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비프 콘소메''

어린 시절 공기 닮은 ''맑은 쇠고기 장국''
  • 등록 2008-06-26 오후 2:31:52

    수정 2008-06-26 오후 2:31:52

[조선일보 제공] 서울에 처음 온 서양 친구를 안내할 겸, 좋아하는 조선시대 도자 그릇도 볼 겸 해서 박물관에 들렀다. 감상용보다는 아마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조선시대 그릇은 군데군데 빈틈이 보이는 형태의 따뜻함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다.

요즘 나는 그릇 자체보다 형태적으로 무언가 모자란 듯한 그릇의 틈새를 통해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그릇은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하나의 창(窓)이다. 완벽하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제약받지 않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그 넉넉함은 이 그릇을 보는 이들의 수많은 다양성을 수용하며 몇 백 년이 지나도, 어느 장소에서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빛나고 있는 것이다.

프로방스의 포도밭 구경을 따라나선 길에 포도농장에서 준비한 프랑스 시골의 풍성하고도 소박한 점심, 그리고 큰 볼(bowl)에 격식 차리지 않고 담아낸 '비프 콘소메(beef consomm�·맑은 쇠고기 장국)'는 '넉넉한 투명함'을 다시 일깨워준 음식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수프요리인 콘소메를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맛과 색깔을 내기 위해 양파를 볶다가 각종 채소와 쇠고기, 향신료 등을 넣고 끓인 후 고운 망에 맑게 걸러내는 것인데, 함께 끓이는 재료 중에 머랭(meringue·달걀 흰자 거품)이 들어가는 점이 특별할 수 있겠다. 찌꺼기와 잡냄새 제거 등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수프의 맛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프랑스 레스토랑‘라브리’의 콘소메 수프.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질 좋은 프로방스 쇠고기 양짓살과 바질(민트과의 허브)이 많이 들어간 부케 가르니(bouquet garni·국물의 풍미를 내기 위해 각종 허브를 묶은 다발)로 만들어지는 프로방스의 투명한 콘소메는 처음 입에 댈 때부터 혀를 돌아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조그만 변화도 보이질 않는다. 밋밋한 맛은 놀라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쯤이면 무언가 가슴이 촉촉해지는 그리움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리운 맛은 슬픔이라기보다는 뭔가 한두 마디로는 표현키 어려운 따뜻함 같은 것이다. 프로방스 콘소메는 프로방스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과, 풍경과, 이야기를 포함하는 듯하다.

이런 느낌을 일본 도쿄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다. 도쿄에 사는 동생 집에서 자고 난 아침 조용한 주택가를 산보했다. 동네 입구 조그만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 우연히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꽃나무 향기를 맡게 되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 교정에 지천이던 향기 좋은 꽃나무인데, 요즘 우리나라에선 잘 보이지 않는 나무이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향기를 기억해낸 것이다.

향기에서 음악이 들린다. 나는 '스리 도그 나이트(Three Dog Night)'가 부른 '올드 패션드 러브 송(Old Fashioned Love Song)'이라는 노래의 시작 부분 반주와 'just an old fashioned love song playing on the radio…'하고 시작되는 앞 부분의 몇 소절을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구식 진공관 라디오에서 온갖 잡음과 함께 섞여 몽글몽글하게 들리는 AM 라디오 소리 같은 것인데, 또한 햇살 따가운 가을 아침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조회시간에 교가나 애국가 반주를 위해 연주되는 풍금 반주에 마이크를 갖다 댄 소리와 비슷하기도 하다.

잊고 지냈던 추억을 담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투명하고 밍밍한 쇠고기 국물. 콘소메는 정찬의 시작을 알리는 수프로, 온갖 소스의 기본 소재로 자기 주장 없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련한 기억과, 음악과, 향기와, 친구들과, 그 시절의 맑은 공기까지 일깨운다. 프로방스 콘소메는 그런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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