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⑮지동현 조흥은행 상무(상)

  • 등록 2001-06-22 오후 2:23:15

    수정 2001-06-22 오후 2:23:15

[edaily] 우리나라에서 은행의 위치는 다른 어떤 금융기관보다 중요하다. 채권시장에서도 은행은 가장 중요한 투자기관이다. 대형은행들은 수조원의 자금을 채권에 투자하는데 아직 독자적인 투자패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은행이면 다 같다”는 생각이 무너졌고 좋은 은행과 그렇지 않은 은행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채권시장에도 앞으로는 “운용을 잘하는 은행과 그렇지 않은 은행”을 차별하게 될 것이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조흥은행 지동현 상무다. 지 상무는 은행 자산운용을 담당한지 5개월째로 접어든 “신참”이다.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서 은행 구조조정에 참여하고 조흥은행 사외이사도 지냈지만 실전에 참여한 것은 올 2월부터다. 채권도 그의 전공이 아니다. 지 상무의 전공은 “은행경영”이다. 자산운용을 잘 모르는 지 상무가 짧은 시간에 채권시장에서 비교적 큰 전공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실무 트레이더들과 호흡을 잘 맞추고 나름대로 리스크 관리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조흥은행은 올 상반기에 두 차례나 채권시장에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한 번은 한국은행 전철환 총재의 “국고채 과열” 발언이 나올 즈음 예보채를 대량으로 매각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지난 5월 수익률 랠리에 참여했을 때였다. 지 상무는 자산운용을 맡자마자 “수익률이 1% 움직일 때 손실가능 범위를 100억원이내로 한다”는 리스크 관리 원칙을 세우고 채권투자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실무 딜러들과 마찰이 있었지만 당시 판단으로 손실을 회피할 수 있었다. 지난 5월에는 실무 딜러들이 “채권을 사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해와서 주저없이 “질러” 결정을 내렸다. 밤에 잠을 못잘 정도로 걱정했지만 조흥은행내 5개 본부중에서 목표 수익 진도율이 가장 빠른 본부가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만큼 투자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지 상무는 은행경영을 전공한 학자로서 은행 구조조정의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지금은 자산운용을 책임지고 있다. 채권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뷰한 지 상무의 “은행론”과 “채권투자론”을 들어봤다. (지 상무 약력은 인터뷰 하편 기사 하단 참조. 지 상무 인터뷰를 끝으로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 시리즈 1부를 정리합니다. 그동안 시리즈를 애독해주신 edaily 독자와 인터뷰에 응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보다 참신한 기획으로 하반기중 시리즈 2부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돈되는 공부를 하기 위해 경영학을 선택> -박사학위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받으셨습니다.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다가 논문을 못 쓰고 바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서울대에서 소위 "쯩" 이라고 하는 석사학위를 받은 건 아니구요. 석사학위를 제대로 취득한 곳은 미국입니다.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3학기 다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펜실베니아대학의 경영학 박사과정에 등록했습니다. 이 곳에서는 박사학위 수료과정 중에도 석사학위를 달라고 하면 학위를 줘요. 물론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만요. 박사학위를 못 받을지도 모르니까 우선 석사학위부터 취득했습니다. (웃음) 다행히 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었구요. 얼마전 금융연구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 때 산토메로 총재가 오셨어요. 이분이 바로 유학시절 제 지도교수셨습니다. 그 분때문에 졸업한거나 다름없습니다. 아니면 못했을 거에요. -그럼 학번은 어떻게 되십니까.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77학번입니다. 제가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저희때부터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거든요. 소위말하는 뽑기 1세대죠.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사람취급도 안해주는 거에요. "시험도 안보고 들어온 너희들이 무슨~" 하면서요. 서울대는 저희 때 더 많이 들어갔는데도 말입니다. 하하. 보성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들도 보성고등학교를 다니게하고 싶어서 일부러 올림픽공원 쪽으로 이사했을 정도입니다. -전공결정 과정 중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저희때는 전공을 결정하고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계열별로 뽑는 시스템이었어요. 사회계열로 입학해서 전공선택을 할 때 잠시 갈등했죠.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버지가 권유하시니 법대는 더 가기 싫고(웃음). 경영과 경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경제학과를 가면 공부를 많이해야 될 것 같아서 싫더라구요. "경영학과를 가면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결정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수업을 들어보니 돈 버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더군요.하하. 자연스럽게 대학교 2학년때부터 유학이나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고 유학준비에 들어갔습니다. SK그룹이 관장하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주는 장학금을 받고 펜실베니아대학으로 떠났어요. 사실 전공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제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를 무척 감명깊게 읽었거든요.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잘 나가는 브로커였는데 돈 벌어서 그만두고 타히티로 떠나잖습니까. 그게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나도 돈을 빨리 번 다음 은퇴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굳히게됐습니다. 은퇴 후에는 종합예술센터같은 것을 세워보고 싶었어요. <” 은행은 옛날에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중요하다”> -유학을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부시절에는 수업이 너무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어요. 돈 버는 것과는 하등 관련도 없고 말이죠. "일단 미국으로 한번 가보자. 거기가면 혹시 돈 버는 방법을 배울지도 몰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진거죠.(웃음) 펜실베니아에 가보니 “finance”도 세 가지 분야가 있더라구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것은 investment(투자론)였고 그다음이 corporate finance(기업재무), 제가 고른 financial institution(은행경영)은 거의 지원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은행경영을 지원하신 겁니까. ▲제가 전공을 결정할 때가 84년이었습니다. 속으로 곰곰 생각했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학위를 받으면 88년 정도가 될 텐데 그 때에는 무엇이 중요할까" 라고 말이죠. 결론은 은행이었습니다. 