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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금융혁명)E*Trade-온라인전문 증권사 효시
  • [edaily] <편집자 주> 기획시리즈"디지털 금융혁명" (1부)에서는 증권업계의 온라인 트레이딩 시스템을 집중 소개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계 최초의 온라인 전문 증권사 이트레이드(E*Trade)를 마지막으로 기획시리즈 디지털 금융혁명 1부-온라인 트레이딩을 끝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2부-인터넷 뱅킹이 이어집니다. 소위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인터넷이 우리 생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불문가지다. 농업혁명, 산업혁명이라는 인류의 2대 혁명에 이제 "정보통신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혁명이 추가된 것이다. 인터넷과 데스크탑의 결합은 단순한 기술혁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개 개인에게 엄청난 규모의 독자적인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부여한 셈이 됐고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영역과 규모, 그리고 영향력은 이제 엄청난 것이 됐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촉발된 개인 위주의 사회 구조 재편에 가속이 붙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 속에서 온라인 금융부문은 개인의 존재가 가장 크게 부각되는 분야 중 하나다. 금융업은 일찍부터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소수의 프로들이 독점하고 있는 전문분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들도 전문분야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자산을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자율성 욕구가 분출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온라인 금융부문은 현재와 같은 정보통신혁명의 파도 속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온라인 금융부문의 선두주자를 꼽으라면 "세계 최초의 온라인 전문 증권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단연 이트레이드다. 이트레이드는 세계 최대의 금융시장인 미국에서 온라인 증권시장 점유율이 찰스슈왑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하지만 찰스슈왑이 서비스 초기단계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합해 고객유치에 나선 것과는 달리 이트레이드는 순수 온라인만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짙다. 물리학자 빌 포터가 82년 56만6000달러의 자본금으로 창립한 이트레이드는 온라인 증권거래시스템을 개발, 피델리티와 찰스슈왑 등의 대형 증권사에 납품을 시작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주식투자를 위해 증권사를 찾는 일반 투자자들이 물어야 하는 엄청난 수수료에 의문을 갖게 됐고 그러한 의문을 해결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가 90년대 인터넷 출현으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트레이드는 92년 세계 최초로 순수 온라인 전문 증권거래 서비스를 시작하게 됐고 96년에는 인터넷 대중화에 힘입어 홈페이지(www.etrade.com)을 오픈, 매년 급성장을 거듭해 왔다. 96년에는 전문 경영인인 크리스토스 코차코스(Christos M. Cotsakos)를 CEO로 영입, 공격적인 마케팅과 광고전략을 도입해 98년 말까지 60만 개에 불과했던 계좌 수가 1년만에 200만 개로 급증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지난 2월 15일 이트레이드는 96년 8월 16일부터 적을 두었던 나스닥에서 뉴욕증권거래소(NYSE)로 자리를 옮겨 기업의 신뢰도가 한층 강화됐다. 기존의 "온라인 증권사"라는 한정된 이미지를 탈피해 "종합 금융서비스 업체"라는 포괄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기도 하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고메즈 어드바이저는 98년 8월과 11월, 99년 6월과 9월에 이트레이드를 최고의 온라인 트레이딩 서비스 사이트로 꼽았었고 98년 10월과 99년 5월에는 래퍼티 인포메이션 앤 리서치 그룹이, 98년 12월에는 미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가 이트레이드를 최고의 온라인 브로커로 선정했다. 이트레이드는 온라인 증권거래 중개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98년부터 "Destination E*trade"이라는 비전을 내걸고 종합 금융서비스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천명, 현재 온라인 은행업도 병행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각종 인수합병도 추진하고 있다. ◇ 이트레이드만이 가진 것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미국에서 이트레이드를 이트레이드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브랜드네임 자체만으로도 막강한 파워가 되는 이트레이드가 짧은 기간안에 급속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을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 거래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증권사의 경우 오프라인 증권사가 필요한 지점개설비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근본적인 이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좌개설에서 종목추천과 거래까지 투자자에게 전면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존의 전통적인 오프라인 증권사가 투자자 자신이 투자과정을 관리하는 셀프서비스식의 온라인 방식보다 수수료가 비싼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트레이드가 창립 초기에 급속한 확장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증권사들 보다 절대적으로 싼 수수료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권업계 내에서도 수수료 낮추기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러한 강점은 차차 희석되고 있다. 둘째로는 공격적인 리베이트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트레이드는 거래 횟수가 많아질수록 할인폭이 커지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트레이드는 자사의 사이트로 주식매매를 할 경우 4개월을 기준으로 거래 29건까지는 19.95달러, 74건까지는 14.95달러, 그 이상의 경우 9.95달러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 4개월 동안 75회 거래가 적은 회수는 아니지만 최근 데이트레이더가 급증하고 있어 이러한 리베이트는 타사에 비해 큰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다양한 차트와 그래픽을 이용해 일반투자자들에게 접근이 용이하고 손쉬운 투자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부문이 몇 년 전만 해도 한정된 전문가들만이 접근 가능한 전문분야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대단히 혁명적인 성과다. 