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좋은 통계'의 피해자들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 등록 2023-10-04 오전 6:15:00

    수정 2023-10-04 오전 6:15:00

거울이 흐려 사물을 그대로 비추지 못하면 사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해 엉뚱한 판단을 내리기 쉽다. 흐린 거울을 자주 보다 보면 참모습을 모르는 까닭에 거짓을 진실로 믿으려 들다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에 빠지기도 한다. 투명한 세계라야 서로 믿을 수 있어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다. 참과 거짓이 뒤바뀌어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에서는 사회수용능력이 약화돼 성장잠재력 저하로 직결된다. 투명성을 해치는 통계조작 피해자는 통계마사지 당사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된다. 성경에서도 “너희는 말할 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해라,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 37) 라고 했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는 1980년대 초부터 포퓰리즘 극성으로 공무원 숫자가 전체 고용의 4분의 1까지 늘어나며 국가채무가 폭증했다. 그리스 정부는 통계를 조작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낮춰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 했으나 국제사회의 불신만 사게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8년 안드레아스 게오르기우를 그리스 초대 통계청장에 임명하도록 주선하고 ‘그리스 재정의 진실’을 파악하려 했다. 게오르기우는 2009년 GDP의 13.4%로 마사지했던 재정적자 규모를 사실대로 2.4%포인트 늘어난 15.8%로 발표했다. 반대파들은 재정적자 규모를 부풀렸다는 혐의를 씌워 게오르기우를 고발했다. 분식회계가 아닌 ‘분식회계 거절’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는 아이러니였다.

문재인정부 시절 한 통계청장이 취임 직후 경제장관 회의에서 “장관님들 정책에 좋은 통계로 보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반대로, 전임 청장은 본의 아니게 퇴임하면서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후임자 말은 통계는 그럭저럭 다듬어 이현령비현령 “좋은 게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임자 말에는 통계는 정치적 도구 즉 ‘정치 수학’(political mathematics)이 되지 말고 사실 그대로를 알려야 한다는 통계원칙이 묻어나 있었다. 통계를 조작해 시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사실대로 곧이곧대로 작성해야 한다는 원칙(原則)과 반대로 통계를 두루뭉술 마사지해서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안심시키자는 변법(變法)의 대립으로 보였다.

‘좋은 통계’는 가짜정보를 제공해 관계자들을 잠시나마 안도하게 만들지 모르나 가계, 기업, 국가 경영에 장애가 된다. 사실과 다른 왜곡된 정보는 각 경제주체의 판단을 그르쳐 경제순환을 왜곡시키는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다. 생각컨대, 권력 심장부에 진실을 직언하는 참모가 있었다면 ‘부동산시장에 대한 호언장담’이 계속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도된 신념(?)이 없었다면 서민들이 집을 팔고, 사지 않게 유도하지 않았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간다. 우리 옆집 노신사는 집값이 안정될 거란 말을 믿고 집을 팔아 전세로 바꾸고 남은 돈을 예금했다. 급기야 집 판 값보다 전셋값이 더 오르게 되자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며 타지로 이사 갔다. 재정확대를 통해 유동성을 완화해 집값 상승 원인을 제공하며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는 말을 믿다가 낭패당한 희생양이 그 노신사 혼자뿐일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거래 상대를 파악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낮추거나 없애 거래를 원활하게 한다. 통계가 원칙 없이 흔들리면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간 신뢰를 크게 떨어트려 거래비용과 시간을 낭비한다. 부정확한 통계는 가계와 기업의 판단을 그르쳐 결과적으로 국가경쟁력을 악화시킨다. 원칙이 없으면 위기에 대한 대응능력 또한 저하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통계는 현주소를 정확히 진단하고 정책이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청진기이자 조타수”라고 했다. 고장 난 청진기로 어찌 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으며, 책임감 없는 조타수가 배를 어떻게 목적지 항구까지 안전하게 이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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