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미륵산 아래에 자리한 미륵사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광대한 꿈과 섬세한 예술혼이 느껴지는 사적지다. 지금은 천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탑 두기와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백제문화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검소하면서도 화려했던 백제문화의 마지막 페이지를 찾아 전북 익산 땅으로 향한다. 익산은 무왕의 도시다. 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 ‘서동요’의 고장이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 서동과 선화의 사랑 노래. 이 노래의 주인공인 무왕은 백제 법왕이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후 무왕은 익산을 발판삼아 백제 부흥을 꿈꿨다. 하지만 그의 꿈도, 백제의 운명도 야속하게도 끝이 났다.
전북 익산 미륵산 아래에 자리한 미륵사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광대한 꿈과 섬세한 예술혼이 느껴지는 사적지다. 지금은 천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탑 두기와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백제 최대 가람으로 위용을 떨친 미륵사지
미륵산 남쪽 아래에는 무왕의 흔적이 있다. 바로 미륵사지(사적 150호)와 왕궁리유적이다. 익산 금마(金馬)의 미륵사지는 시인 신동엽이 ‘백제의 꽃밭’이라고 노래한 곳. 미륵사지 입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알리는 인증서 석비가 우뚝서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광대한 꿈과 섬세한 예술혼이 느껴지는 사적지로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가람이었다.
미륵사에는 원래 탑이 셋이었다. 부처님을 모신 금당(金堂) 또한 셋이었다. 가운데는 목탑이었고, 양쪽은 석탑이었다. 하지만 천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지금 남은 건 탑 두기와 당간지주뿐. 이 빈터만 보고 있어도 한눈에 사찰의 크기가 대단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 그리고 미륵산이 연못에 반영된 모습
서탑은 그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최대(最大)의 석탑이다. 절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탑은 여전히 남아 우리 앞에 서 있다. 석탑은 과거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석탑 위쪽 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덕지덕지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떠안 듯 백제의 석탑은 무거운 시멘트를 제 몸에 붙인 채 수십년 세월을 견뎌야 했다.
석탑을 본격 해체하고 보수를 시작한 것은 2001년이었다. 이때만 해도 석탑의 복원에 20여 년의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19년에 와서야 미륵사지 석탑은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었다. 복원 과정에 뜻하지 않은 선물도 발견되었다. 탑의 1층 심주석 아래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미륵사 창건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가장 확실한 열쇠였다. 사리장엄구는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동탑은 현대에 와서 복원한 탑이다. 아랫부분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개의 출입문을 달아놓았다. 허리를 깊이 숙여 탑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불교에서 탑 내부는 성역과 같은 곳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나 불경 등을 비밀스럽게 이곳에 모시기 때문이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된 금제사리내호
미륵사지 왼쪽 입구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다. 익산의 귀한 보물들을 모신 곳이다. 입구 로비에는 지금은 사라진 미륵사지의 목탑 축소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최소 높이가 40m에 이르렀다는 탑이다. 목탑 전체에 정교한 장식이 조각돼 있어 백제 시절 높은 수준의 기술을 그대로 담아냈다. ‘화려하다’는 표현은 미륵사 목탑을 위해 아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륵사지 서쪽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를 이곳에서 알현할 수 있다. 정밀한 세공 기술과 고운 빛깔 앞에 백제 문화재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쌍릉 대왕릉에서 나온 나무널도 볼 수 있다. 대왕릉에 묻힌 이는 백제 무왕으로 미륵사 건립을 지시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무왕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왕궁리 오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년전 무왕의 흔적을 따라가다
무왕의 흔적은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에도 남아 있다. 산 정상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암. 사자암 주차장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미륵산 정상 바로 아래에 사자사가 있다. 이 사자사 자리가 무왕 부부가 다녔던 사자암이 있던 자리다. 사자암에서 내려다보는 미륵사지와 익산 들녘의 풍광도 멋있지만, 더 멋진 전망을 보겠다면 정상까지 오르면 된다. 정상에서는 미륵사지의 전경과 함께 익산 땅의 장쾌한 전망도 조망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산성
여기까지 왔다면 미륵산성에도 들러야 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시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익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왕은 나라의 중심을 익산으로 옮기려 했고, 수도를 방어할 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어진 게 바로 미륵산성이라는 것이다. 성의 둘레는 1.8㎞ 남짓. 전체 성곽 중 3분의 1 정도만 복원됐지만,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대단하다.
무왕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왕궁리 오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왕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정확한 지명은 왕궁면 왕궁리. 이곳에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이 있다. 지명만 보더라도 이곳에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증거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왕궁터에 사찰을 세운 독특한 유적으로, 18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르는 왕궁의 규모와 담장뿐 아니라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금과 유리를 가공, 생산했던 공방터, 화장실 유적을 발굴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이 탑은 사찰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탑이 세워진 시기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대가 어떻든 8.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이 석탑은 왕궁리 유적을 사방으로 돌아가며 둘러봐야 제맛이다. 특히 서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석탑의 실루엣이 가히 장관이다.
익산 쌍릉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의 무덤
백제 무왕의 무덤도 인근에 있다. 익산쌍릉이라 알려진 고분이다. 규모가 다른 고분 두개가 있는데, 이름은 대왕릉과 소왕릉이다. 문헌에는 무왕과 그의 왕비 능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시대 도굴된 기록이 있다. 이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당시 유리건판 사진이 남아 있어 발견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왕릉의 목관이 발견됐다. 대왕릉에서 출토된 목관은 출토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시됐고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됐다. 지난 2020년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관돼 현재 상설 전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