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퀘어 외벽 타던 '걷는 사람'들…7년만에 삼청로 거닐다

국제갤러리 '줄리안 오피' 전
서울스퀘어 미디어파사드로 유명 작가
도시인 일상풍경 '걷는 사람'으로 압축
개인 개성보다 현대인 '익명성'에 주목
인공색 입힌 동물 윤곽뿐인 구조물 등
회화·조각·LED작업 등 31점 걸고 세워
  • 등록 2021-11-02 오전 3:30:00

    수정 2021-12-13 오전 10:53:30

줄리안 오피의 ‘낮 4’(Day 4·2021·왼쪽)와 ‘겨울 7’(Winter 7·2020).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 걸고 세운 작품 앞으로 한 관람객이 걸어가며 2021년 현대, 어느 한 도시 속 ‘걷는 사람’들 풍경을 완성했다. 작품에 세운 모델은 작가 오피가 영국 런던 작업실 앞을 지나던 인물들에서 찾아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해가 지고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나타났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따질 것 없이 하나둘 줄지어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앞만 바라본 채 걷고 또 걸었다. 때론 마주보기도 하고 때론 어깨가 스치기도 했지만 그들이 서로 ‘만남’을 갖는 건 본 적이 없다.

서울 중구 서울역 건너편. 서울스퀘어빌딩 23층 전체를 뒤덮는 ‘걷는 사람’들의 행렬은 이처럼 한동안 계속됐다. 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미디어파사드’였다. 빌딩을 캔버스 삼아, ‘걷는 사람’들을 조명처럼 박아넣은 장면의 타이틀은 ‘군중’(Crowd). 영국 팝아트작가 줄리안 오피(63)의 작품이었다. 차가운 길 위에서 스치듯 만나고 지나치듯 헤어지는 수많은 도시인이 겪는 일상의 풍경을 ‘걷는 사람’(Walker)으로 압축해낸 거였다. 2009년 ‘군중’으로 서울스퀘어빌딩 외벽을 처음 걸었던 ‘걷는 사람’은 2019년 ‘걷고 있는 사람들’(Walking People)로 외벽에 다시 돌아와 또 걸었더랬다.

그 10년 사이 ‘그들’은 작가 오피의 홈그라운드인 영국 런던을 비롯해 유럽·호주·중국 등 세계를 쏘다녔고, 한국에서도 이곳저곳을 걸으며 존재감을 알렸더랬다. 서울·부산·대구·전남 등에는 고정작품으로 영구히 남아 ‘현지인’이 되기도 했다. 오피의 개인전에 나선 것도 여러 차례였다. 2014년 서울 국제갤러리를 시작으로, 2017년 경기 수원시립미술관, 2018년 부산 F1963 등을 거치며 변화해가는 작가의 생각을, 철학을, 기법을 집중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던 거다.

줄리안 오피의 ‘겨울밤 2’(Winter Night 2·2021). ‘걷는 사람’들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좀더 간결해진 형체, 좀더 톤 다운된 색채를 입은 것. 모자와 외투로 몸을 감춘 이들이 어두운 배경 속을 걷고 있다는 사실 외에 드러낸 건 역시 별로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더 단순하게 압축한 현대인…닭·소 등과 기꺼이 동행도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오랜만에 ‘걷는 사람’이 떴다는 소식에 찾아간 전시장에선 그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관람객이 더 바쁘게 보였다. ‘줄리안 오피’ 전이란 테마로 연 전시는 작가 오피가 국제갤러리에서 7년 만에 다시 여는 개인전이다. 입체감 물씬 풍기는 회화를 비롯해, 평면에 있던 그들을 밖으로 빼낸 조각, 움직이는 몸짓 그대로를 역동적으로 잡아낸 LED 작업 등 신작 31점을 내보였다.

‘걷는 사람’들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좀더 간결해진 형체, 좀더 톤 다운된 색채를 입은 것이라고 할까. 빼낼 만큼 다 빼내고 진짜 윤곽으로 남긴 사람들은 여전히 바삐 어디론가를 향해 걷는 중이다. 다만 연작 ‘겨울’(2020)을 비롯해 ‘밤시간’(2021), ‘낮시간’(2021), ‘긴 머리’(2021) 등 제각각의 타이틀이 예전과 다른 시절이란 것을 암시하는데. 오피가 팬데믹으로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내다본 바깥 풍경에서 “겨울 코트로 무장한 사람들이 길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골라 모델로 삼았다는 거다.

