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바이오 기업이 땅을 친 까닭은…

"차라리 北海의 유전을 내주지… 이 알짜 子회사를 팔다니"
세계적 항암백신 회사 ''젬백스'' 인수한 김상재씨
2008년 금융위기때 헐값에 사들여 췌장암 백신 개발 임상시험 순항 중
덴마크 회사 주주들, 경영진에 소송
  • 등록 2010-01-09 오전 9:56:42

    수정 2010-01-09 오전 9:56:42

[조선일보 제공] "북해(北海)의 유전(油田)을 노르웨이에 내주는 것보다 더 심한 짓을 했다."

최근 덴마크의 법정(法廷)에서 오갔던 성토(聲討)다. 한국과 관련된 이 사연은 200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한국 중소기업이 노르웨이에 있는 바이오기업의 지분 100%를 인수했다.

원래 이 회사는 덴마크 생명공학회사 소유였다. 노르웨이 바이오기업의 새 주인이 된 한국회사는 유해가스·오염물질 제거용 흡착제와 산업용 필터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10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엘리자베스 블랙번(UCSF)·캐럴 그리더(존스홉킨스의대)·잭 쇼스택(하버드의대) 교수가 선정됐다. 그러자 한국에 노르웨이 바이오기업을 판 덴마크 생명공학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왜 그랬을까. 지난해 세 명의 교수가 노벨상을 탄 것은 인간 염색체 끝 부분에 있는 '텔로미어(telomere)'가 어떻게 생기고 무슨 기능을 하는지를 밝혀낸 공로 때문이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모자처럼 붙어 있으며 유전자 손상을 막는 역할을 한다. 세포가 분열할수록 텔로미어는 점점 짧아진다. 바꿔 말하면 텔로미어 길이를 보면 세포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텔로미어를 '생체 타이머(timer)'로 비유하기도 한다. 세포가 더 이상 분열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노화 단계에 접어들면 텔로미어도 최대한도로 짧아지고, 결국 함께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암세포는 계속 분열해도 텔로미어 길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암세포에 있는 무슨 성분이 텔로미어를 줄어들지 않게 하는 걸까. 바로 '텔로머라제(telomerase)'라는 효소다. 즉 텔로머라제의 기능을 막아버리면 텔로미어 길이가 정상적으로 줄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암세포의 증식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덴마크 생명공학회사 내부가 들썩인 까닭은 자신이 갖고 있다 한국에 넘긴 젬백스(GemVax)사가 바로 위와 같은 작용원리를 이용한 항암백신을 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젬백스가 개발한 항암백신은 수술이나 항암제를 이용한 기존의 암 치료와 다르다. 인체에서 활동하는 비(非) 정상적인 텔로머라제만 표적으로 삼는다. 암세포만 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젬백스의 항암백신 GV1001은 이미 췌장암·간암·폐암 등에 관한 동물실험, 독성실험 등을 끝냈다. 암 중에서도 특히 치료가 까다로운 췌장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2상 단계에서는 수명을 평균 8.6개월 연장했다고 한다. 환자 수를 1100여명으로 늘려 백신의 효능과 부작용을 점검하는 임상3상 단계가 현재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췌장암에선 미국을 비롯한 다른 경쟁사보다 몇단계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이 췌장암 백신은 2011년 이후 상용화된다.

이 회사를 한국에 넘긴 덴마크 생명공학회사에선 주주들이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다. "웬만한 유전보다 더 가치 있는 알짜 기업을 헐값에 팔아 회사에 손해를 줬다"는 이유에서다.

얼마에 팔았기에 이런 분쟁이 일어난 걸까. 한국의 회사는 당시 약 1000만달러에 지분 100%를 인수했다. 요즘 가치로 따지면 헐값이나 다름 없지만 금융위기가 세계를 휩쓸던 당시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에 세계적인 항암백신개발회사를 안긴 셈이 됐다. 노르웨이 회사 젬백스를 사들였던 덴마크 회사는 처음엔 한국기업의 인수제안을 거절했다가 금융위기 때문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치료용 암 백신에 대한 세계시장 규모는 2012년 84억달러(약 9조5000여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관련업계는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알짜회사를 사들인 국내 기업은 어떤 곳일까. 더구나 생명공학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산업용 필터 등을 만드는 곳인데 어떻게 항암 백신에 눈을 돌렸을까. 회사 대표의 면면을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김상재(44) 대표는 원래 의사였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세포 생리학을 전공한 그는 모교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1992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척추 신경의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딴 뒤 귀국해 병원을 차렸다. 소아척추신경 분야로 특화한 그의 병원은 척추 측만증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으로 환자가 끊이지 않았다. 2002년 줄기세포에서 신경세포를 만들어냈다는 선배를 만난 그는 이듬해 줄기세포 추출·보관회사를 차렸다.

바이오 벤처기업인으로서 그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골반 뼈를 뚫어 줄기세포를 추출해야 한다는 점이 호응을 얻지 못해 1년 만에 회사를 접었다. 2년 후 일반 혈액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방법을 찾아내 재기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때도 황우석 박사 파동에 휩쓸려 줄기세포 관련 산업 전체가 가라앉았다.

김 대표가 젬백스를 알게 된 계기는 재작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2003년 간암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 치료를 위해 사방으로 항암백신과 치료제를 물색하다 젬백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젬백스를 선물로 주셨다고 주위에서들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덴마크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북해의 새 유전을 차지한 것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내년에 끝날 임상3상 단계의 결과에 달려있다. 현재까지 600여명에 대한 임상시험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남은 500여명에 대한 임상시험을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가 과제다. 젬백스는 임상시험 중이거나 판매허가가 아직 나지 않은 '시판 전 의약품'을 환자에게 공급해주고 있는 영국 회사에 백신 GV1001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전 세계 암 환자들로부터 약의 효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렇다고 공급계약이 곧 약의 신뢰도를 보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후 매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면 시장 선점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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