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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베이비복스, 글로벌 스타로 부상할까
- [edaily 하정민기자] "보아, 베이비복스, 우타다 히카루, 타타 영 등 아시아 가수들이 월드 스타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아시아 음악시장의 급성장과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미국 시장 진출 노력으로 이들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시장을 정복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1일 `아시아 스타, 세계로 발돋움하다(Asian act make a global play)`란 제목의 기사에서 보아, 베이비복스 등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미국 시장 진출 노력을 자세히 소개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말 현재 아시아 음악시장 규모는 58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음악시장의 규모는 9억달러에 불과하다. 125억달러에 달하는 북미, 118억달러의 유럽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다.
그러나 아시아 음악시장의 성장속도가 매우 빠른데다 유명 아시아 가수들의 활발한 서구시장 공략 시도는 아시아 가수들의 월드 스타 등극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아시아 각국 가수들의 급부상 이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아시아 스타들이 국제 음반 프로듀서, 뮤직비디오 제작자들과 활발히 협력한 것이 주효했다. 그 결과 음악이 좋아지고 가수들의 외모가 세련돼졌으며 스타일도 서구인들에게 어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신문은 평가했다. 아시아 문화 자체도 세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WSJ이 스파이스 걸스의 아시안 버전이라고 평가한 베이비복스를 보자.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며 한류 열풍을 선도한 베이비복스는 미국의 유명 흑인음악 레이블인 벙갈로 뮤직과 협력키로 했다. 베이비복스는 지난해 미국 시장을 겨냥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앨범 `라이드 웨스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지난 1996년 총격 사건으로 사망한 전설적 힙합 아티스트 투팩 사커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화제를 모았다.
한국의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아도 마찬가지다. 보아의 소속회사 SM(041510)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은 "나의 꿈은 보아를 미국 스타와 경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스타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시장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과 중국시장부터 제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팝 차트 1위에 오른 바 있는 아이돌 스타 보아는 이미 일본 시장을 석권했으며 활동 범위를 날로 넓혀가고 있다. 미국 화장품업체 메이블린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는 보아는 메이블린이 지역 광고에서 기용한 최초의 한국인 모델이기도 하다. 보아는 지난 2003년 방한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한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같이 공연한 바 있다.
이수만 회장은 "종국에는 아시아 음악시장이 할리우드를 제치고 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며 "이 때 아시아 스타들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로 중국 음악시장이 세계 5위 안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 음악시장은 2003년 말 현재 1억1570만달러의 규모로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태국 최고 아이돌 스타 타타 영은 최근 소니BMG와 계약하고 미국, 유럽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타타 영은 지난 2월 최초의 영어 앨범을 발매했으며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프로모션 활동을 벌이고 있다. 타타 영의 소속사인 소니BMG는 호주와 독일 시장에서도 그녀의 영어 앨범인 `I Believe`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특히 호주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경우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호주 시장 진입에 주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소니BMG의 리처드 데니캠프 아시아 담당 사장은 "무한한 수의 경쟁자와 대적해야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모든 아시아 스타들의 꿈"이라며 "반드시 타타 영을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물론 아시아 스타들의 앞날이 무조건 장미빛으로 물든 것은 아니다. 아시아 스타들은 미국 내에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히스패닉을 공략하는 데 부족함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내 아시아 사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이것 만으로는 주류 백인, 히스패닉, 흑인 등 대다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
영화 `와호장룡`의 주제가를 부른 대만 여가수 코코 리가 좋은 예다. 코코 리는 지난 2000년 미국에서 최초의 영어 앨범을 발표했고 소니BMG는 마케팅을 위해 대대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녀의 앨범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중국 시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까지 정복하겠다는 전략이 통할 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소니BMG의 리처드 데니캠프 사장은 "중국 시장이 급부상하겠지만 2008년에 세계 5위로 발돋움하기는 다소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 "애국가는 항상 한국인들의 것으로 생각"
- [오마이뉴스 제공] "한국 땅 아닌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한국땅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만세!"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켰던 지난 16일, 공교롭게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1906∼1965)의 유족들이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에 무상기증 했다. 유족의 대변인 격인 외손자 미겔 익태 안(28·변호사)씨는 최근 일고있는 독도문제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이어 "최근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도 잘 알고 있다"며 이 역시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안익태 선생의 외손자 미겔 익태 안(Miguel Eaktai Ahn)씨는 1977년생으로 스페인 마르요카에 살고 있다. 그는 발레릭 아일랜드 대학을 졸업한 뒤 법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시민을 위한 변호사(Civil lawyer)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 동안 한양대에서 국제관계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미겔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특히 겨울방학 때는 기숙사에 나혼자만 남아 남방도 제대로 안돼 추위에 떨면서 외로워했다"며 "여자친구도 떠나갔다"고 활짝 웃었다.
그는 17일 <오마이뉴스> 와 인터뷰를 가졌다. 안 선생의 부인인 롤리타 안(89) 여사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다 이날 다른 일정 때문에 인터뷰에 함께 하지 못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역시 최근까지 논란이 됐던 애국가 저작권 문제. 미겔은 약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불거진 "저작권 논쟁"으로 "그저 평범하게 지내고 있던" 가족이 풍랑을 만났다고 했다. 정부에서 처음으로 저작권 반납을 협상했던 시점은 2월 중순이었다.
논쟁의 중심에는 "저작권료"가 있었다. 당시 누리꾼(네티즌)들은 "유족들이 유상으로 애국가를 넘기려 한다"며 찬반 논쟁을 벌였다. 특히 언론에서 이같은 내용의 보도를 하면서 비난의 화살은 가족들에게 쏠렸다.
"한달 전쯤 갑자기 저작권 문제로 정부를 대표해 스페인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에게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똑같았다. 단 한차례도 돈을 요구한 적 없다. 저작권 문제는 정부와 국민들간의 문제인지 알았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항상 애국가는 한국민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공공재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미겔은 "우리가 무상으로 기증하더라도 한국정부가 저작권법에 의해 애국가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이 (정부를) 비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리를 비판했다"고 덧붙였다.
이런 미겔의 말은 18일 오후 문화관광부 관계자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그는 "유족측에서 협상과정에서 유상기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고 전했다.
"협상 당시 여론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과 스페인 주 한국 대사관(정부와 가족의 연락책 역할을 했다고 함), 그리고 정부간 의사소통이 잘못됐다(miscommunications)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2월 말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 3개국어로 된 대언론 성명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저작권을 무상기증할 것을 밝혔다."
유족들을 아프게 했던 또하나는 이들이 지금까지 많은 저작권료를 받았다는 소문. 그러나 "우리는 1999년 300달러, 2000년은 500달러, 2001년 1000달러, 2002년 5000달러, 2003년 3000달러, 그리고 지난해엔 5000달러를 받았다"며 "우리는 저작권료를 받아 부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한참을 저작권에 대해 힘주어 말하던 미겔의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할아버지께서 한국을 떠난 건 일본제국이 할아버지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최고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한국에는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애국자라는 말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족들은 안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길 원한다. 정부는 지금까지 안 선생에 대해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드셨으면 좋겠다"며 "국민들이 단지 할아버지께서 한국을 항상 사랑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줬으면 할 뿐"이라고 작지만 힘주어 말했다.