그 외 고객 커뮤니티 등 다양한 온라인만의 장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 새로운 문제...오프라인은 적이 아닌 기회 세계 최초의 순수 온라인전문 증권사라는 점을 강조해 온 이트레이드가 최근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것 같다. 오프라인 지점을 개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트레이드는 지점이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본사만해도 약 1300명의 전화상담원을 배치, 고객의 상담과 여러 불편상황들을 즉각 처리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었다. 인터넷 역시 투자정보를 가능한 한 최대로 공개, 자체적인 기업팀은 없지만 여러 리서치 전문회사들의 종목분석 리포트 등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이트레이드는 지난 4월 맨하탄 다운타운의 메디슨 스트리트에 첫 오프라인 점포를 개설했고 올해 미국 전역에 걸쳐 약 20여 개의 소지점을 열어 지역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8500여대의 자동입출금기(ATM)를 설치, 오프라인적 요소도 적극 도입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트레이드의 움직임은 투자부터 종목분석, 거래중개 까지 전면적인 풀(full)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오프라인 증권사들이 온라인 분야에까지 진출하면서 영역을 잠식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지점을 확충, 오프라인 증권사들과 정면승부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또 오히려 저렴한 수수료와 자가매매 방식을 선호해 온라인 증권사들의 주 고객으로 자리잡았던 개인투자자들이 오히려 지점 개설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도 이트레이드의 방향선회의 한 요인이 됐다. 온라인 증권사들의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은 투자에 관한 조언을 듣고자 할 때 얼굴을 직접 맞대로 상담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 역시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결합전략을 새로이 도입하고 있는 기업은 비단 이트레이드 뿐만은 아니며 이제 온라인과 오프라인 증권사들은 개별 시장에서 각자의 영업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온오프(on-off) 통폐합의 물결 속에 전면전에 돌입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트레이드가 가꾸고 지켜온 여러 가지 온라인 증권사만의 장점들이 앞으로도 존속되리라는 것은 명백하겠지만 오프라인 증권사와의 경쟁, 고객 수요의 다양화 등 여러 시장여건의 변화에 직면해 이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현재 이트레이드의 당면과제라 하겠다.
2001.07.06 I 박소연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⑪이동진 HSBC 부지점장(상)
  • [edaily]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딜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그 전까지 기관투자가들은 채권이 발행되면 적당한 수익률에 사서 만기까지 보유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투자전략이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인 HSBC의 이동진 부지점장은 80년대 중반부터 채권 딜링을 시도한 몇사람중 한명이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 용어조차 없었던 ‘데이트레이딩’이나 금리선물 투자까지 시도하면서 채권시장을 주도한 큰 손이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면서 선진금융시장에서 활용되는 금융기법들을 한국 시장에 도입한 개척자인 셈이다. 채권시장의 많은 사람들은 93년 금융실명제 당시 채권수익률의 방향을 돌려놓는데 외국계 은행인 BTC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 이 부지점장이 BTC에서 채권딜링을 담당했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스스로 “다소 과장됐다”고 말했지만 시장에 쇼크가 왔을 때 대처하는 원리로서 ‘역발상’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후배 채권딜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부지점장이 원래 채권딜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 분야에 흥미가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BTC에 입사해서 13년이상 채권시장에 몸담게 됐다. 지금은 직접 딜링을 하기보다는 딜러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장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고비때마다 매매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채권시장 입문 초기에는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거래방법을 도입해 하나하나 실행해보는 것이 재미였다면 지금은 경험과 경륜으로 시장 방향을 예측해보는 즐거움이 있는 듯했다. 그는 채권딜러라는 직업이 시간을 다투며 수백억원짜리 채권을 사고 파는 긴장도가 높은 일이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롱런하는 길이라고 충고한다. 그는 동로마사와 관련된 역사서를 번역할 만큼 역사학에 대해 아마추어 이상의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앞서 행하기 위해서 과거의 역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채권시장이 지금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이전부터 지금과 같은 시장을 꿈꾸고 먼저 행동했던 이 부지점장의 ‘채권인생’을 들어봤다.(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79학번이시네요. 미시간에서 MBA를 하시구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월에 입학해서 2~3달 가량 다녔을까.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어요. 대학 4학년 때 시험을 보고 미국 여러 군데 대학에 입학신청을 했는데 허가서가 딱 한 통 날라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시간이었죠.