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기행] 이곳엔 시간이 물처럼 고여 있다

''소나티네'' 오키나와
잔혹한 무라카와가 잠시 머문 이시가키섬
  • 등록 2006-05-24 오후 5:08:30

    수정 2006-05-24 오후 5:08:30

[조선일보 제공] 그 시계에는 비닐 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가와사키시(川崎市)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타기 직전, 시계상점 진열대 옆에 서 있던 시계를 봤다. 길쭉한 지지대 위에 둥글게 놓인 그 스탠드형 시계의 바늘은 멈춰져 있었다. 고장났다고 시계에 비닐 봉지를 씌운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짐승의 시간-가와사키

도쿄 인근 가와사키시의 게이힌 운하는 ‘소나티네’ 주인공인 야쿠자 중간 보스 무라카와가 채무자를 기중기에 달아 물 고문을 하는 장면에 등장했다. 채무자가 익사하자 그는 “죽었나보군. 뒤처리 부탁해”라는 냉혹한 말을 부하들에게 남기고 떠났다. 도쿄에서 활동할 때 무라카와는 바쁜 사람이었다.

게이힌 운하는 그 장면의 냉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모래밭과 검은 물. 운하 주위는 공장 지대였다. 해만 지면 폭주족 출몰로 살벌해진다며 택시 기사는 일몰 전 떠나는 게 좋을 거란 충고까지 했다.

하지만 황혼은 모든 추(醜)를 가리는 비단 베일 같은 것이었다. 산책로를 배회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근처 활주로를 막 벗어난 비행기가 급선회하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노을에 채색되자 검은 물도 윤기 있는 점도로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이제 밤은 폭주족 오토바이의 거친 소음조차 어둠 속에 묻어버릴 것이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을 달렸다. 밤이 되면 모든 고양이가 검은색이다.

◆인간의 시간-이시가키

이시가키섬(石垣島) 공항에서 손목시계를 잃어버렸다. 일본 열도 최남단 오키나와(沖繩)현 중에서도 한참 남쪽에 놓인 이 작은 섬을 여행하며 처음엔 수시로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정신없이 흘렀던 시간과 달리, 이시가키에선 시간이 물처럼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섬에서의 일정은 취재라기보다 산책에 가까웠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slow’는 네 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life’도 그렇다. ‘speed’는 다섯개의 철자로 되어 있다. ‘death’도 그렇다. 평화로운 모든 것은 느리다.

잔혹한 무라카와도 여기서는 아이 같았다. 조직 내 갈등으로 섬에 온 뒤 할 일이 없어진 무라카와가 부하들과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던 아카이시 해변은 섬 북동쪽 끝에 있었다. 지금은 소 방목장인 그곳의 산길을 지나 바닷가에 도달했다. 덩치 큰 검은 소떼가 모래밭을 차지하고 있었다. 낯선 자를 발견하자 휴식하던 소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달려들 듯 노려봤다. 약간의 두려움을 누르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소 배설물로 가득한 해변을 걷다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기대한 것이 생명의 찌꺼기 따윈 아니었으니까.

무라카와가 자신이 파놓은 모래 함정에 부하들이 빠지는 걸 보고 웃던 곳을 지나 해변을 빠져나오다 무심코 뒤를 돌아다봤다. 침입자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소들이 그제서야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갑자기 너무나 미안해졌다. 방해한 것도 위협한 것도 실은 그들이 아니었다. 누군가 잠시 들른 휴식 공간이 다른 이에겐 삶의 터전이라는 것. 여행자는 종종 옅은 죄책감의 삯으로 환상을 소비한다.