이어 미겔은 안 선생의 유품에 대한 한국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 가족은 이미 많은 유품들을 정부에 기부했지만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유품들은 많지 않다"며 "한국 정부에 알아봤더니 최근까지 나머지 유품을 전시할 기념관 건립 등의 대안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두가지 모두 해결될 가능성이 보인다. 문광부에서 안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예우와 기념관 건립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 정동채 문광부 장관은 지난 16일 "애국가 저작권 무상기증서 전달식" 뒤 "가족들의 바람을 충분히 받아들여 독립유공자 예우와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국의 네티즌들이 우리를 돈만 밝히는 비애국자(unpatriotic)라고 몰아붙였을 때 참기 힘들었다"는 미겔씨. 그는 "혹시 생전에 보지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는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며 미소지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한 꿈을 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때 통일을 위해 무언가 일했으면 한다는 꿈을 가져봤다. 조금이라도 통일에 일조할 수 있다면 해방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행복하실 것 같아서였다."
- 李부총리 "심히 죄송"..사의 표명안해(종합)
- [edaily 김수헌 이정훈기자]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3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땅투기 의혹과 관련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동산 거래 때 편법할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편법시비를 일으킨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부총리를 그만두겠다는 사의 표명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부총리의 투기의혹 관련 모두발언과 일문일답이다.
(모두발언)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재산등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다.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서는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국민들이 불경기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때에 본의 아니게 제 처 부동산 문제가 불거지게 된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부동산 거래 관계에서 사전에 편법을 할 의도나 생각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편법시비를 일으킨데 대해 심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와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오래전 민간인 신분에서 (거래가) 있었고 여러번 재산공개 과정을 통해 소상히 밝혀온 내용이지만 어떠한 의혹도 남지않도록 보다 신중히 생각하고 처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시한번 죄송하게 생각한다.
(일문일답)
-부동산 투기의혹과 관련해 2가지 질문을 하겠다. 재산공개에 대한 문제제기 이후 오늘을 포함해 대통령이나 청와대에 사의표명한 적이 있나. 그리고 편법여부와 상관없이 경제정책 수장으로서 이번 일로 투기억제대책 등을 추진하는데 있어 국민적 신뢰가 떨어질텐데, 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비판도 있는데, 잃어버린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안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제 개인문제로 인해 혹시라도 국정운영에 차질을 주는 상황이 오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앞으로 부동산 주택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
-예정에 없이 대통령과 오찬을 했는데 오찬을 하시면서 투기의혹에 대해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주로 올해 경제정책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초점이 있었다. 특히 신용불량자 문제가 지금까지 잘 진행됐고 마지막 마무리가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특별히 제 개인 재산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었다.
-25년 전 위장전입과는 별도로, 거래가 이뤄진 광주시 땅 매각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지난해 재산신고 때 거래가를 58억으로 신고했다. 당시 땅을 산 사람이 이걸 담보로 대출받은 돈이 70억원이 넘고, 46억원에 판 임야만으로도 50억원 대출이 이뤄졌다. 그래서 실제로 판 땅 가격이 100억 넘는다고 추정도 가능한데, 설명을 해달라.
▲제가 매각한 이후에 그 땅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저나 집사람 모두 아는 바 없다. 매각대금은 정확하게 직접 은행구좌로 들어와 한점 차이도 없고, 그대로 신고를 다했다.
-땅을 샀던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신고금액보다 높은 값에 샀다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집사람 통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건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매매가나 통장금액을 밝힐 수 있나.
▲필요하면 밝히겠지만 지금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재산공개가 실사 진행중이다. 그러한 문제를 전부 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푼도 차액이 있을 수 없다.
-지난해 말 재경부 지역특구위원회에서 전북고창을 특구로 지정했다. 이 곳은 부인이 보유한 땅으로 처남농장이 있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서 그런 부분이 논의가 됐는가. 부인 소유 땅이 특구에 들어간 사실 자체가 공직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 저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정절차나 과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제가 박병원 차관보로부터 보고받기로는, 그 지역에 대해 혹시라도 물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서 몇번씩 검토를 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해서 지역특구위원회에 상정키로 결론내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틀전에 산업은행 유지창 총재를 만나 부총리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인가.
▲취재를 광범위하게 한 것 같다. 유총재에게 그런 말 한 적 있다.
-20년동안 갖고 있던 땅을 한꺼번에 팔면서 대금을 어떻게 58억원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나. 그리고 왜 팔았는가.
▲계약은 그때(2003년 10월)했지만 (매각)논의는 상당히 전부터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금액에 대해 서로간에 논의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58억원에 하기로 합의해서 계약을 맺은게 그날일 뿐이다.
-잔금지급이 왜 늦어졌나. 거래상대방이 10명인 걸로 아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논의했는데 잔금지급이 늦게 된 이유는.
▲12월말까지 돈을 받기로 한 것으로 들었는데 (상대방이)매각대금 마련이 잘 안됐던 것으로 들었다. 연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연기를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부총리쪽하고 상대방인 차아무개씨하고 중간에 유모씨가 중간매매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중간매매자는 등기부상에 안 나와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미등기전매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 미등기 전매는 원매도자(이부총리측)이 그런 의도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될텐데, 사전에 미등기전매 의도를 알았는가. 그리고 땅은 왜 팔았는가
▲그 땅을 팔기로 한 이유는 제가 그때도 공직을 다시 하리라고 꿈에도 생각못했다. 작년 2월 부총리 제의를 받았을 때도 오랫동안 안 맡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가 마지막에 받아들였다. 땅을 팔 당시에도 공직 다시 하리란 생각없었다.
처음 그 땅을 살 때는 그 일대가 길도 제대로 나지않은 오지였다. 그런데 최근 와서 소위 그 일대 개발이 진행되면서 땅이 형질이 많이 훼손됐다. 그땅을 보유하면서 당초 개발할려던 생각이 바뀌게 됐다.
그래서 집사람이 더 이상 그걸 보유하면서 나중에 개발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주변이 도시화돼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던 차에 몇달전부터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계속 매수제의가 있어서 논의끝에 2003년 10월30일 매도계약을 맺은 것이다. 저희는 그대로 58억을 매도하기로 하고, 끝냈기 때문에 그 중간과정에서 전매가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매수자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계약 맺은 다음에 잔금 지급이 끝나면 등기서류를 넘겨주면서 끝난다. 그리고 매도인 인감증명서를 떼주고 등기서류 주면서 끝난다. 실제로 누가 어떤 명목으로 등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서류처리를 끝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 (법원경매천하평정)나의 경매입문기
- [우형달] 나의 경매입문기
몇 년 전만 해도 1억 원 만들기라는 제목의 책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사이에 부자 기본 단위가 10억 원으로 높아져 버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중에는 10억 원은 고사하고 1억 원도 없고, 심지어는 전세보증금 5천만 원이 자산의 전부라며 낙망하는 분도 계신데 말이다.
나는 가혹하지만 부자의 기준을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자 한다. 막연한 10억 원이 아니고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 빼고, 그리고 부채 빼고 10억 원 정도는 있어야 비로소 요즘 유행하는 웰빙스런 삶이 가능하다고 본다. 가장 바보들중 하나가 집하나 달랑 가지고 있으면서 집값 올랐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말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설령 10억 원짜리 강남의 아파트라고 해도 이 집은 이미 자산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타당하려면 적어도 다섯채 정도는 가지고 있으면서라야 설득력이 있다. 이런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나라면 팔아서 5억 원짜리 같은 평수의 강북아파트로 이사 가고, 나머지 5억 원으로는 재테크 종자돈으로 쓸 텐데!’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또 하나, 부채도 제외해야 한다. 수중에 10억 원의 현금이 있지만 은행 부채가 10억 원 있다면 상계처리해서 현금자산은 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엄격한 기준으로 따져 보면 여러분의 대차대조표는 어떨까?
