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용천사·불갑사'' 꽃무릇의 애잔한 속삭임 들리세요

  • 등록 2007-09-20 오후 1:06:00

    수정 2007-09-20 오후 1:06:00

▲ 누가 가을을 퇴락의 빛이라 했는가. 피보다 붉은 꽃무릇으로 가을이 빨갛게 피어올랐다. 불갑사 뒤편 저수지 인근의 꽃무릇 군락.
[한국일보 제공] 가을이 붉게 피어났습니다.

멀리 남쪽에서 태풍이 북상 중이란 소식을 들었지만 마음의 조급함에 떠밀려 기어코 길을 나섰습니다. 무에 그리 헛헛하다고 무모하게 떠난 길. 맨날 틀리기만 하던 일기예보도 이날 따라 딱딱 들어맞는지 서산을 지날 즈음부터 차창에 물방울이 부딪기 시작합니다.

10대들은 ‘눈물이 난다’를 ‘안습(안구에 습기차다)’이라고 쓴다지요. 달리는 차창에도 많은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한껏 우울에 빠져들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미끄러운 길과 흐릿한 시야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만 모든 신경이 쏠리더군요.

▲ 불갑산 동백골 계곡물 따라 꽃무릇이 피어났다.
전남 함평의 불갑산 자락 용천사에 도착해 길을 나서니 주위가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빨간 가을을 피워내는 꽃무릇이 무리를 지어 부도밭 주위로, 낮은 토담 옆으로 붉은 융단을 깔아놓았습니다.

이파리 하나 없는 기다란 연녹색 꽃대 위에 가는 꽃잎과 실타래 같은 수술이 서로를 섞어 붉은 화관을 이루는 꽃무릇. 가녀린 꽃대 하나에 의지해 툭툭 터져 갈라진 꽃송이는 가볍게 이는 바람에도, 한 두 방울의 빗방울에도 흔들리며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듯 합니다.

꽃무릇은 한 뿌리이면서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想思草)’의 아련함으로 회자되는 꽃입니다. 꽃과 꽃대가 지고 나면 땅에서 맥문동 비슷하게 생긴 잎이 솟아나 눈 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지나 이 잎이 사그러들면 또 꽃대가 솟아올라 빨간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여름철 칠석 전후해 분홍이나 노란꽃을 피우는 상사화와 함께 꽃무릇을 슬픈 사연의 ‘상사화’란 큰 범주에 가두곤 합니다. 붉은 입술 같은 꽃잎과 속눈썹처럼 가냘프고 긴 꽃술의 화려함에서 기어코 가련함을 끄집어내야 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무엇일까요. 꽃의 사연보다 꽃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성에서 더욱 깊은 애잔함이 느껴집니다.

꽃무릇은 유독 절집 근처에 많이 피어납니다. 그 뿌리가 방부의 효과가 있어 탱화를 그릴 때 찧어서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속에선 절과 꽃무릇의 관계를 스님이 한 여인을 그리워하다 죽어 꽃이 되었다거나 한 여인이 스님을 연모하다 승방 앞에서 죽어 꽃으로 피어난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의 징표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 너머 영광의 불갑사에서도 용천사 못지않게 크고 아름다운 꽃무릇 군락이 있습니다. 보통은 용천사를 들렀다 차로 20분 정도 돌아가 불갑사를 찾아가지만 저는 산을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용천사에서 용봉, 구수재, 동백골로 해서 불갑사까지 3.8km되는 오솔길을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야생의 꽃무릇과 이제 색이 바래지기만 기다리는 절정의 초록을 만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용천사 경내를 지나 시작된 숲길의 초반은 오르막이 가파르더군요. 우산을 받쳐들고 터벅터벅 오르는데 제법 허벅지가 팍팍해옵니다. 한 10분쯤 걸었나 땀인지 빗물인지 목덜미가 축축해질 무렵 능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이제부터는 동백골의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편안히 내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본격 태풍권에 접어들었는지 빗줄기가 제법 거세진 바람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굵어진 빗방울은 바로 옆에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더해져 귀청을 울려댑니다.

동백골 계곡을 따라 딱 계곡물의 폭 만큼 바로 옆으로 꽃무릇이 흐드러지게 피어 빨간 꽃물결로 흐르고 있습니다. 초록의 숲속에서 도드라진 꽃무릇의 아름다움으로 목덜미로 신발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도 마냥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1시간 여 숲길 여정을 마치자 불갑사 직전에 작은 저수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담한 벤치가 군데군데 놓여진 산책로가 꽃무릇 군락을 끼고 잘 만들어져 있더군요.

저수지의 정한 물에 비친 꽃무릇의 풍경은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자꾸 지워대는 통에 감상할 순 없었습니다. 대신 꽃무릇 군락과 저수지가 빚어내는 호젓한 우중 풍경이 결코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새겨주었습니다.

불갑사를 한바퀴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 뒤돌아보니 길가 나무그늘 아래마다 온통 꽃무릇 군락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허전함을 달래려 왔던 우중 불갑산 산행길. 꽃무릇의 붉음은 허름한 가슴에 정열의 꽃불을 피워놓았고, 그 꽃불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식지않고 훨훨 타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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