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A(비밀유지협약) 서약서까지 쓰고 마주한 100페이지짜리 시나리오는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 시나리오를 처음 접한 순간이다. 머릿 속에 출연 배우들을 상상하며 1시간 만에 뚝딱 시나리오를 읽었다. 극한직업의 흥행에 기뻐할 틈도 잠시, ‘이거 되겠다’ 싶은 마음에 평소 영화 1편당 투자하던 금액(5억~6억원)의 두 배인 12억원 투자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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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여기에 봉준호 감독에 대한 확신이 더해지니까 승부를 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컴퍼니케이(307930)파트너스 본사에서 만난 장욱진(49) 이사는 기생충의 투자 일화에 대해 “개봉 전까지 비밀 유지 조항이 있어 기생충 얘기를 주변에 못 해 답답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 이사는 지난 2008년 컴퍼니케이파트너스 합류 이후 영화·뉴미디어 분야에 약 1000억원 이상을 투자한 미디어 투자 전문가다. 1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과 △극한직업 △베테랑 △기생충 등 1000만 한국영화 9편을 포함해 총 160편 이상의 영화 투자를 진행했다.
기생충은 투자 업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과 예상치 못한 전개에 큰 호평을 받았다. 반면 ‘계층갈등’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봉 감독 이름값에 비해 저조한 흥행을 기록한 영화 ‘마더’(301만명)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 투자를 망설이는 곳도 있었다. 장 이사는 “평소 친분이 있는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035620) 대표에게 현장 분위기를 물었는데 ‘틀림없다’는 대답을 들은 것도 (투자에)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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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영화 투자만 9편에 달하는 미디어 투자업계 ‘미다스의 손’이지만 영화 투자는 아직도 어렵다는 게 장 이사의 말이다. “무조건 된다 싶던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고 도저히 안될 거 같다고 생각한 작품이 잘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랜 투자 경험에도 (흥행 성적이) 예상과 다를 때면 힘들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전을 계속할 수 있죠.”
장 이사는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계기로 한국 영화의 해외 수익구조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영화는 콘텐츠의 질적 성장과 달리 매출액 대비 수출액 비중이 가장 낮은 산업으로 꼽힌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 영화 전체 매출액 5조5000억원 가운데 수출액은 4072만달러(약 483억원)로 전체 0.9%에 그쳤다.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게임(53.5%)이나 애니메이션(25.8%)은 물론 만화(3.9%)나 출판(1.3%)과 비교해도 턱없이 낮은 수치다.
장 이사는 “종전까지 국내 영화를 해외에 팔 때 한 편당 100만~150만달러(12억~18억원) 수준에 팔고 관객 동원에 따른 추가 수익은 받기 어려웠다”며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계기로 해외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에 변화가 생기거나 한발 더 나아가 (해외 시장)직접 배급에도 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7년에 조성한 ‘우리은행-컴퍼니케이 한국영화투자조합’을 통해 올해 100억원 이상을 새 영화에 투자할 계획이다. 2022년 3월이 만기인 이 펀드는 회수한 투자금을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용한다. 누적 총액은 280억원으로 투자 원금(12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영화 극한직업으로 투자금의 4배 넘는 수익을 거뒀고 기생충도 오스카 수상 전까지 원금 대비 2배 가까운 수익을 확보했다.
요즘도 개봉을 앞둔 시나리오를 보고 있다는 장 이사는 향후 계획을 묻는 말에 “당장 올해 말이나 내년에 투자할 기대작을 찾고 있다”며 “한 두번의 흥행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수익률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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