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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56년 시인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됐다. 그때 썼던 필명인 김지헌으로 ‘자유결혼’(1958) 등 80편에 달하는 각본·각색 작업을 했다. 대표작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다. 수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이후 일본에서 ‘약속’(1972)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국내서는 1981년 김수용 감독이, 2010년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한일 영화계 거장인 김 작가와 모토후미 작가의 만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사 쇼치쿠(松竹) 프로듀서였던 다나카 고조가 두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다나카는 두 시나리오 작가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했다. 기획 단계에서 멈췄지만 1~2년에 한 번씩 서울과 도쿄에서 만남을 이어갔다. 일본어에 능한 고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다. 모토후미 작가는 영화로 제작되지 않은 고인의 시나리오까지 찾아볼 만큼 팬이 됐다.
도미카와 작가의 이야기를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카는 생전 고인을 아버지라 불렀다. 다나카는 고인과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가야금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했다. 영화사에서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이 소식을 전하던 다나카는 고인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위로해주던 고인은 “아버지가 돼주겠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고인이 묻힌 납골당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고 덧붙였다.
평소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이들은 고인의 소식을 한참 후에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모토후미 작가는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유족에게 방문을 알리는 것은 폐라고 생각해 경기 광주에 있는 납골당도 직접 수소문했다. 고인이 평소 즐겨가던 곳도 차례로 찾았다. 마지막 일정은 인사동 막걸리 집이었다. 그곳에서 세 사람은 고인을 추억하며 언젠가 다시 찾기로 약속했다. 국경, 나이를 뛰어넘는 영화인들의 훈훈한 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