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재의 겨레말]가을

  • 등록 2012-10-22 오후 3:20:54

    수정 2012-10-22 오후 3:20:54

[이길재의 겨레말]가을

볏더미를 쌓아 낟가리를 하는 것으로 한 차례 {가을을} 끝내자?. 《선우휘: 사도행전》

콩밭에 올라가 보니 콩대가 보여야 {가을을} 하지. 《류원무: 봄물》

‘가을’을 만끽하고픈 단풍놀이 행락객들을 설레게 하는 계절! 그런데 ‘가을을 끝내자’, ‘가을을 하지’의 ‘가을’은 계절과는 무관해 보인다. 두 작가의 소설에 나타나는 ‘가을’은 ‘추수’와 비슷한 말로,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가을’과 ‘추수’는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가을’은 그 시기가 꼭 ‘가을’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에서‘추수’와 다르다. ‘볏가을’, ‘보릿가을’(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에는 ‘벼가을, 보리가을’로 실려 있음.)이라고 하지만 ‘보리 추수’라고는 할 수 없다. ‘보리’는 가을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농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볏가을’은 ‘벼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보릿가을’은 ‘보리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벼가을을} 앞두고 농촌의 일손은 바빴다. 《김송: 김여인의 일생》

그렇게 여섯 달이먼 {보리가을까지는} 빠듯하게 대겄지라우. 《송기숙: 녹두장군》

{보릿가을을} 하여 먹을 것도 있었다. 《문순태: 타오르는 강》

요즘은 ‘콤바인’이라는 기계가 있어 ‘벼가을’과 ‘벼바심’이 한 자리에서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낫으로 벼를 베어 논바닥에 깔아 말리고, 마른 벼는 다시 한 다발씩 묶어 ‘사발가리(볏단 20개 정도를 열십자 모양으로 쌓아 놓은 더미를 이르는 전북 방언. 전남 지역에서는 ’십자가리‘라고 한다.)’를 쳐 두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갈 무렵 농군들은 달구지나 지게 등짐으로 볏단을 날라 마당 한 켠에 볏가리를 쌓았다. 여기까지가 ‘볏가을’이다. ‘볏가을’이 끝난 후에 ‘벼바심’을 하게 된다. ‘가을’이 끝난 후에 ‘바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을’은 ‘볏가을’이나 ‘보릿가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강 언덕으로 올라서서 동구 앞 달구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들판에는 이미 조합원들이 {밀가을을} 하고 있었다. 《권정룡: 아버지의 수기》

장 서방은 밭머리쉼도 없이 이어 {조가을에} 달라붙었다. 《리근전: 고난의 년대》

오늘 {콩가을을} 하는데 저 녀자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빗디뎠는지 넘어져서 비탈로 구부는(구르는) 걸 보았소.《김순녀: 동병상련》

‘밀가을’은 ‘밀을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조가을’은 ‘조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 ‘콩가을’은 ‘콩을 뽑거나 베어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밀가을, 조가을, 콩가을’ 등은 아직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들이다.

‘가을’은 ‘하다’와 결합하여 ‘가을하다’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 뜻은 ‘벼나 보리 등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이다.

묵묵히 땅을 갈아 번지고 묵묵히 씨 뿌리고 묵묵히 기음매고 묵묵히 {가을하고} 타작하고 하면 1년의 삶은 끝나가는 것이다. 《김재국: 타계의 웃음》

금빛물결 일렁이는 드넓은 논벌 여기저기에 벼 {가을하는} 사람들의 농립모와 하얀 머리 수건들이 보인다. 《조상호: 첫선물》

계절을 나타내는 ‘가을’과 추수의 의미를 갖는 ‘가을’은 서로 다른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어원이 같은 말이다. ‘가을’은 ‘끊다’ 혹은 ‘자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다’와 ‘?’이 결합한 ‘??’이 ‘??>??>?을>가을’과 같은 변화를 겪은 말이다. 계절의 ‘가을’이든 추수의 ‘가을’이든 모두 ‘끊다, 자르다’의 의미에서부터 출발한 단어이다. 따라서 ‘가을’은 그 밑바탕에 ‘추수의 계절’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 가을하다’의 방언형으로 ‘가실, 가슬, 가실하다(가실허다), 가슬하다(가슬허다)’ 등이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 따라 ‘??>??>?슬>가슬>가실’과 같은 변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작년 {가실에} 감 딸 직에 한 개 냉게 놨잖이여? 《최명희: 혼불》

쎄 빠지게 일헐 눔 하나또 웂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북헐 농새 지나마자 아니겄소? 《조정래: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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