** 나 역시 가난했다
무일푼에 가까운 처지에서 IMF를 거치면서 짧은 기간에 오직 부동산 경매로만 오늘의 부를 어떻게 축적했는가? 인생역전을 가져다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정말 우연히(?) 시작한 부동산 경매에 대한 나의 생각과 투자전략, 철학을 가감 없이 보여드리며 낙찰사례도 소개하겠다.
게임은 끝나지 않아 결론으로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누가 언제 시작해도 지지 않은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부동산 경매를 통한 부동산 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환희의 순간도 있었고, 몇천만 원이라는 거금의 입찰보증금을 날려야만 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이 본인의 실제 투자사례인가 아닌가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유는 자신의 투자사례나 명도 경험은 단 한차례도 없이 오로지 책상과 인터넷의 산물로 투자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공허하기 짝이 없는 부동산 경매투자서가 재테크 비법을 전수하는 관련 서적들이라고 오늘도 유명 서점 진열대를 꽉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내 돈 싸들고 경매판에 뛰어들어 조사·분석하여, 응찰하여, 낙찰 받고, 잔금내고, 명도하여, 부동산을 차지한 다음 처분(임대나 매각)해서 수익을 올린 생생한 투자 체험서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벌써 10년이 지나갔다
부동산 경매시장을 처음 경험한 것이 1994년 말이었으니 벌써 10년 이상이 흘러갔다. 처음부터 부동산 경매를 공부하여 투자하겠다는 야무진 각오가 있어서라 아니라 뒤늦게 입사한 곳이 경기도 성남에 있던 모상호신용금고였다.
‘뒤늦게’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것이 1990년 2월 이었는데, 공부를 좀 더하고 싶어 4학년 때부터 유학을 준비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동경으로 가서 약 3년여의 유학생활을 하였는데, 너무 가난했던 일본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 너무나 가난했던 일본유학시절
춥고 배고팠던 동경시절 이야기 하나만 하자면, 유학 생활 거의를 동경 나까노구(中野區)의 와까미야(若宮)라는 곳의 조그마한 아파트(다다미 4.5장짜리 실평수 3평정도)에서 살았다.
한 층에 공동 화장실이 한개 있던 주택으로 동경의 여름은 길고 높은 습도와 무더운 날씨로 에어콘 없이는 생활하기가 힘들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샤워를 해야 하는데 동전샤워장에는 갈 돈도 없고, 아까워 가지 못하고 집안 싱크대 수도꼭지에다 조그마한 호수를 연결하여 최대한 약하게 물을 틀고는 싱크대 안에 올라가 샤워하는 식의 생활이었다.
아파트에서 역(高円寺驛)까지는 자전거로 10분 정도를 가서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는데, 어느 하루는 역에 도착해서 전철패스(1개월 정기권)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천천히 생각해보니 전날 정기권이 1개월이 다되어 검색기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 그 때서야 생각이 났다. 학교까지 일반권으로 가려면 130엔이 있어야 했는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70엔 뿐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무료티켓을 하나 받을까 하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내리는 비와 함께 한없이 울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마침 그날은 쌀까지 떨어져 아침도 먹지 못하고 학교 가서 교수님한테 밥값을 얻어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3년 내내 거의 그런 생활이었다.
참 많이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 생의 또 다른 밑받침이 되고 있다.
* 무슨 인연으로 경매를 시작하게 되었나
그런 동경생활을 3년 넘게 버티다 경제적으로 기력이 완전히 소진하여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어 내 인생에서 공부는 끝났다고 체념하고 귀국해서 입사한 곳이 성남의 모 신용금고였다. 하는 일이 고객의 이자·원금 밀렸으니 언제까지 송금해 주세요, 채무자가 시간 없다면 직접 받으러 가고, 또 연체상태가 심한 경우는 담보로 잡아놓은 부동산을 경매 넣는 일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경매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게는 두 분의 인생 은인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이 시절에 내게 경매공부를 권유한 직장 상사이다. 하고 싶던 공부를 할 수없이 포기하고 돌아와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된 직장에서의 업무는 단순한 회사의 일로만 여겨졌다. 관심이 없으면 어떤 일을 아무리 오래 해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배우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경매공부
부동산 경매와 관련된 일을 나름대로 하면서도 내공을 쌓지 않고 업무로만 익숙해지며 회사를 다니기 2년 정도 될 즈음에 나를 아껴주던 직장의 상사가 어느 날 “우계장 경매공부를 한번 해보지!”라고 지나가는 듯 한마디 하셨다.
이처럼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가 천상에서 들려오는 신의 복음처럼 내 머리를 때렸고 “어떻게 공부하면 되나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하면서 신천지 경매세계로 뛰어 든 것이 1996년도였다.
그렇게 시작한 부동산과 경매공부가 그렇게 즐거울 줄은 정말 몰랐다. 기본적인 법률공부, 권리분석, 수익률분석, 물건분석 요령, 임차인에 관한 사항 등 공부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어볼 때마다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심지어 새벽 두세 시에도 자다 일어나 성실하게 응대해준 상사가 있었기에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사하다.
처음 부동산 경매공부를 권하면서 상사가 권해 준 경매 서적이 『당신도 이틀이면 경매박사』(강현구 지음, 매일경제신문사)였는데 최소한 30번은 읽어보라고 하던 일이 바로 어제 일 같기만 하다. 이렇게 나에게 지나가듯 다가온 부동산 경매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도구가 되었고, 내가 부동산에 입문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 인생역전의 계기가 왔다
본인이 처음 경매법원에 다니던 시절은 호가제와 입찰제가 병행되던 시절로, 아직은 호가제가 주류였던 시기였다. 호가제란 원하는 물건이 진행되면 응찰자들이 집행관 앞으로 나가 구두로 가격을 올려가면서 응찰하여 더 이상 응찰자가 없으면 그때까지 최고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낙찰시키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나, 동산 입찰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경매에 투자하기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요즘처럼 여성들이 법원경매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 누가 응찰했는가 하면 극히 한정된 꾼(?)들만의 잔칫집으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상시로 벌어지면서 경매꾼들에게 떼돈을 벌어주었다.
경매꾼들만이 잔치집이라며 일반인들은 꺼리던 그곳에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부동산 경매가 인생역전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리라고는 공부시작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회사 모르게(?) 아르바이트
생전 처음 낙찰 받은 물건이 경기도 성남시 신흥동에 있는 대지 면적이 20평이고, 건물은 반지하 1층 지상 2층 단독주택이었다. 지금 성남 구시가지 재개발 논의가 한창 뜨거운 지역의 물건으로 당시 감정가격이 8천500만 원 정도였는데, 3회 유찰로 4천352만 원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4천620만 원에 응찰하였는데 결과는 단독이었다.
소유권 이전에 필요한 비용과 1층에 살면서 보증금을 날린 임차인에게 이사비용으로 준 200만 원을 합해 총 5천여 만 원이 들어갔다. 이중 2천만 원은 잔금융자를 받았으니 실제로 투자된 내 돈은 3천만 원 정도로 소유권을 취득한 다음 전체를 전세로 임대한 내용을 보면 지층은 보증금 1천500만 원, 1, 2층은 각 3천만 원으로 총 7천500만 원이 회수되었다.
