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을 찾아서)(25)BMW같은 세탁기 `트롬`

  • 등록 2007-11-27 오전 9:40:00

    수정 2007-11-27 오전 9:40:00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명품'만이 살아남는 시대다. 고객의 지갑을 기꺼이 열게 하려면 괜찮은 품질과 적당한 가격만으로는 부족하다. '쓸만한' 제품들은 얼마든지 널려있기 때문이다.
 
명품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있다. 고객은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얽힌 배경과 스토리를 사면서 자신도 그 속의 일원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기업은 명품을 만들려고 애를 쓰며 명품은 다시 그 기업을 돋보이게 한다.  
 
이데일리는 우리 기업들이 정성을 쏟아 만든 대한민국 대표명품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대표상품들의 위상과 현주소를 함께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명품탄생을 희망한다. (편집자주)

지중해 특유의 뜨거운 뙤악볕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느 여름날 오후. 스페인 제3의 도시 발렌시아 시내의 한 분수대에서는 희귀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너명의 남자들이 분수대 앞 가게에서 대형 생수통 예닐곱 개를 사오더니 뚜껑을 열고 분수대에 생수를 콸콸 쏟아버리는 중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그 모습을 쳐다봤지만 그 남자들은 그냥 씩 웃고 말 뿐이었다. 그들은 빈 생수통을 차에 싣고 어디론가 휙 떠나버렸다.

◇ 발렌시아 수도물 몰래 들여온 이유 

그 생수통들은 보름 뒤 인천공항 세관 사무실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담아온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서너명의 남자들이 그 생수통들을 둘러싸며 모여들었다. 인천공항 세관으로 다급히 불려들어온 LG전자 직원들이었다.

"이 생수통들이 불량부품입니까? 이런 식으로 세관을 속이면 어떻게 합니까?"

세관직원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LG전자(066570) 직원들을 몰아세웠다. 그 물통들은 방금 전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물통들이었다. 커다란 박스에 담아 '불량부품'이라고 신고한 후 국내로 들여오다가 세관에서 들킨 것. 이 물통들 안에는 며칠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떠온 수돗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수출용 세탁기를 연구하려면 그 나라 물이 어떤 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유럽의 물은 석회성분이 많아 빨래가 잘 안되기로 유명한데 특히 스페인 물, 그 중에서도 발렌시아 지역의 물이 가장 열악했죠. 그 물로도 빨래가 잘 되는 세탁기여야 유럽에 수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LG전자 직원들은 세관 직원을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세탁기 개발을 위해 수십리터 정도의 발렌시아 지역 수도물이 필요했는데 정식 통관절차를 거치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단계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직원들이 고민끝에 A/S용 부품으로 위장해 들여온 것이었다.

어렵사리 세관을 설득해 받아온 물통들은 창원의 LG전자 연구소로 옮겨졌다. 얼마후 '발렌시아 수돗물로도 빨래가 잘 되는 걸 확인한' 수출용 '스팀트롬'이 만들어졌다.
 
LG전자의 트롬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드럼세탁기다. 이제 최근에 드럼세탁기를 산 미국 사람 5명중 1명은 트롬으로 옷을 빤다. 그러나 4년전 미국 시장에 트롬을 들고 처음 나갔을 때는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까웠다.

◇ 쪼끄만 코리안 세탁기라고? 일주일치 빨래 다 가져와봐!

미국인들은 세탁기를 전자제품이라기 보다는 '기계'라로 생각한다. 온갖 가전제품은 모두 거실과 주방으로 들여놓으면서 세탁기는 지하실에 세탁실을 따로 두고 그 곳에 '처박아' 놓는다.
 
디자인이나 기능보다는 그저 튼튼하고 잘 돌아가면 그만이다. 빨래를 자주 하지도 않는다. 청바지처럼 값싼 옷을 여러벌 사서 갈아입고 다니며 빨래는 '몰아서' 한꺼번에 한다.
LG전자 관계자는 "그런 미국시장에서 한국산 세탁기는 예쁘장해서 귀엽기나 할까 믿고 돌리기는 어려운 제품으로 인식됐다"며 "그런 인식을 깨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국인에게 세탁기는 뚜껑을 위로 열고 가운데 커다란 봉이 돌아가며 세차게 물살을 돌리는 '탑로드'방식이 대부분이었다. 트롬같은 프론트 로드 방식은 익숙지 않았다.
 
LG전자 관계자는 "미국에 처음 진출할 때 세탁기 시장이 연간 900만대 가량이었는데 이중 800만대가 탑로드 시장이었다"며 "탑로드는 여섯개의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어서, 좀 비싸더라도 프론트로드로 승부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농구공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둥근 창이 달린 세탁기가 제 역할을 할지 계속 의심스러워했다.

