는 연극의 아름다움

심사위원 리뷰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역병과 장마의 어둠 속 연극이 주는 원동력
  • 등록 2020-09-03 오전 6:00:00

    수정 2020-09-03 오전 10:13:36

[김미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교수] 유례없는 역병과 장마, 폭염이 우리 삶을 어둡게 물들일 때,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덧없는 삶 속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연극 ‘화전가’ (사진=국립극단)
이성열 연출로 국립극단 70주년 기념공연 ‘화전가’가 마침내 무대에 올랐다. 코로나로 한 차례 연기 끝에 가까스로 막을 올렸으나 2주도 못되어 종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근대사의 풍랑 속에 선 개인에게 관심을 보여 온 배삼식 작가가 이번에는 70년 전 4월 하순 안동의 어느 반가로 우리를 불러들인다. 청상과부 시누와 며느리, 행랑 식솔과 함께 살고 있는 김씨부인의 환갑 전날이다. 외지에서 딸들도 하나씩 모여들고 잔치준비에 들떠 있는데 대뜸 김씨부인은 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가자고 제안한다. 여인들이 밤새 화전놀이에 입고 갈 옷을 챙기고 분주하게 음식을 마련하며 두런두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울 뿐, 무대에는 변변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화전놀이나 화전가도 없다. 6.25의 발발을 암시하는 전쟁의 폭음과 살상 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질 때, 막내딸 봉아의 기억극으로 펼쳐진 이틀간의 행복한 일상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화전가’는 무엇보다 사라지고 묻힌 것들을 복원하는 연극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좌우대립으로 갈라진 역사의 상흔이 풍비박산 난 김씨부인네 살림이나, 죽음으로, 이북으로, 감옥으로 내몰린 집안 남자들에 의해 드러난다. 전통도 부활시킨다. 밤을 새던 경신야나 화전놀이 같은 풍속뿐 아니라 납닥생냉이 안동포의 멋과 청보리죽의 맛도 되살려낸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사투리 복원이다. 안동 지방의 구어를 그대로 되살려내 요즘 보기 힘든 문학적 연극을 성취해낸 작가의 장인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서정적이고 정겨운 세계도 돌려놓는다.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못, 황혼에 물든 고즈넉한 고택, 밤새가 울고 절간의 종소리가 들리는 무대는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화전가’가 더욱 각별한 까닭은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여자고 남자들은 부재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남자들 대신, 여자들은 삶을 추스르며 서로 보듬고 연대하며 집안을 지켜낸다. 거대 남성 서사에 묻힌 평범한 여성들을 소환해 내, 이들이 우리 역사의 진정한 버팀목이라는 작가의 시각이 새삼 놀랍고 반갑다.

불안한 행복의 순간을 무대에 점차 차오르는 물의 이미지로 표현한 박상봉의 무대 아이디어도 반짝인다. 김영진의 기품 있고 단아한 한복 디자인 또한 반가 여인들의 품격을 더한다.

두 연기자가 특히 눈에 띈다. 반가 과부 며느리의 운명을 절제 있게 연기해 눈시울을 젖게 만든 이도유재와, 안동토박이라고 믿을 만큼 완벽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욕심 많은 둘째 딸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유진이 돋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올라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공연 ‘화전가’는 그만큼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삶은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으며, 연극이야말로 역경에 맞서는 힘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라고.

연극 ‘화전가’. (사진=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사진=국립극단)
연극 ‘화전가’.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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