이 물건처럼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낙찰 받은 물건이 총 4건이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낙찰 받는다는 것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비밀(?)에 붙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서서히 부동산 경매에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고 자립의 기틀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이 물건은 전세로 임대하고 있다가 경기도 성남 구시가지가 개발 열풍에 휩싸이던 2002년에 1억 2천500만 원에 매도처분 하였다.
* 실직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1997년 말에 몰아닥친 IMF 한파로 다니던 금융회사가 부도나기 일보직전에 실시한 명예퇴직을 자진신청하면서 조직(회사)생활 4년 만에 실직자가 되었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판단하고 경매에 전념하기로 작정하고, 집사람과 퇴직하기로 합의하고 이틀만에 사표를 내고는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경영기술개발원’이라는 곳에서 노동부 고용실업급여를 받으며 고급 이론무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경매세계에 뛰어 든 것이 1998년부터였다.
당시 함께 명퇴를 신청했던 동료가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는데 송별회식장은 그야말로 눈물의 바다였다. 그때가 J모 은행의 눈물비디오가 TV에 방영되던 시기였다.
경매투자 시작 당시 수중에는 퇴직금 포함해서 투자가능 총금액이 3천100만 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가난하기도 했지만 다니던 회사 3층에 모 증권회사 지점이 있어, 그곳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날린 돈이 4천여 만 원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은 당시 우리 회사 직원들 중 주식으로 까먹은 금액이 내가 가장 작았다는 점이다. 주식에 손 안댄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 경매 시작 당시 경제·사회분위기
정상화되면 다시 받아주겠다던 신용금고는 퇴직 얼마 후 회사도 부도처리 되었고, 올데갈데없어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경매에 뛰어들 때는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도 했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부동산을 가진 것 자체가 더없이 고통스럽고, 적어도 이 땅에서는 부동산은 더 이상은 재테크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염세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다.
미달러 대비 환율은 2천 원을 넘었고, 은행이자율은 30%에 육박했으며, 대통령은 TV에 나와 하루라도 빨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하고 그것에 동참해서 착한 국민들은 몇 시간씩 긴 줄을 선 다음에도 아무런 군말 없이 금 모으기에 동참하던 시절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경제코너 기자님들과 언필칭 전문가를 자칭하는 일부 부동산 점쟁이들은 이 나라에서는 부동산은 더 이상 재산증식 수단이 아니라 애물단지일 뿐이라고 침이 마르게 떠들던 시절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단군 이래 초유의 부동산가격 대폭락을 목격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은 더 이상의 재테크수단이 아니라고 아우성치는 기사들을 읽으면서 착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맞아”, “그래 정말이야”, “부동산은 이제 끝이야!”라고 중얼거리던 시절이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 당시 전체 분위기는 부동산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런 시절에 부동산 경매는 권할만한 재테크 방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많은 돈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가진 돈이라고는 3천100만 원이 전부인 종자돈을 몰빵 치는 심정으로 남들을 경매시장을 쳐다보지도 않을 때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했다.
시쳇말로 ‘물반 고기반’이던 당시 경매시장을 잠시 들여다보면, 고리사채도 아닌 은행이자율이 연 27~30%에 육박하자 파산에 빠진 경매물건이 폭증하는 바람에 자고 나면 법원경매계가 하나씩 생기는 판이었고, 인천·수원지법의 경우는 경매계가 23~25계까지로 늘어나 공휴일·일요일을 빼고는 매일 경매가 진행되었고, 하루에 진행되는 물건이 200~250여건에 이르렀다.
서울 시내 크고 작은 빌딩들이 외국계 투기 자본에게 속속 소유권을 강탈당하던 가슴 아픈 시절로, 부동산 매매시장은 종별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최고 반토막 난 것들도 허다했고, 부동산 경매시장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서울 남부법원에서 진행된 목동의 40평형대 로열층 APT가 감정가격이 2억 2천만 원에 형성되어 2차 유찰은 기본이고, 심지어 3차 유찰되어 감정가대비 51%(1억 1천200만 원)에서 55%(1억 2천100만 원)에 응찰하면 경쟁률은 높아야 3대 1이면 낙찰 받을 수 있었고,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진행된 감정가 1억 8천여 만 원 짜리 분당의 32평형 로열층 아파트가 2차례 유찰되고 3차에서 1억 2천만 원 정도 쓰면 너끈히 낙찰 받던 시절이니, 다른 물건들은 어땠을까는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02~2003년의 부동산 폭발장세를 맞아 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의 경우 현재는 평당 매매가가 대략 1천500-1800만 원 선으로 약 6-7억 원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고, 분당의 경우는 5억 원 전후에 거래가 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자체만 보면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을 규제하겠다는 것과 금융측면을 보면 은행의 금리가 낮다는 것 정도가 당시와는 차이라 할 수 있다.
** 그 동안의 투자실적은
3천100만 원으로 시작한 부동산 경매 건수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개인적으로 낙찰 받은 것이 15개이고, 동업자와 공동으로 투자한 것이 15건, 법인과 펀드로 투자한 것이 20여 건으로 총 50여 건에 이른다.
이 중에 IMF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99~2001년 사이에 낙찰 받은 20여개 물건들은 현재 원금대비 최소한 2배에서 많게는 6배까지 부풀어 올라 있는데, IMF 당시 나는 권리분석이 좀 복잡하고 세입자가 많아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다가구주택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그래서 본인이 ‘다가구 전문’으로 소문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실제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감정가격 3억 5천만 원짜리 마포구 망원동 소재의 대지 47평,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120여 평으로 총 9가구의 세입자가 들어있던 다가구주택이 3차 유찰되어 감정가격 대비 51% 상태인 1억 7천800여 만 원에서 2억 1천300만 원에 입찰하여 경쟁률 6대 1로 낙찰 받아, 선순위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으로 인수한 금액 빼고, 이전비와 공사비 합해서 총 투자금액이 2억 4천 500만 원 정도 들어갔는데, 전세로 회수한 보증금만 3억4천만 원을 받았다.
임대만으로 1억 원 정도를 더 확보하는 식으로 재산을 불려 왔다. 지금 생각해도 뭘 믿고 홀로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왔는지 지나고 보니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결과를 가지고 출발점을 칭찬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인드가 말이다. 남들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처분하지 못해 난리법석을 떨던 시절에 낙찰로 부동산을 사들이겠다는 돈키호테 식 발상은 신념과 확신이 있어 가능했다.
** 경매투자 이력서
* 시작(1994년)부터~1998년(IMF로 회사퇴직)까지
이 때는 경매를 접하고 배우던 시절로 회사 업무에 충실하여 그다지 본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식투기로 돈 까먹는 줄 모르고 허송세월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경기도 성남의 구시가지에다가 낙찰 받은 20평지 구옥 두 채를 낙찰가의 거의 세배 가격에 매매했다는 것으로 공부에는 확신을 가졌지만 투자로는 재미를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 1998년 퇴직부터 ~ 2002년 월드컵 개최 시까지
솔직히 말씀드려 내가 평생 먹고 살 것을 만들어 놓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비장한 호들갑이 전국을 덮고 있던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부동산 경매시장에 투자한 사람치고 재미 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의 경우도 이때 낙찰 받은 물건들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당시는 이자율이 높아 경매물건은 넘쳐나도 낙찰 받는 사람들은 미친놈(?) 취급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미친놈 취급하던 분들이 그러나 지금은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하고 있다.
