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처럼 나부끼던 뉴욕의 뒷골목[이수연의 아트버스]<7>

▲조지 벨로스의 '20세기 초 뉴욕 르포'
뭉개진 얼굴 번들거리는 눈 비릿한 조소
절박한 현실 속 간절함 '샤키의 사내들'
서성이며 흘러다니는 도시뒷골목에 스며
배회하는 고된 삶 '낭떠러지의 거주자들'
솔직한 붓터치로 그린 욕망이 더 아프다
  • 등록 2022-06-03 오전 12:01:00

    수정 2022-06-03 오전 12:01:00

조지 벨로스의 ‘샤키의 사내들’(1909). 20세기 초 미국만의 도시풍경,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실주의적 전경을 화면에 끌어낸 애시캔화파의 중심화가 벨로스의 대표작이다. 유럽에서 주류를 이루던 ‘신화·영웅·권력자’ 등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뉴욕을 배경으로 노동자·이민자 등이 처한 현실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어두운 색조에 얹은 생동감 있고 거친 질감이 작품의 특징. 내기시합을 하던 현장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선수들은 물론,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의 얼굴들에 번들거리는 욕망까지 옮겨냈다. 캔버스에 유채, 92×122.6㎝,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007년 2월 영화 ‘록키’ 시리즈의 완결편인 ‘록키 발보아’가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서울 어느 영화관 앞줄에 앉아 사그라드는 록키 발보아의 마지막 불꽃을 보고 있었다. 당시 명절만 되면 지겹도록 봤던 여느 ‘록키’처럼 화면에는 땀과 열기, 약간의 핏자국, 또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지만, 정작 2007년의 록키는 늙고 지쳐 있었다. 링 위에서 비틀거리다가 일어난 얼굴과 몸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눈동자에는 젊은 헤비급 챔피언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단 경기를 버텨내겠다는 절박함만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링을 둘러싼 관중은 마지막 라운드까지 경기를 끌어가는 그를 향해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10여년도 더 지났지만 그날 받은 강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기고 지는 자가 분명치 않은 인생과 달리 스포츠는 명확히 승패가 갈린다. 그 순간의 절절함 때문에 스포츠는 때론 종교와 같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록키의 권투 장면은 마치 신을 향한 마음이 그렇듯, 인간의 가장 간절하고 솔직한 순간을 표현했기에 많은 이들의 가슴을 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둡고 어수선한 관중석을 배경으로 무대처럼 환한 시합장에서 휘청이는 권투선수들의 치열하면서도 애처로운 육체를 따라가는, ‘록키 발보아’가 만들어낸 효과적인 시네마토그래피 덕분에 바로 떠올려지는 그림이 있다. 미국작가 조지 벨로스(1882∼1925)의 ‘샤키의 사내들’(1909)이다.

인상주의에 반기든 애시캔화파…도시 영광 뒤 질퍽한 삶 묘사

‘샤키의 사내들’에서도 치열한 권투장면이 등장한다. 왼쪽 금발의 선수는 온힘을 다해 갈색머리 선수를 밀어붙이고, 갈색머리 선수 역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 링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두 선수의 몸은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을 내고 있다. 압력을 가한 다리와 배의 근육에선 푸르스름하게 도드라진 핏줄이 튀어나올 듯하며, 붉게 물든 채 일그러지고 뭉개진 얼굴과 목덜미는 경기에 속도감을 더한다. 화면 한가운데 우뚝 솟은 두 선수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어찌 보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록키 발보아’와는 달리 ‘샤키의 사내들’ 속에 등장한 선수들이 처한 상황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이들이 경기하는 장소는 여느 스포츠 링이 아니라 은퇴한 권투선수 톰 샤키(1873∼1953)가 운영하던 스포츠클럽이었던 것이다. 미국 뉴욕 66번가에 위치한 벨로스의 화실 건너편에 자리한 스포츠클럽이자 술집인 이곳은 당시 뉴욕에서 불법이던 싸움 도박을 회원제로 운영하던 곳이다. 덕분에 작품에서 되레 강렬한 것은 선수들을 둘러싼 관중의 얼굴이다. 번들거리는 욕망은 물론 선수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희미한 조소가 느껴지는 것이다. 화면 가장 앞쪽에 시가를 씹으며 뒤를 돌아보는 남자는 마치 화가를 의식한 듯 선수들을 가리키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비릿하게 웃고 있다. 링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 뚫어지게 선수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에는 술기운에 어린 호기심, 내기도박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조지 벨로스의 ‘샤키의 사내들’(1909) 부분. 권투로 내기시합을 하는 현장에서 링 위를 향한 관중의 시선을 클로즈업했다. 벨로스는 처절하게 싸우는 선수들은 물론,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의 얼굴들에 번들거리는 욕망까지 옮겨냈다.