줄리안 오피의 ‘소 1’(Cow 1·2020). ‘줄리안 오피’ 전을 위해 함께 나선 동물들 중 하나. ‘인공적’이고 ‘산업적’인 색을 씌워 그저 단순한 ‘동물’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피의 이번 외출이 특별한 건 먼 여행에 동반한 ‘어떤 대상’들 덕이기도 하다. 바로 동물들을 대거 옮겨온 건데. 닭, 소, 강아지, 사슴, 고양이, 당나귀 등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동물들을 예의 그 간결한 형체, 축약한 상징으로 제작해 평면으로 걸고 입체로 세워뒀다. ‘걷는 사람’들과 차이점이라면 ‘원색의 색감’이라 할 터. 자연색을 배제한 채 ‘인공적’이고 ‘산업적’인 색을 씌워 그저 단순한 ‘동물의 왕국’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특별한 게 또 있다. 골격으로 윤곽만 잡아낸 ‘구조물’까지 세웠다는 거다. 도시의 길을 오가는 사람들 곁에 들어선 건축물이 그것인데, 한마디로 “축약한 가상도시를 꾸며낸 것”이란 설명이다. 런던 시가지 건물에서 따와 제작했다는, 4m를 훌쩍 넘기는 두 점의 건축물은 그간 사람 혹은 동물에 머물던 오피의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알루미늄 골조의 큼직한 덩어리’ 만큼이라고 할까.

줄리안 오피의 ‘소 2’(Cow 2·2020·왼쪽)와 ‘따오기 1’(Ibis 1·2020). ‘줄리안 오피’ 전을 위해 함께 나선 동물들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동물들을 예의 그 간결한 형체, 축약한 상징으로 제작해 평면으로 걸고 입체로 세워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집요한 관찰이 빚어낸 간결한 현실

오피가 창조해낸 인물은 익명성에 올라타 있다. 픽토그램(Pictogram·사물과 시설, 행태와 개념 등을 상징한 그림문자)처럼 대단히 미니멀한 형태로만 존재해온 그들은 눈·코·입·귀가 지워진 채 굵은 선으로 쓱쓱 그려 완성된 누군가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 번이라도 그들을 봤다면 그 강한 잔상을 쉽게 지울 순 없다. 복잡하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그대로 눈에 ‘꽂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걷는 사람’들 역시 각자의 개성을 살린 ‘외모’가 돋보이기도 했다. 7년 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비 오는 사당동에서 걷기’(Walking in Sadandong in the Rain·2014)가 비교적 그 친절했던 묘사였다고 할까. 전시를 여는 도시의 상징을 작품에 담는 것을 즐긴 오피가 서울의 사당동에서 포착했다는 장면은 이랬다. 양복정장을 차려입고 안경까지 쓴 남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백팩을 메고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학생, 머리를 뒤로 묶은 붉은 원피스의 여인 등등. 양 방향으로 교차하며 걷고 있던 그들은, 누가 누군지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했던 거다. 옷차림은 물론 손목에 찬 시계, 들고 있는 우산까지 ‘도드라진 인물’로 말이다.

줄리안 오피의 ‘비 오는 사당동에서 걷기’(Walking in Sadandong in the Rain·2014). 7년 전인 2014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 걸었던 작품이다. 이번 개인전 전시작과는 확연히 다른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익명성에 숨었지만 대부분 드러난 개인의 개성이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은 작품이다(사진=국제갤러리).


그러던 작가의 인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단순한 외형으로 ‘진화’한 채 오로지 ‘걷는다’는 행위에만 충실하고 있는데.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우울한지 즐거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중요한 의도가 읽힌다. ‘세상이 이처럼 바뀌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눈·코·입·귀가 가진 구별, 알록달록한 차림이 가진 개성 따윈 그다지 고려할 대상이 아닌, 거대한 덩어리의 행위만 살아남는 세상.

하지만 어떻게 추려내도, 또 어디에 내놔도 오피의 작품은 선명하다. “상상 속 인물로 작업하지 않는다”는 작업철학 덕분이다. 그 핵심에는 정직한 눈으로 바라본 ‘관찰’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모두 그이의 눈에 박힌 구체적 실존 인물이거나 고대와 첨단을 넘나들며 파낸 실제 현상이라니. 이집트 상형문자, 일본의 목판화, 교통표지판, 공항 LED 전광판까지 오피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형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여전히 세계의 길을 누비고 있는 수많은 ‘걷는 사람’, 그 곁에 놓인 일상의 풍경까지 어느 하나도 허투루 태어나진 않았다는 뜻이다. 전시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 연 ‘줄리안 오피’ 전 전경. 왼쪽부터 ‘도시 1’(City 1·2021), ‘8월의 오래된 거리 6’(Old Street August 6·2020), ‘가방 두 개, 모피 후드’(Two Bags Fur hood·2021). 런던 시가지 건물에서 따와 제작했다는 4m를 넘기는 ‘도시 1’을 중심으로 ‘축약한 가상도시’를 만들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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