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반세기)”지하경제를 잡아라”…금융실명제③

두번의 유보 거쳐 11년만에 정책화 성공
KDI와 재무부 공조 거쳐 최종 정책방향 윤곽
  • 등록 2005-09-13 오후 12:40:40

    수정 2005-09-13 오후 5:38:03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실명제 준비팀은 두 곳의 아지트를 거점으로 비밀작업을 진행했다. 한 곳은 대치동 휘문고교 앞에 있는 모 빌딩 사무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천 시내에 있는 주공아파트였다.

◇ 해외출장 명령 받고 아파트에서 합숙

대치동 사무실은 양수길 박사가 친구로부터 개인용도를 내세워 임시로 빌린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입구에는 보안을 위해 “국제투자연구원”이라는 엉뚱한 간판을 내걸었다. 이 곳에서는 KDI팀이 주로 작업했으며, 이경식 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 양 박사 등이 밤늦게 까지 실명제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막바지 작업이 피치를 올리면서 과천 정부청사 부근에도 작업실이 필요해졌다. 야간작업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합숙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 평촌과 과천 일대를 뒤진 끝에 두 달간 사용 조건으로 과천 주공아파트 505동 304호(48평)를 370만원에 세내 입주했다.

과천 작업실이 확보되면서 재무부의 임동빈 관세정책과 사무관과 최규연 외자정책과 사무관이 작업팀에 새로 합류했다. 이들은 89년 실명제 실시준비단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막바지 합숙 요원으로 차출됐다.

김용진 세제실장은 합숙에 참여할 이들을 합법적으로 빼돌리기 위해 해외출장 명령이라는 꾀를 냈다. 출장 명령은 "선진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금융종합과세에 대한 자료수집" 명분으로 내려졌다. 가짜 해외출장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임 사무관과 최 사무관은 출발 당일까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은 실제로 해외출장을 가는 줄 알고 7월28일 공항에 나갔다가 현지에서 상황설명을 듣고는 몸을 숨겨 과천 안가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장기 해외출장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들은 과천 안가에서 국제전화를 사칭해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를 해야만 했다.

김진표 심의관과 진동수 과장은 낮에는 과천 청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안가의 합숙작업에 참여하는 이중생활을 감수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이들은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에서 내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드나들었다.

주거지역인 아파트 단지에 중년 남자들이 밤낮으로 들락거리는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비쳐질게 뻔했다. 작업팀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대학교수들인데 방학을 맞아 공동으로 논문을 쓰고 있다”며 “수시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연막을 쳤다.

실명제 발표가 있은 후 이 아파트 경비원 강모씨는 “논문 작성을 위해 매일밤 불을 밝히고 일을 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며 “매일 엄청난 양의 폐지가 쏟아져 나와 의아스러웠지만 이들이 금융실명제를 탄생시킨 실무진이었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술회했다.(경향신문 93년 8월14일)

◇ “D데이는 8월12일“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 발표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를 놓고 작업팀내 논의가 전개됐다.

발표 형태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하기로 내부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작업팀은 국회가 열리지 않는 8월중 주말을 놓고 택일에 들어갔다. 토요일을 고르다 보니 8월14일과 21일, 28일이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8월초에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는데 발표를 8월 중순 이후로 미룰 경우 보안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컸다. 이 같은 이유로 21일과 28일은 후보에서 제외됐다. 남은 날짜는 14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이 광복절이어서 분위기상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런 저런 고민을 진행하는 와중에 대통령으로부터 평일도 상관없다는 언질이 내려왔다. 작업팀은 주저없이 목요일인 12일을 발표 D데이로 낙점했다.

12일 발표할 경우 다음날인 13일 금융기관 개점시간을 늦춰 1차 교육을 실시한 뒤 그날 오후와 토요일인 14일 오전에 약간의 실전을 경험하면 다시 일요일로 이어지는만큼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대통령이 실명제 발표 시점을 12일로 최종 확정한 것은 발표 사흘전인 9일 부총리와의 면담자리에서 였다. 이 부총리는 이날 작업팀이 마무리한 금융실명제 최종 방안을 보고하면서 발표 시점을 12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대통령이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D데이 확정 사실이 작업팀에 전달된 것은 발표 하루전인 11일 오전이었다. 보안을 위해 작업팀에도 바로 하루전에야 통지가 내려온 것이다. 작업팀은 과천시내 인쇄소인 `범신사`를 전세내 11일 오후 2시부터 발표문과 보도자료 등 관련 문서 인쇄에 들어갔다. 근 두달여 동안 진행해 온 실명제 준비팀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다음날인 12일 오전 이 부총리는 “대통령에게 내년 예산에 대해 보고할 것이 있다”고 연막을 치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실명제 실시에 관한 마지막 보고와 함께 대통령 담화문 원고를 전달한다.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3부 요인에 대한 사전 통지에 이어 오후 7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됐고, 7시30분에는 대통령 담화문이 발표됐다. 또 오후 8시에는 부총리와 재무부장관의 특별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등 실명제 발표를 둘러싼 제반 일정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우려 딛고 ‘성공적 정착’

김 대통령은 후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개혁중의 개혁”이라고 자찬했다. 두번씩이나 ‘실시 검토’와 ‘유보’가 엇갈렸던 실명제 추진은 그만큼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정작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세간의 우려는 눈 녹듯 사라졌다. 약간의 마찰이 있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명 의무전환 마감일인 93년 10월12일, 재무부 최종집계 결과 가·차명계좌 가운데 실명전환한 금액은 5조6726억원에 달했다. 전체 대상계좌의 96%가 실명으로 전환한 것이다.

경제 부작용에 대한 우려 역시 기우였다.

실시 직후인 93년 3분기와 4분기 GNP성장율은 6.8%와 6.4%를 넘어서 실명제 실시전인 2분기의 4 .8%를 크게 웃돌았다. 실명제 실시 이후 오히려 경제 회복세가 더 뚜렷해졌음을 보여준다.
증권시장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실명제 발표 당시 725포인트였던 주가는 그해 말 866포인트까지 올랐고, 94년 2월에는 970포인트까지 상승하는 등 한동안 초강세를 이어갔다.

금융실명제의 성공적 정착에 힘입어 정부는 95년 1월 부동산실명제를 도입, 부동산 거래시에도 실명만을 사용토록 의무화했으며, 96년부터는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시행하고 있다. KDI가 제시했던 3단계 금융실명제 방안 중 2단계까지가 법제화돼 실제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명제의 효과는 이후 자금흐름 개선으로 명확히 드러났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기업 비자금이나 정치자금 등 검은 돈의 세탁과정이 드러나면서 철퇴를 맞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다 실명제 덕분이다.

도입 과정에서 곡절이 있긴 했지만 금융실명제는 이제 너무도 당연한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금융계좌를 신설하려면 실명으로 해야 한다는데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11년에 걸친 난산 끝에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기존의 불투명한 금융관행을 바꿔 놓으면서 지하경제의 폐해를 뿌리뽑는 확실한 기저로 자리를 잡았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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