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현의 일상탈출)(18)억겁의 인연

  • 등록 2006-11-24 오후 6:06:32

    수정 2006-11-24 오후 6:06:32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여행을 할 때는 늘 인연을 꿈꾼다. 이 넓은 세상에 하필 그 시각, 그 장소에 왜 내가 있었고 또 그 사람이 있었을까. 그건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에서 처럼 인연이 꼭 '남녀상열지사'일 필요는 없다.

인도에서 만난 수많은 인도인들, 그리고 여행자들 모두 인연의 범주 안에 들어온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사기꾼을 만난 것도 인연이다. 옷깃만 스치려고 해도 전생에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
델리에서 뭄바이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혼자가 됐다. 북인도의 레로 간다는 일행과 떨어져 남부 인도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좀 두렵기도 했지만 내심 더 많은 인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정말 그랬다. 혼자 다닐때 더 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첫번째 인연. 뭄바이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렸다. 가게 문은 대부분 닫혀있고 불도 꺼졌다. 썰렁한 뭄바이 시내를 보니 숙소를 찾을 게 슬슬 걱정된다. 내게 있는 건 가이드북이 전부다.

일단 배낭 여행자들이 많이 모인다는 콜바거리까지 가기로 했다. 버스에는 노선 안내도도 없고 안내방송도 없다. 계속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수 밖에 없다. 가이드북의 지도와 교통 표지판으로 대충 가늠해보다가 느낌이 확 왔을때 여기가 콜바 거리냐고 물었다. 역시 여자의 직감이란..정확히 맞췄다.

제대로 내리기는 했는데 이제부터 숙소를 찾아가는 게 문제다. 길거리는 어둡고 도대체 동서남북 파악이 되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다 뒤에 내린 젊은 여자 아이에게 가이드북을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는 방향인 것 같다고 따라오란다.

좀 걷다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선다. 계속 따라가야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이 아이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아마 집에서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다.

▲ 고아 베나울림 해변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데 중간에 차이니즈라는 말이 들린다. 중국인인줄 알았나보다. 전화를 끊더니 잠깐 기다리란다.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잠시후 하얀 모자와 하얀 펀자비를 입은 남자가 나온다. 자기 아빠라고 소개한다.

그 모녀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나의 목적지였던 게스트하우스까지 안내해 주고는 돌아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인도에서 만난 인연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녀였다.

두번째 인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다. 이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아침을 준다. 어제 저녁을 못 먹은 탓에 배가 무척 고팠다. 계란 프라이에 빵, 바나나를 받아들고 테이블에 앉는데 누가 와서 '한국분이세요?'하고 묻는다.

같이 아침을 먹으면서 한참을 얘기했다. 한국을 떠난지 8개월째인 이 남자는 2년정도 세계 여행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인도는 세번째고 뭄바이에는 어제 도착해서 일부 좀 둘러봤다고 했다.

그동안 여행한 얘기, 만난 사람들, 앞으로 계획.. 얘기할 게 너무도 많았다. 뭄바이에서 가 볼 만한 곳을 추천해주고는 오후에 엘리펀트 섬에 가지 않겠냐고 했다. 오전에는 혼자 뭄바이를 돌아보고 오후에 만나서 엘리펀트 섬에 같이 가기로 했다.

"오전 내내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교외선 타고 도비가트에 갔다가 뭄바이 시내를 좀 둘러봤어요. 증권거래소를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입구부터 너무 검문을 철저하게 하더라구요. 그냥 포기했죠 뭐"

"오~증권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실례지만 직업이?"

갑자기 분위기가 진지해진다. 원래 한국 사람들이 만나면 제일 처음 하는 것이 호구조사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도 나올 것 같기 때문에 살짝 긴장하게 된다.

▲ 아라비아해에서 본 뭄바이의 스카이 라인
"아.. 이데일리라고..거기 기자로.."
"어? 이름이?"
"권소현인데요"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요?"
"글쎄..기억이.."

N모씨는 D증권사 바이오와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참 증권부에서 코스닥시장을 취재할 때 모 바이오 기업의 기업설명회에서 인사를 나눈 듯 했다.

그 때부터는 오래전부터 친했던 사이인듯 끊임없이 화제가 이어졌다. 엘리펀트섬을 구경하면서도 내내 증권얘기와 여의도 얘기를 했다.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 얘기도 나왔고 여의도에서 화제가 됐던 얘기도 나왔다.

그렇게 하루종일 같이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N모씨는 그날 밤기차를 타고 마운트아부라는 곳으로 떠나고 나는 그로부터 한시간 후쯤 역시 밤기차를 타고 고아로 떠나기로 돼 있었다. 한사람은 북쪽으로, 한사람은 남쪽으로 떠나는 것이다. 기차역도 달랐다.

짐을 챙기고, 씻고, 먼길 떠날 준비를 하고 나서 보니 N모씨는 이미 떠났을 시간. 너무 밍기적거렸나보다. 작별 인사도 못 했다.

세번째 인연. 고아에서 뭄바이로 돌아오는 밤버스에서였다.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과 같이 앉아 가게 될까, 혹은 푸쉬카르 갈 때처럼 밤새 눈싸움을 하면서 가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버스 출발시간이 다 되자 뚱뚱한 인도 아저씨가 버스에 오르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아저씨 덩치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웅크린 자세로 창문에 딱 붙어 가게 생겼다. 뭄바이까지 가는 길이 고생스러울 듯 했다.

▲ 고아 해변에서 고기를 잡는 아저씨
그런데 이 아저씨 의외로 친절하고 상냥하다. 감기에 걸려 계속 기침을 하고 코를 풀어댔더니 휴게소에 잠깐 멈췄을 때 따뜻한 짜이를 한잔 사다 준다. 자기는 맥주 한병을 사가지고 타서 홀짝 홀짝 마신다.

그러더니 나보고 한모금 마시란다. 됐다고 거절했더니 자기 한모금 마시고 또 권한다. 거의 "자기 한모금, 나 한모금" 이런 분위기다.

장거리 이동에 일용할 양식으로 잔뜩 사놓은 과자를 하나씩 풀었다. 아저씨와 과자를 나눠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아저씨는 `스테이트 뱅크 오브 인디아`(State bank of India)에서 일하는 은행원. 나름대로 인텔리지만 그래도 동양인인 내가 신기했나 보다. 이것 저것을 계속 물어본다.

버스가 출발한지 한참 지나자 영화를 틀어준다. 힌디어라 못알아 듣겠다. 이제 좀 자볼까 했는데 아저씨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줄거리를 얘기해 준다. 발랄한 볼리우드 영화라면 그냥 화면이라도 볼 만 하겠는데 이 영화는 러크나우에서 일어난 정치적 음모를 소재로 한 갱스터 영화다.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설명을 듣다가 어느 순간엔가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떠보니 밖이 훤하다. 다닥 다닥 붙은 건물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니 뭄바이 시내로 들어선 모양이다.

그런데 옆자리에 아저씨가 없다. 화들짝 놀라서 없어진 것 없나 짐부터 체크했다. 생각해보니 아저씨가 나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린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아저씨한테 살짝 미안해졌다. 그리고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린 아저씨가 약간 섭섭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만난 인연들, 연락처를 받거나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속에 아련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가끔 그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이게 진짜 `억겁의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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