* 2003년부터 현재까지
개인적인 투자와 법인 및 펀드 물건을 구분해서 입찰에 임하고 있다. 1억 원 전후의 물건이나 오래 버티기를 해야 하는 경매물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낙찰 받아 장기전으로 임하고, 덩치가 큰 물건이거나 수익용 부동산의 경우에는 법인이나 펀드를 구성해서 입찰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현재 상황을 보면 수익률이나 우량물건이 IMF 때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 이후 부동산 경매시장 전망
부동산 시장의 가격전망에 대한 영역은 귀신도 모르는 부분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아 장래를 예상해 본다면 적어도 2006년 말까지 경매시장은 다른 어떤 시장보다도 수익률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상해 볼 수 있는 이유로는 부동산시장과 경매시장의 서로 연관된 특성 때문이다. 부동산매매 시장이 나빠지면 경매시장은 구조적 특성상 약 6개월 후부터 감정가격이나 낙찰가격이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현재는 참여정부의 10·29 규제정책으로 불황(부동산매매시장은 2005년 말까지 지금 같은 불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음)국면을 지나가고 있다.
본격적인 회복국면을 2006년 초로 본다면 그 1년 뒤인 2006년 말까지는 부동산 경매시장은 다른 어떤 투자보다 높은 수익을 보장할 것이다. 다만 현재 과열되고 있는 경매시장의 일부 ‘토지’는 이 전망에서 제외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고 좀더 쓰겠습니다.
나의 책 초고라는 점을 미리 밝히며, 제가 이글을 올리는 것은 자랑을 하려고가 아니고 부동산투자는 장기에 걸쳐서 평생하는 투자여서 당장의 어떤 상황에 너무 민감해하지 마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일문일답)김남구 동원금융지주 사장
- [edaily 조진형기자]김남구 동원금융지주 사장은 22일 "저와 동원금융지주 임직원들은 아시아 최고 금융기관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며 한투증권 인수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동원증권과 한투증권은 이제 한 가족이 됐고 양사는 규모면에서 1등으로 시작해 앞으로 질적으로도 최고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피력했다.
김 사장은 아울러 "커다란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인수에 따른 직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의지도 나타냈다.
김 동원금융지주 대표 일문일답
-동원증권과 한투증권의 합병 시기는
▲오늘 내일 중으로 컨설팅 회사를 선정해 합병 시기를 논의할 계획이다. 현재 신한은행·국민은행·하나은행 등 여러가지 합병 사례를 참조하고 있다. 다만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컨설팅사와 논의해 빠른 시일내에 합병 방법과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또 한투 직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투 직원들의 생각도 듣고 참고하면서 합병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합병 후 구조조정 계획은
▲은행과 은행의 합병은 대부분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이뤄진다. 그래서 명예퇴직을 많이 받고 구조조정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은행과 같은 구조조정은 없다.
동원지주는 사실상 증권과 투신간 이업종 결합이다. 동원증권은 브로커리지 업무에 주수입원을 두고 있고 한투는 금융상품 판매가 주수입원이다. 따라서 같은 증권 투신업을 하고 있다. 전혀 다른 업체와의 합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커다란 구조조정은 없을 것으로 본다.
-향후 다른 곳과도 전략적 제휴를 염두에 두고 있나
▲장기적으로는 유수의 외국 금융기관과 제휴를 할 생각이다. 그러나 일단은 전략적 제휴 없이 단독으로 할 계획이다. 동원의 IB부분은 강하다. 기업공개(IPO)부문에서 작년에 50%의 시장점유율를 장악하고 올해도 30%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소싱이 아닌 프레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투는 반대로 프레싱은 강하지만 소싱이 약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실제로 여기서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 합병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합병과 관련해 컨설팅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전에도 컨설팅을 했는데 과거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지난번 컨설팅을 받은 것은 인수 후에 어떤 모습이 그려질까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합병을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기에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컨설팅을 받으려고 한다.
-합병이 미뤄진다면 한투 경영진은 어떻게 되나
▲현 경영진 유지되고 경영활동에 전념할 것으로 본다. 한투가 과거에 오랜 부실을 안고 왔지만 근래 좋은 실적을 유지하고 있고 현 경영진이 열심히 하고 있다. 현 경영진을 믿는다.
-증권사들이 점차 대형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화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
▲현재 동원증권은 IB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소싱쪽에 강하다. 특히 유가증권 발행하는데 아주 강하다. 그러나 소화시켜내는 능력은 아직 일류라고 할 수 없다. 그 부분 가장 강한 것이 한투다. 동원쪽의 시너지는 IB다.
그러나 한투는 20조가 넘는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이고 수익률이 높은 유가증권에 편입시켜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고정적인 소싱처를 확보함으로 한투는 고객들에게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가져다주는 회사로 탈바꿈할 것이다.
또 동원은 파생상품 부분에서는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동원을 정밀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으로 비유한다면 한투를 만나 그 제품을 고객들과 만나게 할 수 있는 채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에서 최고의 금융기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궁극적 목표는 `20-20`클럽에 가입하는 것이다. 즉 ROE 20%, 시가총액 20조가 목표다. 이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선배 세대들이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 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있다. 돈도 있고 사람도 경험도 있다. 과거 선배들만한 의지가 있다면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고 본다.
-동원증권 유상감자 대금과 하나은행 지분매각 자금을 한투 인수 자금으로 사용했는가
▲한투증권 인수대금은 동원증권 유상감자 대금 5500억원을 조달할 예정이다. 하나은행 지분을 팔아 한투 인수대금을 마련할까하는 생각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현재 자금상황으로 봤을 때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하나은행은 유가증권 운용차원에서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가 많이 올르면 팔 것이고 떨어지면 추가 매집할 것이다.
-은행업을 끼고 있는 금융지주와 비교해서 항간에는 열세라는 지적이 있는데
▲한투 인수를 추진하고 나서 국내에서 경쟁자가 누군가에 대해 고려해봤다. 경쟁상대는 은행계열의 증권사들이 될 것이다. 은행의 막대한 자산, 고객, 점포망이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범용성과 고수익을 갖춘 상품을 내놓고 은행을 통해서 팔 것이다. 즉 은행과 마케팅에서 손을 잡을 계획이다.
증권사에서는 좀더 차별화된 상품을 팔 것이다. 가령 은행에서 팔기 어려운 파생상품은 증권사를 통해 판매할 것이다. 은행과의 제휴를 추진해 약점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아마 한달 후면 은행과 제휴를 위한 조인식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어느 은행과 제휴하는지는 공시 문제 등으로 아직 말할 수 없다.
-투자은행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금확충력이 이뤄져야 하는데 성장전략은 무엇인가
▲당분간 유상증자를 감안하고 있지 않다. 한투증권 인수자금을 내부자금으로 마련한 것도 내부적으로 자금에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번 인수를 위해서 큰 돈이 들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특별한 자금조달 계획은 없다. 성장해나가는데 현재로선 내부 자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은행과의 제휴는 지분 인수도 포함되는가. 또 다른 증권사 추가 인수 계획은
▲현재까지 계획으로는 은행과의 제휴에서 지분 교환을 하지 않는다. 증권사나 투신사 인수는 향후에도 필요하다면 할 것이다. 내부 역량보다는 외부적으로 인수합병하는게 꿈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할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아무것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한투증권 인수조건은(김범석 동원투신운용 사장 답변)
▲한투증권의 부실이라는 것은 대부분 신탁형 증권저축(TTAS), 즉 차입금 때문에 발생했다. 다른 부분에서 이익이 나도 이 부분에서 이자 등 손실이 발생했기 때문에 부실이 심화됐다. 이번 인수조건 중 키포인트는 TTAS 부분을 완전히 매꿔주고 일부 부실자산을 전부 들어내서 매꿔주기로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존 주식을 완전 감자한 후 영업용순자본비률(NCR) 150%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항간에 대투와 한투 모두 특수목적회사(SPC) 부실자산을 떠안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한투의 경우에는 지난 2002년부로 순자산 부족분이 커버돼, 현재 SPC 청산가치가 플러스로 돌아선 상태다. 한투는 명실상부하게 클린컴퍼니가 됐다.