(웃음) 운이 좋았던 것이 그 무렵 처음으로 군 미필자가 유학을 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습니다. 83년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85년 6월에 귀국했죠. <자동차와 마케팅의 꿈을 접고, BTC에 입사> -귀국해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귀국 후 바로 BTC(Bankers Trust Company) 서울지점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저랑 MBA를 같이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저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취업하려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자동차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동차 회사도 면접을 봤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들을 알아봤죠. 하지만 군대문제 등이 겹쳐서 그런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일단 귀국했죠. 돌아와서 몇 군데 원서를 냈는데 모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그 기업의 이사께서 “이 친구 일하도록 해”라고 말씀까지 하셨는데도 정식 공채기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락이 늦어지더라구요. 그 때 제가 원서를 넣은 외국계 은행 중 BTC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를 한 번 보더니 흔쾌히 “좋다. 내일부터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은행에서 일할 마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개를 같이 쓰고 있는 사람과 그 당시 한참 연애중이었어요. 돈도 많이 필요했던 때라 오라는 곳을 망설일만한 여유가 없었죠.(웃음) 그래서 출근했습니다. BTC에서 몇 달 근무하고 6개월짜리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 저를 물먹인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부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연락이 늦었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제와서 연락을 주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 일단 군대를 마치고나서 얘기해보자” 이상하게 대기업은 의사결정속도가 상당히 늦더라구요. 제가 “나는 MBA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대우를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당시 저는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통 MBA 코스를 이수하면 파이낸스와 관련된 공부를 많이 하는데 저는 학창시절부터 마케팅과목을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겪어보려고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와 어울리고 접시도 닦았습니다. 사실 군 복무를 마치고 BTC로 복귀하고 나서도 한두 군데 정도 면접을 더 봤습니다.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상태였고 외국계 은행의 보수가 낮은 편도 아니라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13년 넘게 근무하게 됐습니다. BTC에서 맨 처음 기업금융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자금부를 새로 개편하면서 팀이 만들어졌고 그 때 새 팀장으로 오신 분이 현 JP모건-체이스의 CEO이신 홍기명 대표입니다. 그 분께서 같이 일해보자고 말씀하셔서 외환, 채권 딜러로 일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계은행은 이동이 잦습니다. 제 윗분들이 여러 곳으로 움직이시면서 빨리 책임업무를 맡게 된 겁니다. -BTC를 첫 직장으로 잡은 건 원래 계획과는 다른 일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권시장에 입문하다> -자금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맨 처음 제 보스는 강정원 현 서울은행장이셨어요. 그 분 도와드리는 일을 했죠. 그 외 크레딧 분석 같은 일도 했구요. 창피한 말이지만 적어도 은행에 다닌다면 대출관계, L/C, 예금, 환전을 어느 수준이상으로는 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입행 후 곧바로 자금부에 들어왔고 딜링업무만 계속해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친구나 친척들이 사업한다고 L/C가 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못해줬죠.(웃음) 개인적으로는 베팅을 좋아한다거나 노름에 관심있는 편은 아닌데 십년 넘게 딜링을 하게 된 것이 참 묘하다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채권만 한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입사 초기에야 누구나 그렇듯 분야에 관계없이 업무보조를 많이했죠. 외국계은행이라고 해서 채권은 채권만 외환은 외환만 하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88년 초 제 사수가 BTC를 그만뒀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전담해서 업무를 추진했으니까 88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MBA를 마치고 외국계 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동기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남았죠. 공부를 계속하지 않은 친구들은 증권사로 가기 시작하더군요. 85년 무렵이 증권사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주식이 뭔지 채권이 뭔지 가르쳐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외국계 은행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학부전공이 경제학이신데 전공결정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른 전공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허허. 그러면 또 지나간 얘기가 나와야하는데. 당시 학제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문과생의 경우 법대, 경영대, 인문대, 사회과학대 등등의 단과대를 선택하는 거에요. 사회과학대로 입학했더니 그 안에 십여 개 정도의 전공과목이 있더군요. 정치, 외교, 사회, 신문 등등. 솔직히 경제에 관심이 있어서 간 건 아닌데 같이 입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경제학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제일 좋은 과라고 하더군요.(웃음) -중동고를 졸업하셨군요. 당시에도 주먹으로 유명하던 시기였습니까. ▲저희 때는 아직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이었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명했죠. 하하.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뭐 더 엄청나더군요. -그럼 ‘싸움’에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모범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학업성적과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은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 한데요. ▲싸움요? 전혀 아닙니다. 하하. 