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국회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김 후보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한 서면답변서를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 1건’으로 2011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재판장 재직 시 판결한 40대 상습절도범 사건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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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사연은 기구했다. 1967년생인 A씨는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는 가출하며 출생신고도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1살이 돼서야 큰아버지가 A씨를 친아들로 출생신고를 하며 비로소 법적 신분을 갖게 됐다.
김형두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재판, 그 무게 유념해야”
스무 살이 되던 해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A씨는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생계를 이어갔다. 생계전선에 뛰어들며 친적들과도 완전히 교류가 끊겼다. 그러던 중이던 1992년 큰아버지가 사망했다.
큰아버지의 자녀들은 친자로 등록돼 있는 A씨에게도 재산이 상속될 것을 우려해 A씨에 대한 실종신고를 한 후, 법원에 실종심판을 청구했다. 결국 법원은 1995년 4월 청구를 받아들여 실종선고를 하며 A씨에 대한 사망신고가 내려졌다.
이 같은 제약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어렵게 했고, A씨는 계속해서 절도를 반복하며 5차례나 교도소를 더 들락날락거리며 ‘상습범’으로 전락했다. 교도소 수감 중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매번 출소 후 새 삶을 꿈꿨지만 ‘법적 사망상태’가 매번 A씨의 의지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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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도소 수감 중에는 큰아버지 자녀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너는 우리 아버지 자식이 아니다. 나도 사업에 실패해 죽을 지경이다.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매정한 답변만 듣고 더 이상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출소 직후인 2011년 6월 또다시 절도 현행범으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또다시 재판부에 ‘실종선고 취소’를 호소했다. 김 후보자를 비롯한 재판부는 A씨로부터 사연을 자세히 듣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파악한 후 A씨 호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국선변호인에게 “신분회복 절차 도와달라” 권고
신분회복 절차를 모르는 A씨를 위해 국선전담변호사에게 관련 절차 도움을 주도록 독려했다. 또 A씨에 대한 형사재판은 다른 법원에서 진행되던 실종선고 취소심판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준비기일로 진행했다. 결국 A씨는 2011년 8월 실종선고가 취소돼 다시 ‘산 사람’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김 후보자 등 재판부는 2011년 10월 A씨의 신청에 따라 상습절도혐의에 대한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했다. A씨는 배심원들에게 “법적으로 사망상태라 신분증이 없어 출소 후 직장을 구하는 것은 물론 노동일도 하기 어려웠다. 신분을 살리려 했지만 행정기관은 책임을 미뤘고 교도소에 있을 때는 신청할 비용도 없었다”고 호소했다.
검찰은 A씨에 대해 양형기준보다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배심원단도 징역 3년 의견을 재판부에 제시했다. 재판부도 검찰과 배심원단의 의견을 받아들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당시 김 후보자는 “실종 선고로 생활이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 법률에서 허용하는 가장 낮은 형량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김 후보자는 국회 법사위에 보낸 서면답변서를 통해 A씨와 관련해서도 “아마도 출소한 지 약 10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인데, 청문회를 준비하며 살펴보니 그 사건 이후 다시 죄를 지어 형사재판을 받은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사건의 신속한 처리도 중요하지만, 헌법과 법률의 위임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재판을 맡는 판사로서는 개개의 재판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큰 무게를 항상 유념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사례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