- (edaily리포트)판교의 `옵션거래`(?)
- [edaily 윤진섭기자] 판교신도시 분양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판교를 향한 투자자들의 꿈도 무르익고 있습니다. 당첨만 되면 수억원의 전매차익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당첨확률이 높은 통장에 대해선 불법적인 거래마저 횡행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통장거래에 따른 웃돈이 무려 8000만원에 달하고, 금융거래에나 나올 법한 옵션거래기법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판교 분양을 둘러싼 요지경 세상, 산업부 윤진섭 기자가 짚어보았습니다.
"성남 거주 40세 이상 10년 거주 무주택자 당첨 확률도 190대 1을 초과할 정도로 당첨 확률이 희박한데, 뭘 믿고 8000만원의 거금을 주고 통장을 사들인다고 하는지.. (통장 불법 거래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과열을 막는 차원에서 암행 단속에 나설 방침입니다"-건교부 주택정책과 관계자
`엘도라도`(?)라고 불리는 판교신도시. 첫 분양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판교신도시가 청약통장 불법 거래에 홍역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청약통장 불법 거래의 윤곽은 이렇습니다. 수도권 지역 내 일반 1순위자의 당첨확률이 3000대 1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면서 당첨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남 40세, 10년 무주택 거주자가 보유한 청약통장이 웃돈만 최고 8000만원이 붙어 거래된다고 합니다.
특히 이 같은 거래는 점조직으로 이뤄지는 데, 통장 매입자가 나서면 중개업자들끼리 선을 연결해 우선순위 통장 소유자와 연결, 거래를 트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개 브로커들은 미리 40~50장씩 입도 선매식으로 청약통장을 확보한 뒤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내거나 극소수 중개업소에 의뢰해 매수인과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연결된 통장 매수자와 매도자는 별도로 계약서를 쓰고 이런 암거래의 보증방식인 공증(公證)을 받는 식으로 거래를 알선합니다. 흔히 분양권 전매나 상암동 딱지 거래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공증 방식이 판교 통장 거래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거래에 8000만원의 웃돈이 붙을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즉 성남 최우선 대상자도 190대 1 이란 치열한 경쟁률이 예고돼, 당첨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8000만원의 거금을 줄 수 있는가라는 점이죠.
일단 건교부는 바로 이점을 들어 언론에서 거론하고 있는 통장 거래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건교부 관계자는 "당첨 확률도 희박한 상태에서 8000만원이나 웃돈을 주고 거래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고, 다분히 현지 중개업자들이 판교를 띄우기 위한 언론플레이"라고 단정을 지었습니다.
건교부는 이같은 이유로 초기엔 통장거래와 관련된 단속에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통장 거래가 판교 과열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면서 부랴부랴 국세청과 단속에 나선 셈이지요.
여하튼 건교부의 인식은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판교에서 8000만원의 웃돈이 붙어 통장이 거래가 될까요? 결론을 말씀드리면 대략 5000만~6000만원선에 거래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 거래는 속칭 `옵션거래`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즉 우선 500만~1000만원의 계약금을 주고, 통장소유자와 매수자 간 계약을 한 후 판교 분양 후 당첨되면 나머지 금액을 주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옵션이 삽입됩니다. 일부는 당첨 후 5년 뒤에 프리미엄의 일정부분을 통장 소유자에게 준다거나 당첨 후 추가 사례비를 신경써준다거나 하는 식이 그것입니다.
통장을 매입한 중개업자가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판교 모 중개업자는 “계약금 300만원과 추후 1500만원을 원소유자에게 주기로 했다”며 “통장 매입자에게 이보다 높은 금액의 계약금과 웃돈을 받아 그 차익을 수수료로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이 경우 5년 동안 통장 원소유자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프리미엄의 30~40%를 수수료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하더군요.
마치 상암 택지지구 내 딱지를 매입해 원매자와 딱지 매입자간 거래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다만 상암지구는 입주와 동시에 원매자가 매입자에게 파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반면 판교신도시는 입주 후 2년 6개월 뒤에나 거래가 가능하다는 게 차이일 뿐이죠.
물론 통장 소유자가 당첨이 되지 않았을 경우엔 매수자는 계약금 500만~1000만원은 날리게 됩니다.
그러나 판교신도시 청약과 관련해 실제 통장을 사이에 두고 뭉칫돈의 웃돈이 거래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금액이 대략 2000만~3000만원이라고 하는데, 최근 들어선 시세가 폭등했다는 소식도 들리더군요.
바로 `묵은 청약저축통장`입니다. 통상 회차는 150회~160회로 회차가 높을 수록 웃돈도 덩달아 뛰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청약저축 통장에 이처럼 많은 프리미엄이 붙은 것은 아파트 공급 방식이 일반 청약예금, 부금 통장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청약예금, 부금은 같은 순위자를 대상으로 공개 경쟁을 통해 당첨자를 추첨하지만 청약저축은 같은 순위자라도 무주택 세대주 기간, 약정 납입 횟수 및 금액, 부양 가족수 등에 따라 순차적으로 아파트를 배정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반 예금, 부금보다 당첨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하튼 판교지역 내 통장 거래는 분명 사실이고, 다만 `옵션`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거래는 의외로 높은 프리미엄이 줄어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발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과 3000만원 이하의 벌금까지 낼 수 있는 위험한 거래라는 점에서 결코 권장할(?) 만한 사안은 아닙니다.
우선 통장 매입자는 원매자(최초 통장 소유자)가 아파트 분양 후 계약할 때 각종 취, 등록세와 등기 비용을 내줘야 합니다. 판교의 경우 33평형의 분양가격이 3억원이라고 하면 대략 1500만원선입니다.
물론 분양가는 기본적으로 매입자가 다 부담하는 게 원칙입니다. 입주 후 2년 6개월 뒤에 원매자가 매입자에게 아파트를 넘길 경우 이에 따른 등기(속칭 복등기)에 따른 취, 등록세와 각종 비용도 매입자의 부담입니다.
만약 이 당시 원매자가 또 따른 주택을 취득하고 있다면 양도세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금액도 통장 매입자의 고스란히 안고 가야합니다.
원매자가 옵션계약을 무시하고 웃돈을 더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공증까지 마쳤는데 무슨 추가 웃돈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공증은 민사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원매자의 웃돈 요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거나 아파트를 포기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울며격자먹기식으로 원매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미 상암택지개발지구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판교신도시는 분명 투자측면에서나 향후 발전전망에 있어 0순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막연한 시세차익을 바라보면서 통장 불법 거래에 동참하는 것은 무리수라는 게 업계의 중론입니다. 이래저래 시끄러운 판교신도시 관련 통장 거래 이야기였습니다.
- (법원경매천하평정)나의 경매물건 투자전략
- [우형달] 나의 경매물건 투자전략 . .