대담한 색채와 구도, 짙은 명암으로 묘사한 이 드라마틱한 장면에 등장하는 현실적인 인물들에게서는 ‘록키 발보아’와는 다른 종류의 간절함이 흐른다. 이처럼 절박한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서 오는 간절함은 벨로스가 속한 ‘애시캔(Ashcan)화파’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애시캔화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뉴욕의 일상과 빈민지역을 그렸던 그룹으로, 재떨이를 뜻하는 ‘애시캔’은 벨로스가 재떨이를 뒤지는 세 명의 부랑자를 그린 드로잉에서 유래했다. 벨로스의 스승이기도 했던 로버트 헨라이와 존 슬론, 윌리엄 글락켄, 조지 럭스, 에버렛 신 등이 참여해, 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거친 도시의 삶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산업의 발전, 도시의 영광을 특색있게 반영하려 했던 여느 아방가르드사조와 달리 애시캔화파는 파업, 운동경기, 공연, 화재, 거리의 소란 등과 같은 근대의 일상을 사실 그대로 그리려 했다.

20세기 초반 뉴욕은 증기선과 철도, 공장의 시대였다. 자유의 여신상이 완공되고, 그랜드센트럴터미널과 펜실베이니아역이 운영을 시작했다. 동시에 이민자가 몰려들고, 범죄율이 상승하고, 빈민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 풍요로운 도시성장의 밑거름에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도시를 지탱하던 도시 노동자들의 삶이 있었다. 벨로스가 소재로 삼은 ‘샤키의 사내들’의 권투선수, 이들의 경기를 놓고 내기를 하는 군중은 모두 당시 뉴욕에 살던 도시노동자를 대표하던 인물들인 것이다.

이처럼 권투를 둘러싼 장면은 스포츠, 혹은 노동의 열정, 도박의 즐거움, 물질적인 성공, 명예를 향한 욕심이 범벅돼 당시 뉴욕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혼란의 와중에도 권투선수들의 정직한 싸움이 감동을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이 장면은 우표로 발행해 미국의 현대사에 고스란히 박제됐다.

벨로스가 그린 또 한 점의 그림 ‘낭떠러지의 거주자들’(1913)은 빈민들의 생활이 직접적으로 녹아든 도시풍경을 내보인다. 다채로운 색으로 더운 여름날의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 지역을 그린 작품은 푸른색-보라색, 녹색, 붉은색-주황색, 노란색-녹색으로 이어지는 색의 체계를 이용해 거리를 흘러다니는 군중을 구분해냈다. 이 시기 뉴욕은 급작스런 이민의 증가로 150만명이던 인구가 500만명까지 늘어났고 유대인과 동유럽계, 이탈리아계, 중국계, 아일랜드계가 섞여들어 브루클린다리, 하우스턴가, 바우어리 주변이 북적이던 시기였다.

조지 벨로스의 ‘낭떠러지의 거주자들’(1913). 미국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의 어느 해 여름, 더위를 피해 갑갑한 아파트건물에서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행태를 포착했다. 노동자·이민자가 모여사는 뉴욕의 뒷골목은 벨로스가 즐겨 화면에 담던 장소. 두툼한 물감으로 선명한 듯 흐릿하게 묘사한, 복잡하고 번잡한 풍경은 벨로스에게 ‘낭떠러지 혹은 절벽’(cliff)으로 표현할 만큼 위태로운 장소였다. 캔버스에 유채, 102×106.8㎝,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휘청이는 복서, 소란스러운 거리…예술은 현실이다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과 주거시설 정비가 인구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당시의 혼란스럽고 정신없던 상황을 벨로스는 색채의 덩어리로 묘사했다. 거리를 서성이며 배회하는 사람들, 땅바닥에 드러누운 남자들과 뛰어노는 아이들, 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허름한 옷의 노동자와 계단에 걸터앉은 여성 등, 그림에서는 인구과밀화가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리지어 흘러다니고, 이들의 고단한 삶은 부끄러움 없는 빨래가 돼 잿빛 하늘에 나부낀다.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사는 듯 위태로운 삶의 모습은 피가 튀기는 어떤 스포츠 장면보다도 거칠고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뉴욕은 빠른 발전을 겪으며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 빈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이민제한법이 제정되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할렘 르네상스가 번성했으며, 속속 등장한 마천루들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그러나 뉴욕의 성장과 함께 샤키의 술집,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20세기 초 뉴욕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자라난 메가시티가 세계 곳곳에 등장한 지금에도 도시 어딘가에는 샤키의 술집과 낭떠러지의 빈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도시에서 치열하고 절박한 삶의 모습과 마주칠 때마다 벨로스의 그림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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