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마루` 비난하며 국기에 맹세한다고?

  • 등록 2007-05-04 오후 8:41:00

    수정 2007-05-04 오후 8:41:00

[프레시안 제공]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왕이 죽은 뒤,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단지 논쟁으로 끝난 게 아니다. 죽고 죽이는 사화(士禍)로 번지곤 했다. 상복을 입는 기간, 제사의 절차 등이 강한 정치적 상징성을 띠고 있어서다. 이런 일을 놓고 흔히 "옛날 사람들은 실질보다 명분을 앞세웠다"고 풀이하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정치적 상징에 집착하는 것은 현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상징인 국기(國旗), 국가(國歌)를 둘러싼 논쟁이 첨예한 갈등으로 번지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 과연 해야 하나

최근 행정자치부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령에 포함시킨 '대한민국 국기법'을 입법예고한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과거 유신 정권의 잔재인 '국기에 대한 맹세'를 민주화 이후에도 존속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다.

논란이 일자, 행자부는 3일 "지난해 말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국기법에서 삭제하는 대신에 시행령에 위임하기로 합의한 결과에 따라 각 부처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달 23일 입법예고했다"며 "현재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밝혔다. 요컨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는 말로 최근의 논란에서 행자부가 한 발을 뺀 셈이다.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 존속 여부를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가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과연 존속시켜야 하느냐"의 문제 자체다.

"'남과 다를 수 있는 자유'는 현존 질서의 심장부에서도 보장돼야"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논의가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때였다. 전쟁으로 고양된 애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미국 웨스턴 버지니아 주의회는 미국 국기를 향해 오른손을 올려 경례하고 이와 함께 충성을 서약할 것을 교원과 학생들에게 의무로 부과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리고 이런 의무를 위배한 학생은 퇴학시키도록 규정했다.

이 지역 주민인 버네트 씨와 그 가족은 이런 의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상에 경배할 수 없다는 신앙이 이유였다. 그리고 이 법령이 적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재판소에 요구했다. 하급심 재판관 3명이 버네트 씨 가족의 손을 들어줬고, 사건은 결국 연방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갔다.

들끓는 논란 속에서 법원이 과연 어떤 판결을 내놓을지 미국사회의 관심이 집중됐다. 재판소는 1943년 6월 "개인을 존중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이루자면 그 대가로 때론 일탈적인 행위를 허용해야 하는데,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처럼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적은 경우는 대수롭지 않은 대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과 다를 수 있는 자유'가 사소한 문제에만 적용된다면, 이는 자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현존 질서의 심장부에 가닿는 중대한 사안에까지 '남과 다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느냐가 실질적 자유의 기준인 것이다"고 판시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할 권리를 요구한 버네트 씨 가족이 결국 이긴 것이다.

이 판결의 백미는 "'남과 다를 수 있는 자유'가 사소한 영역에서만 보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목이다. '현존 질서의 심장부에 가닿는 중대한 사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때, 민주주의는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기 사랑'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강요'는 별개"

1984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위정책을 비판하는 젊은이가 미국 국기를 불태웠다. 역시 법정논란으로 번졌고,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는 1989년 6월 "정치적 의견 표명 수단으로서 국기를 불태우는 것은 합중국 헌법 수정 1조에서 보장된 권리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법원의 판결로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

판결이 나온 후, 민주당은 국기 파괴 행위를 범죄로 하는 연방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연방최고재판소는 1990년 6월, "국기 모독에 사회가 반발한다 해도 당사자를 처벌하는 것은 미국 국기를 국기이기 때문에 숭상하여야 하는 '자유' 그 자체를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이 연방법에 위헌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연방 의회와 각 주는 미국 국기에 대한 물리적 모독을 금지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헌법 개정안이 하원에서 발의됐다. 하지만 결의안은 부결됐고, 이어 상원에서도 부결됐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 벌어진 토론도 치열했다. "미국 국기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가치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이고 의도적으로 모독하는 행위를 헌법에서 금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찬성파와,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모든 사람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반대파가 첨예하게 부딪혔다.
요컨대 반대 진영 역시 국기의 상징성, 그리고 이런 상징에 담긴 국가의 권위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1943년 버네트 판결에서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는 "운동체, 국가, 정당, 결사, 교회 등은 구성원의 충성심을 깃발이나 일정한 색깔, 문양에 연결시키려 한다. 국가의 상징은, 종교적 상징이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는 것처럼 정치사상을 전달한다. 이와 같은 상징에 대응하는 것이, 이들을 수용하고 혹은 경의를 표현하는 데 적절한 몸동작이다. 즉, 경례, 인사, 탈모, 무릎꿇기 등이다"고 판시했다. 국기의 상징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노마루' 게양 비난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지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나라가 많다. 일본은 최근 교육기본법 개정을 통해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군국주의로의 회귀'로 읽힐 수 있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한 주변국들, 그리고 일본 내의 진보세력 등은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급격한 우경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일본 정부는 별 흔들림이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다.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한국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이런 경우에는 한국의 보수 세력이 일본의 진보 세력을 강하게 지지했다. 평화, 생태, 평등, 민주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일본의 진보 인사들이 알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리고 '히노마루' 게양에 반발하는 이들이 '태극기에 대한 맹세'는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로 시작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에서 처음 시행됐다고 알려졌다. 그 뒤 1972년 문교부(현 교육부)가 전국 각급 학교에 암송 교육을 지시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에는 아예 각종 공식 행사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도록 규정한 법령이 제정됐다.

이렇게 해서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병영에서, 각종 행사장에서 반복됐고, 어지간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내용이 입에서 흘러나오게 됐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함께 관심 끌어…홍미영 의원 '삭제' 발의

이 과정에서 맹세를 거부하고 대신 처벌과 따돌림을 택한 이들도 많았다. 이유도 다양했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신앙이 이유였던 이들도 있었고, 국가주의를 반대하느라 맹세를 거부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가 거의 끝난 뒤였다. 20세기 내내 주변국의 팽창적 국가주의에 그토록 참혹한 피해를 겪었던 한국인들이 정작 내부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국기에 대한 맹세'는 2000년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가 여론화되고서야 논란이 됐다. 일부 시민 단체의 토론을 거쳐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홍미영 의원이 '국기에 대한 맹세' 규정을 삭제한 새로운 국기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국기법에서 삭제하는 대신 시행령에 위임하도록 합의했다. 그리고 행자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최종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즉 '국기에 대한 맹세'를 삭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지는 않은 것이다. 행자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치하되,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이왕 '미국 식' 따를 바엔…

최근의 한미FTA 체결 과정을 보며 "정부가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책을 추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국기에 대한 맹세' 논란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기계적으로 여론을 조사하기에 앞서 공론의 장에서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 온 이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FTA에 대한 여론이 주요 언론의 보도 태도에 따라 크게 출렁거렸던 것에서 드러난 것처럼 공론의 장에서 진행되는 치열한 토론 없이 수렴된 여론이란 대개 공허한 것이다.
아무튼 이같은 논란 속에서 한국 정부는 이제 한미FTA 협상 타결을 통해 '미국 식 사회'로 확실히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물론 숱한 반발을 묵살하고 취한 이런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접하면 국기(國旗), 그리고 국기가 상징하는 국가를 대하는 시민의 태도는 여전히 '일본 식'인 듯하다. 이왕 '미국 식 사회'로 길을 잡았으면, 국기에 대한 태도도 '미국 식'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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