연이어 방문한 섬 북쪽 카비라 해변의 옥빛 바다는 맑다 못해 투명에 가까웠다. 화사한 햇빛과 싱그러운 바람은 바다의 푸른색 마디마디를 올올이 풀어내 마치 엷푸른 눈이 거대한 저수지에 내린 듯한 풍경을 빚었다. 넘실대는 물은 가끔씩 찰랑이며 기분좋게 모래 위로 넘쳐 나그네의 마음을 적셨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절경 중 하나라는 말 그대로였다. 턱에 찼던 일상의 직선으로 치닫는 시간 대신 오키나와의 둥글게 일렁이는 시간은 어디서나 부드럽게 흘러 넘쳤다. 서둘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나티네’에서 낚시꾼을 가장한 킬러는 이 해변에서 원반던지기를 하던 무라카와 조직원들을 급습했다. 모래밭에 놓인 배 앞에 앉아 있느라 적의 눈에 띄지 않았던 무라카와는 살았지만 부하는 사살됐다. 영화에서처럼 곳곳에 작은 폐선들이 놓여 있는 해변을 단체 노년 관광객들이 몰려와 설레며 걸었다. ‘소나티네’ 중 후반부 총격 장면들은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 때문에 역설적으로 폭력성이 더 도드라진다. 낙원을 앙망하는 눈길만이 있을 뿐, 이땅에 낙원 자체는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듯한 오키나와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소나티네’는 결국 생의 허무를 그대로 드러내는 강력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복수를 마친 무라카와가 머리에 총을 쏘는 장면으로 영화와 삶 자체를 맺는 마지막 장면은 섬 동쪽 카라봉 근처 한적한 산길에서 찍었다. 한국인은 처음 본다는 택시 기사 가즈오에게 명함을 줬더니 ‘朝鮮日報’ 글귀를 보고 “북한에서 왔냐”며 놀랐다.

가즈오와 함께 한참 헤매다 라스트신 촬영 장소를 간신히 찾아냈다. 옆에 사탕수수밭이 펼쳐진 그곳은 거칠고 좁은 비포장도로였다. 무라카와가 차 안에서 생을 마친 그 자리에 택시를 세웠다. 길의 곧게 뻗은 구간이 끝나고 에스(S)자로 휜 부분이 막 시작되려는 지점이었다. 차에서 내렸다. 흙길엔 죽음 같은 정적이 서려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면 사탕수수가 흔들리는 것을 신호로 섬 전체가 통째로 흔들렸다.

무라카와는 세류(世流)를 타고 흐르기보다는 끊어지기를 택한 남자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끊을 수는 있다. 길 위에 오래 서서 머무르자 택시에 남아 있던 가즈오가 이상한 듯 내다봤다. 모든 것이 신기루 같은 여정에서, 머무르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을 잠시라도 양손에 함께 쥐어볼 수 있는 주문(呪文) 같은 것이었다.

◆◆◆

공항에 가기 전 이시가키의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들이 끼워둔 명함 극장표 사진 메모로 가득한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의 추억을 가져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여정의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명함을 꺼내 압정으로 벽에 꽂았다. 가끔씩 넘실거렸던 오키나와의 시간은 그 순간 기억 속에서 멈추며 영원히 고정됐다. 이 시간을 잊을지언정 흘려보내거나 뒤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계가 멈췄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닐 봉지를 씌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람이 시간을 재지 않고 시간이 사람을 재는 이 추레한 문명 속에서.

‘소나티네’는 일본 거장 기타노 다케시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야쿠자 영화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까지 겸한 이 작품은 정(靜)과 동(動)을 인상적으로 교차시키는 액션 스타일과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으로 국내에서도 열혈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야쿠자 집단의 내분으로 도쿄에서 내려와 오키나와에 머물게 된 중간 보스 무라카와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조직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담았다.

여행수첩 흔히 ‘일본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 남서쪽 끝에 흩어져 있는 160여개의 작은 섬들을 통칭하는 말. ‘소나티네’를 찍은 이시가키 섬에 가려면 오키나와 최대 도시 나하에서 다시 비행기나 배를 갈아타야 한다. 인천에서 나하까지 아시아나 항공에서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이시가키 섬에 가면 절경으로 소문난 카비라 해변을 비롯, 멋진 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지역 전통문화를 볼 수 있는 야에야마 민속촌, 이 섬에서만 자란다는 야에야마 야자수 군락지, 300m가 넘는 이바라마사비치 동굴도 들러볼 만 하다. 어렵게 이시가키까지 갔다면 이곳에서 불과 6㎞ 떨어진 인구 300명의 작고 아름다운 섬 다케토미도 놓치지 말 것. 붉은 기와의 전통가옥 돌담길 사이로 우마차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오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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