LG전자가 이런 미국인들의 콧대를 꺾기 위해 내놓은 제품이 15Kg 용량의 초대형 세탁기였다. 가정용 세탁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량이었다. 무조건 크고 봐야 하며 동양에서 만든 제품은 사이즈가 작아 맞지 않는다는 미국인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는 '큰 놈'으로 맞대응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초대형 용량의 세탁기는 만들고 싶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LG전자는 15Kg으로 용량을 키우면서 13kg 제품과 사이즈는 같도록 만들었다. 미국 가정의 세탁실에서 세탁기가 차지하는 공간을 LG전자가 맘대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작은 세탁기안에서 큰 용량의 통을 달아 돌리려면 진동을 제어하는 기술과 모터의 성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큰 통이 덜덜거리며 돌면 내부의 부품들이 손상을 입기 쉽고 15Kg짜리 대형 세탁물을 돌리려면 모터의 힘도 만만치 않게 커야 하기 때문이다.
 
LG전자는 모터와 벨트를 연결하는 간접 구동방식이 아니라 모터의 축에 세탁통을 바로 연결하는 직결방식 모터를 적용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무조건 큰 세탁기를 좋아하던
한국 소비자들을 상대하면서 단련된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 북미시장에 수출될 트롬을 만드는 현장 모습


거기에 세탁실을 지하실에 두고 있는 미국인들을 위해 거실에서도 지하실의 세탁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세탁기 원격 점검 시스템'도 달아줬다. 세탁기 위에 건조기를 올려놓고 쓰는 생활습관을 감안해서 조작용 제어판도 앞면과 윗면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색상도 파격적으로 빨간색과 푸른색을 넣어 '거실에 들여놓아도 좋을만한' 제품으로 인식시켰다. '이래도 안사겠느냐'는 일종의 오기마저 담겨있는 도전이었다. 

그 전략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거기다 '물이 아닌 증기(스팀)로 빨래를 한다'는 개념을 적용한 스팀트롬까지 내놓으면서 세탁기를 전기로 돌리는 물레방아 수준으로 인식하던 미국인들도 세탁기를 첨단 가전제품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부 바이어들은 새로운 기능으로 무장한 트롬을 가리켜 '세탁기의 BMW'라는 애칭을 붙이기도 했다.

◇ 42인치 LCD TV보다 비싸.."세탁기의 BMW"  

15㎏ 스팀트롬 드럼세탁기 판매가격은 1599달러로 웬만한 중고차 가격에 맞먹는다.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LG전자의 42인치 LCD TV보다 비싸다. 트롬 세탁기 전체의 평균 판매가격도 경쟁사보다 200달러 가량 높은 1000달러 수준이다. '한국산치고는 괜찮은 제품'이라서 잘 팔리는 게 아니라 '돈만 있다면 사고 싶은 제품'이라서 잘 팔리는 셈이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드럼 세탁기를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산다. 그 중에서도 '시어스'라는, 우리나라의 백화점과 할인점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유통점이 3800여개의 매장을 가진 가장 큰 유통망이다.

시어스는 가전업체 월풀에서 드럼 세탁기를 납품받아 '켄모어'라는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판다. 켄모어가 미국 주방가전 시장에서 GE 다음으로 잘 팔리는 브랜드가 된 것은 전적으로 시어스의 힘이었다.

세탁기 업체들의 입장에서 시어스는 난공불락에 가까운 벽이었다. 시어스는 켄모어 세탁기만 팔아도 아쉬울 게 없을 뿐 아니라 그걸 파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게다가 월풀과 시어스는 1916년부터 90년 넘게 납품관계를 이어온 가족같은 사이. 작년에 시어스가 판 세탁기 중 94%가 월풀제품일 정도였다.

그런 시어스에 LG전자의 트롬세탁기가 지난 4월 처음으로 진출했다. '트롬을 찾는 고객들을 돌려보내면서 켄모어를 파는 게 과연 남는 장사냐'는 고민을 계속 해오던 시어스가 결국 트롬을 들여놓기로 한 것.
 
트롬은 시어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해 여름이 가기 전에 켄모어를 제치고 드럼세탁기 부문에서 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앞서 다른 유통점인 베스트바이와 홈디포에도 트롬은 발을 들여놓은 지 1년만에 그 유통망에서 팔리는 드럼 세탁기의 절반이 트롬으로 바뀌었다.

LG전자 관계자는 "올해말이나 내년초에 다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기 위해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며 "미국 소비자들의 입이 또 한번 딱 벌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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