보면 아시겠지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만 어울리지는 않았고요. 물론 고3 때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지만 얌전한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한달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죠. 고2 때까지는 성적에 그다지 많이 신경쓰지 않았어요. <”채권딜링”이라는 새로운 거래기법을 도입> -학부전공은 경제학이었는데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학과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전공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 때 저보고 경제학과를 권유한 친구들은 다 경제학 교수가 돼 있어요. 어떻게보면 저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에이 고등학교 때처럼 좀 놀다가 3~4학년 돼서 공부하지 뭐’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가진 편은 아니었거든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군요. MBA때도 마케팅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셨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네. 저는 학교에 남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서 뭔가 일을 하고, 특히 무역업 같은 것 말이죠. 꼭 장사를 하지않더라도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흥미가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도 무역업에 종사하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거죠. -딜링 룸에 있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활동을 펼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인데요. 숫자들을 바라보면서 고민해야 되는 정적인 일이잖습니까. 활동적인 업무를 좋아하는 분이 딜링을 십년 먼게 해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언뜻 조화가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마케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을 따라나가는 일도 드물었으니까요. 그래서 곰곰 따져보면 ‘아 나는 마케팅체질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업무에 따라 제 성격이 바뀌어왔는지도 모르겠어요. 학창시절에는 분명 지금보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왜냐구요? 제가 원래부터 외국계 은행을 목표로 하고 BTC에 입사한 건 아니지만 들어와서 보니 외국계 은행의 채권 트레이딩은 저 혼자 하고 있더라구요. 당시 채권을 사고 판다는 딜링 개념에서의 트레이딩을 하는 곳은 외국계에서는 BTC뿐이었습니다. 그건 달리 말해 강 행장을 포함한 BTC 경영진들이 향후 트렌드를 예측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딜링을 하지않으면 어떻게 딜링이 가능한가요? ▲물론 혼자라는 것은 약간 틀린 표현이구요. 88년 무렵만 해도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저는 91년부터 채권거래 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물론 지금 규모랑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겠지만 하여간 그 무렵에 채권을 크게하는 곳은 저희와 장기신용은행 정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해주시죠. ▲3000억~4000억원 정도 됐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은 팀을 갖추고 저희보다 좀 더 큰 규모로 했구요. 그 당시 연금, 보험, 투신 등 다른 기관들은 오직 한 가지 전략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기까지 보유하는 “buy & hold” 죠. -그 때 딜링용으로 사용했던 주요 채권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회사채가 최고였습니다. 시장의 벤치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장기채권은 회사채 3년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지금이야 국채도 있고 예보채도 있고 장기채권의 종류와 수가 다양하지만 그 무렵 어디 그런 것이 있습니까. 회사채가 샀다 팔았다하기 가장 쉬운 채권이었고 채권이 나오기만 하면 투신사가 채권을 싹쓸이해갔죠. 물론 채권발행이 매일매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서 며칠 후에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현재는 회사채등급이 무척 세분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은행보증/비은행보증 두 가지 분류 정도였죠. 무보증채권이 있긴 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80년대에는 은행들간의 차이가 없었으니까 증권사 브로커들에게도 “은행보증 채권 얼마얼마 있습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됐어요. 그것이 어떤 은행인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채권을 샀다가 팔 수 있는 유동성만 담보되면 어느 회사냐, 어느 은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5.18 I 정명수 기자
  • 다음, 네티즌중심 여행 서비스-사용자가 컨텐츠등 구성
  • 다음커뮤니케이션이 투어엑스프레스, 달과 인터넷, 에센투어닷컴 등과 제휴,네티즌 중심의 여행 서비스를 5일 오픈했다. 다음 여행 서비스는 커뮤니티 다음카페, 다음칼럼과 마찬가지로 사용자가 직접 컨텐츠와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다. 다음은 이를위해 지난달 다음 가입자를 대상으로 150명의 "여행통신원"을 선발, 이들이 국내외의 생생한 현지정보를 "통신원뉴스" 코너를 통해 전달한다. 이번에 선발된 여행통신원은 전용게시판을 갖게되며 활동기간 중 최우수 통신원으로 선발된 사람은 국내 또는 해외 여행의 특전을 누릴 수 있다. 또 "파노라마 여행" 코너에서는 국내외의 유명 명승지와 도시별 데이트 코스 등이 자세한 정보와 함께 파노라마 영상으로 제공돼 가보고 싶은 곳을 미리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전세계 항공권 현황을 검색하고 온라인상에서 바로 예약할 수 있어 네티즌들은 여행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음 사이트 내에서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여행이야기" 코너에서는 네티즌이 직접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여행지를 추천하고 각종 사진자료를 서로 제공할 수 있다. 특히 "국내여행" 코너에서는 가족여행/배낭여행/연인여행/낚시/일출여행/계절여행 등 테마별로 여행지를 선별, 여행 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며, 여행지/공원/축제/레저,스포츠/문화재/숙박/음식점 등의 컨텐츠를 분야별로 찾아볼 수 있다.
2000.10.05 I 김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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