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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남 의령의 친가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유년 시절에는 말수가 많지 않은 조용한 아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이 회장은 1966년 10월 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쳤다.
이 회장은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했다.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했는데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 세계 1위에 올라서는 등 성공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 회장의 혁신에 대한 욕심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 회장은 적극적인 혁신을 주문했다. 삼성전자 고문이던 일본 디자이너 출신 후쿠다 다미오의 ‘후쿠다 보고서’도 역할을 했다.
1988년 국내 최초 휴대전화 애니콜을 선보였던 삼성이지만 모토로라를 따라잡기 위해 생산량을 늘리는 데만 급급해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이 회장은 이에 격노해 15만대의 애니콜을 모두 불태웠다. 총 500억원 규모였다.
극단적인 질적 개혁을 추구한 이 회장의 강드라이브로 삼성전자는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디지안 혁명으로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 제고에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