부동산규제정책이 조금씩 완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는 지금 법원경매를 통한 개인적인 부동산 투자전략을 잠깐 말씀드리면, 현재 발표되고 있는 서울 지역의 뉴타운 예정지나 또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재개발 가능성이 있는 지역*지구에다가 지속적으로 빌라*연립*다세대*다가구등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은지 오래되고 가능하면 동네가 꼬질꼬질하면 더욱 좋다. 추가로 계속 발표*지정되는 것을 보면 머지않아 서울에서는 불량주택지역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은 분명하다.
아시는바와 같이 서울의 경우 재개발*재건축 방법이 아니면 더 이상 대규모 택지를 공급할 방법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들 지역의 경우는 시간이 문제일 뿐 그리 오래지 않아 재개발이 전면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런 지역에다가 내 돈 안들이고 집 개수를 늘려가면서 기다리며, 버티기에 돌입한다면 시간은 내 편이고 32평형 아파트 기준으로 입주권 한 장 당 4-6억원은 할 것이다.
* 내 돈 하나 없어도 집은 얼마든지 산다
부동산을 구입하는데 내 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바보들을 많이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마인드만 전환하면 내 돈이 없어도 10채든 20채든 얼마든지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 내 돈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의미는 서울의 뉴타운예정지나 인근의 구시가지에 대지지분 12-15평 전후, 건평 20여평 전후의 연립*빌라라면 대체로 감정가격이 1억원 전후이고 두 번 유찰로 6,400여만원 정도 일 때, 6,500만원 정도에 응찰하여 이전비용까지 약 7천여 만원이 소요된다고 보면, 이것을 전세로 임대하면 들어간 돈이 거의 회수되고 나면, 그 돈으로 다시 낙찰받기를 반복하는 식으로 집의 개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이 자금 부담없이 집수를 늘릴 수 있어 버티기(?) 하는데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종합세 신설등과 각종 세금강화로 부동산경기를 약화시키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정책이란 것이 다음 정부에서는 또 어떤 방향으로 변할지 알 수 없다.
일반인들이 팔아치우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물 흐리던 병아리들은 경매시장을 떠난 지금이 시세의 반값에 낙찰 받을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라는 것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전략으로 20-30여채 집을 확보한다면 시간문제일 뿐 서울 구도심의 스카이라인은 늦어도 10년 안에는 상전벽해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 듯 뻔하다.
서울과 수도권의 구시가지에 반값(정확히는 전세값)수준에 낙찰받아 전세로 임대하는 그 전세금으로 다시 낙찰받는 전략으로 임하는 것은 마치 어부가 물고기들의 길목마다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 어느 그물로 고기가 들어올지 모를 노릇 아닌가.
* 그래도 서울과 수도권이다
서울시내를 보면 아직도 우수한 투자가능지역들이 널려 있는데,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서울시내에서는 재개발*재건축이 아니고는 더 이상 대단위 택지를 공급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답이 어느 정도는 나온다.
왜 그럼 서울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동안 경험이나, 가격동향을 보아 판단해볼 때 죽어도 "서울과 수도권"이라는 것이다. 실수요자라면 지방의 경매물건도 무난하지만 투자가치를 고려한 낙찰이라면 서울과 그 인근 도시들이 훨씬 유리하다. 2003년 10.29 부동산규제정책으로 꺾이기 시작한 2004-2005년 부동산 저점에서 감정 평가된 경매 부동산 매물들의 가격이 저평가된 것이 본격적으로 낙찰되는 시기인 2004년말부터 2006년말까지가 응찰자수 마저 줄어든 상황으로 어쩌면 이번 같은 기회가 앞으로 몇 년안에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깡통매물을 활용하자
요즘 경매시장에서 “깡통매물”이 문제라는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낙찰가격이 전세가격에도 못 미치는 물건들로 부동산 불경기로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여러분은 이 기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깡통 물건속에 대박을 터뜨릴 폭탄이 장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깡통물건을 낙찰받아 전세로 처분한다면 문제가 되는 깡통만큼의 수익 달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 경매시장의 상황은 이런 깡통물건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감정가격이 1억인 빌라*연립이 전세보증금이 5-6천만원인데 낙찰가격은 4천만원 전후로 까지 내려와 있는 물건이 서울 남부법원, 북부법원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천이나 부평지역에는 발에 밟힐 지경이고, 지방의 깡통 물건은 말하기가 민망한 지경이다.
* 주택수에 겁먹지 말자
깡통 물건을 낙찰받아 주택숫자가 늘어난다면 무슨 실익이 있을까. 병아리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주택수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주택 정책을 보면 무주택자가 1주택이 되었을 때 많은 변화가 있고, 1주택자가 3주택이 되었을 때 또 많은 변화가 있지만, 3주택 이상이 되어버리면 10채를 보유하든 20채를 보유하든 또는 본인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30채가 되든 별다른 차이가 없다.
집 한칸 없이 평생 전셋집이나 알아보려 다니지 말고 낙찰로 집 갯수 늘리는 전략으로 임하자. 같은 시간을 들여 누구는 죽을 때까지 전셋집이나 알아보러 다니고, 누구는 낙찰 받으려고 물건조사하러 다니는데, 3-4년만 지나도 결과로 나타나는 차이는 뻔하다. 손바닥 비비며 감이 떨어질 때까지 무능하게 기다리는 것이 문제지, 집 갯수가 많은 것은 절대 문제가 될 수 없다.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것이 더욱 문제다.
바보중 하나가 집하나 달랑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집값 올랐다고 포만감에 젖어 좋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의 생각이 맞으려면 내 집만 오르고, 다른 집은 오르지 않았거나, 최소한 집이 5채는 있고 난 다음이라면 일리가 있겠지만, 집값 올랐다고 처분하고 어디 가서 집값이 오르지 않은 집을 찾는다는 말인가? 현재 살고 있는 내 집은 이미 자산가치가 없는 것이다.
* 집 한 채로는 정신 차리자.
서울과 수도권의 구시가지에 소형 공동주택(대개 대지지분 12-15평, 건평 20평정도, 지은지 오래될수록 유리)을 수십여채를 확보하고 버티기에 돌입한다면 짧게는 5년 이내 길어 보아야 10년 이내면 결판이 난다고 보는데,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보수적이고, 길게 잡아 10년에 그 중 5개만 수용되어 아파트 입주권을 쥐게 된다면 다 빼고도 꿈에 목표인 17억이 문제가 아니고, 그 이상이 수용된다면 20억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된다면 내집빼고 부채빼고 부자목표 달성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금등이 무섭다면 그중 한두채 잘라서 납부해버리면 된다. 2억 벌어서 1억쯤 세금 내는 게 아까워서 고민하고 있으려면 계속 그러고 계셔도 된다. 부동산이 없어서 고민하는 그룹에 속하지 말고, 가져서 고민하는 그룹에 속해야 인생의 말년이 편안하고 우아하다. 본인이 낙찰받은 사례를 하나 소개하기로 하겠다.
* 투자된 돈 바로 회수한 서계동 빌라
집 개수 늘리기 전략의 일환으로 내 돈없이 소유권 취득하여 재개발 여지가 있는 지역의 물건을 낙찰받아 버티기 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 서부법원에서 경매가 진행된 이 물건은 서울 용산구 서계동 3*-**5 지층 01호인 빌라로 대지지분이 12평 건평이 20.82평으로 1차 감정가격이 8천5백만원으로, 2차 유찰후 응찰가격이 5천4백만원에서 응찰자는 2명이었고, 최고가매수가격이 5,560만원이었다. 낙찰은 2003년 12월이였다.