은행은 옛날에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지만 90년대가 돼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써 먹을 수 있는 걸로 공부해야지라는 생각이 많았죠. 박사공부라는 것이 말은 거창했지만 독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커리큘럼에서 가르쳐주는 건 investment 나 corporate finance 정도고 financial institution은 한 과목밖에 없었어요. 그때 산토메로 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와튼스쿨(펜실베니아 대 경영대학원의 별칭)에서 조교로 재직하면서 공부를 더 많이하게 됐어요. 뭘 알아야 가르칠 것이 아니겠어요. 기초서적부터 신문기사까지 닥치는대로 읽어나가니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로컬 경제의 중요성이 존재하는 한 한국이든 다른 나라든 은행의 위치는 확고”> -그렇다면 은행의 중요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행 중심이냐 자금시장 중심의 경제냐 하는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가 직접 대면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경제가 자본시장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과 영국 뿐이에요. 독일이나 프랑스 등 여타 선진국들은 모두 은행위주입니다. 이 사실이 하루이틀에 이뤄진 것도 아니고 아무 이유없이 된 것도 절대 아니에요. 자본시장이 은행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인 미국, 영국은 그 제도가 적합하도록 국가가 발전해왔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면서 로컬보다는 글로벌한 쪽으로 경제전략을 수립해왔죠. 미국도 마찬가지구요. 독일이나 프랑스같은 경제선진국도 아직은 로컬중심 경제권을 이루고 있고 한국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죠. 물론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 흐름을 따라가야하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러나 아무리 글로벌화가 된다해도 로컬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로컬의 중요성이 존재하는 한 한국이든 다른 나라든 은행의 위치는 확고할 겁니다. -귀국 후 학교로 가지 않고 금융연구원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귀국 당시에는 학교에 갈 요량으로 들어왔는데 그게 잘 안 됐습니다. 수출입은행에서 장기 발전전략 수립, 부서 내부평가 문제 등을 담당하다가 금융연구원으로 옮겼습니다. 수출입은행에서는 자산부채 종합관리(ALM asset liability manangement)에 관한 보고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가 89년인데 개념자체도 생소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개념을 소개했다고나 할까요. 금융연구원에서도 초창기 4년에는 대부분 ALM관련 컨설팅을 담당했습니다. -금융연구원은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진 건가요. 10년을 근무하셨으니 사정을 잘 아시겠군요. ▲금융연구원은 1991년 6월에 설립됐습니다. 초창기 박재윤 서울대교수를 원장으로 초빙하셨죠.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금융시장 및 금융기관에 대한 전반적인 발전방향을 제시한다는 거였어요. 우리나라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죠. -박 원장은 김영삼 정부에서 일하셨죠? 금융연구원이 당시 정부정책 입안에 관여하기도 했습니까.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경제정책과 관련, 부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금융연구원도 일정부분 공과가 있다고 봐야겠죠. -금융연구원에서 IMF 외환위기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나요? 어렴풋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할 정도로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외환위기가 터진 후 은행경영을 공부한 제가 그동안 뭘했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은행이 가장 중요하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뭔가 보여줘야한다는 마음으로 구조조정 아이디어를 만들었습니다. <”은행 구조조정 갈 길이 아직 멀었습니다.”> -서울은행, 제일은행 매각작업에도 참여하셨죠. ▲저는 어드바이저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는 1998년 1월30일 두 은행에 각각 1조5000억원을 출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한전과 담배인삼공사 주식을 넣었죠. 그 일을 하면서 두 은행 임원들하고 종종 의견충돌을 빚었습니다. 은행임원들의 생각은 "정부출자가 이뤄졌으니 우리은행은 대한민국 어떤 은행보다 우량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갈 길이 아직 멀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제일은행 관계자께서 "아니 은행업무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하더군요. 은행에 30년 다닌다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죠. 제가 "은행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런 근거없이 그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라고 근거를 말해도 들은 척도 안하더군요. 그래서 크게 언쟁을 한 적도 있었어요. 정부는 "매각대금은 1조5000억원은 넘어야한다. 풋백옵션도 못 준다"고 말했지만 그 조건으로 누가 그 은행을 사겠습니까. 모건스탠리를 주간 증권사, 태평양을 주간법무법인으로 선정하는 작업을 마치고 매각작업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 뉴브리지에 줬던 조건이라면 협상이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그러면 정부의 손해가 훨씬 줄어들었을텐데 말이에요. 두 은행과 금융업 전반 아니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그 당시 은행 부실채권 규모가 200조가 넘는다는 말을 종종 하고 다녔습니다. 세미나나 심포지움에 참석해서 그러한 말을 몇 번 했더니 압력이 들어올 정도였어요(웃음). 세계은행에서 파견나온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일했는데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똑같았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모두 비슷하다. 처음 예상한 (부실채권) 규모보다 적어도 3배는 늘려 잡는게 좋을 것"이라면서 "경험상 틀림없으니 한국도 3배 이상이라고 본다"고 말하더군요. -서울은행은 결국 매각자를 찾지 못하고 위탁경영이라는 묘한 방법으로 일처리가 됐죠. 두 은행 매각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학자로서 말입니다.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실패한 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어차피 매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청산과 매각 두 가지밖에 없었으니까요. 지방은행 정도의 소규모 은행이라면 청산이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일이나 서울은행 정도를 청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한국경제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어요. 청산비용도 엄청나게 들어가니까 결국 매각의 길을 자연스레 걷게 됐죠. 아쉬운 점은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매각자를 찾아나섰으면 훨씬 좋은 조건으로 팔 수도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겁니다. 망가진 회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게 돼 있어요. 은행이건 기업이건 마찬가지고 대우차나 한보철강 문제도 동일하다고 봐요.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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