이 물건의 특징은 서울역 건너편 만리동 고개 뒤쪽에 있는 반지층 빌라로 전세가격수준에서 낙찰 받아 보유하고 있다가 재개발 지역에 포함된다면 상당한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과 유사한 물건으로 응찰 가격과 경쟁률도 그리 높지 않아 병아리수준의 응찰자들에게 권해보고 싶은 물건이다.
서울시내는 전체가 모두 유망하지만 대상을 좁혀서 살펴보면 중*장기적으로 용산구과 마포구 전역이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투자 포인트를 살펴보면 구입*보유하는데 자금부담이 전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강점이다. 자세히 보면 2003년 12월18일 입찰일에 응찰하여 낙찰받은 이 물건의 기본방향은 낙찰받아 보유하고 있다가 재개발에 포함된다면 돈 들이지 않고 아파트 입주권을 바라볼 수 있는데, 전세보증금만으로 투자자금이 회수되기 때문(왜냐면 이전비 포함하여 총 6천만원 소요)에 부담 없이 보유할 수 있다.
* 구체적인 진행과정을 보면
1) 2003년 12월 18일 낙찰
2) 2003년 12월 24일 매각허가
3) 2004년 1월 13일 잔금납부
4) 2004년 2월 11일 배당실시
5) 2004년 2월 13일 현 거주자와 전세 계약 체결
*소요자금 계산
1) 낙찰대금 5,560만원
2) 소유권 이전비용 및 취*등록세 약 340만원으로
3) 총 5,590만원으로 약 6천만원 소요
4) 잔금 중 2,500만원 잔금융자
5) 사용기간 1개월, 금융비용 13만원(받은 전세계약금으로 융자금 상환했슴)
* 수익률 분석
1) 6,800만원에 현 거주자와 전세 계약 체결(명도완료)하여 내 돈 3,500만원과 융자금액 2,500만원 투자해서 총 6,000만원 정도에 소유권 취득한 뒤 6,800만원에 전세계약 하여, 1개월 만에 투자금보다 800만원이 더 회수되어 보유하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 노림수
이 방식이면 결과적으로 내 돈 한푼 안들이고 연립*빌라의 소유권 취득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취득 후 5년쯤 버티면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5년 기다리면 재개발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만일 5년 뒤에 재개발로 32평형을 받을 수 있다면, 현재 시세가 5억원 전후인 물건을 자신의 돈 한 푼 안 들이고 확보한 셈이 된다. 버티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금이 묶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힘이 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투자된 자금 이상으로 전세처분하면 버티는데 아무런 부담도 없다. 깡통경매물건을 역으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현재 보유하며 버티고 있다.
- (edaily리포트)언론을 못믿겠다
- [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미국에서도 언론을 불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미국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언론마저 제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입니다. 언론은 냉철한 시선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두루두루 살필 줄 알아야합니다. "언론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의욕도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명수 뉴욕특파원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지 안타깝다고 합니다.
미국 CBS 방송이 부시 대통령의 `병역 특혜` 오보와 관련, 4명을 해고했습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갑자기 얼마전에 봤던 `화씨911`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났습니다.
`화씨911`이 아니라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화씨911을 만든 마이클 무어 감독은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부시 낙선`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화씨911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이냐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용 중에 영화배우 팀 로빈스가 아주 충격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미국) 미디어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화씨911이 진실이다. CBS도 ABC도 NBC도 CNN도 FOX도 믿지 않는다"
저는 화씨911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길래 팀 로빈스가 유수의 미국 언론사를 믿지 않겠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CBS 등에 근무하는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기사를 쓴다는 측면에서 팀 로빈스가 나한테 욕을 한 것 같아서 아주 찜찜했습니다.
물론 로빈스는 미국 언론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이고, 아마도 그 양반은 제가 쓴 기사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겠죠. 다행스럽게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자, 언론을 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기자들한테 가장 큰 욕이 무엇이겠습니까. "네 기사를 믿지 않는다"는 거죠. 기자의 존재 이유가 `사실`인데 "네 기사는 사실도 진실도 아니다"라고 하면 존재의 근거가 없어지는 거니까.
CBS의 오보는 역설적입니다. 부시한테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병역 특혜 보도였는데, 거짓으로 판명났습니다. CBS 뉴스를 20년 이상 이끌어온 간판 앵커 단 레더도 이때문에 옷을 벗게 됐죠. 레더는 이라크 전쟁 직전에 후세인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CBS는 오보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였고, 관련자를 모두 해임했습니다. "보도의 생명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고서요.
재밌죠. 진보적인 미국의 지식인들은 CBS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CBS는 신뢰 회복을 위해 유명 앵커와 프로듀서의 목을 쳤습니다. `누구에 대한 신뢰`인지 헷갈립니다만. 그러고 보니 곧 부시의 취임식이 있습니다. CBS가 부시에게 취임식 선물을 보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한 방송 기자의 `고백` 때문에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이 기자의 고백 중에 "자본의 논리...."이런 대목이 나오더군요. 언론이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와야한다는 아주 참신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 언론이 지금보다 몇천배 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해야 제몫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논리가 뭔가요? 돈의 논리죠. 돈이 되면 하고, 돈이 안되면 안한다. 돈 값에 충실하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상품(기사)은 돈이 된다는 거죠. 믿지 못할 상품, 가치없는 상품을 억지로 사라고 강요하는게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우리 언론들도 한 때(?) 말도 안되는 기사를 써서 빈축을 샀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솔직히 돈이 아깝죠.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자의 값, 언론의 값이 하한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돈이 아깝다는 거죠. "이런 기사를 돈 주고 보다니 돈이 아깝다" 이런 비판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기자가 생산하는 기사의 핵심은 사실, 진실, 정보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게 충족 안되니까 돈이 아깝고, 그러니까 안본다.
그래서 진실을 얘기하는 화씨911 같은 영화를 보겠다. 화씨911은 돈 값을 하니까. 화씨911이 다큐멘터리로는 이상하게도 높은 흥행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게 자본의 논리입니다. 상품이 제대로 되니까, 사람들이 많이 보고, 마이클 무어는 돈을 버는 겁니다.
대학 시절에 `강철 군화`라는 소설이 유행했습니다. 미국 노동자들을 다룬 소설입니다.(그러고 보니 저는 이 책도 읽지 않았네요.) 이 소설을 쓴 잭 런던이라는 양반은 좌파 성향의 작가였는데 이런 노동자 소설로 돈방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너무 돈을 많이 벌어서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이 노동자들한테 너무 인기가 좋아서 돈을 많이 벌게되니까 고민을 한 거죠.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도 되나..." 이건 자본주의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좋은 상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그 댓가로 큰 돈을 벌었다면 고민할 일이 아니죠.
오히려 더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죠. 그래야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기자들도 마누라한테 명품 핸드백도 사주고, 강남 아파트도 사고, 비싼 양주도 마시고..
상품을 사는 사람은 돈 값이 아깝지 않고,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좋고, 더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고, 다시 더 좋은 상품이 나오고. 선순환이 이뤄지는 겁니다.
제품은 형편없이 만들면서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는다고 조질 생각이나 하면 그것도 반 자본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발상을 한다면 진짜 상품다운 상품, 기사다운 기사를 쓰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야할 겁니다.
"만국의 기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카드값 걱정이요, 너희들이 얻을 것은 명품 핸드백이다. 자본주의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저도 당장 자본주의 정신으로 재무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에이 돈이 아깝다. 이걸 기사라고 썼냐" 이런 소리 듣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