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살다보면 '챙'하고 울릴 날 돌아온다"

신작 '챙!' 내놓은 원로작가 이강백
교향악단 심벌즈 연주자 통해 삶의 의미 던져
임영웅 연출과 작업…연극계 거목의 만남
44년 주목 받은 작가의 비결은 '성실'
  • 등록 2014-05-26 오전 7:05:00

    수정 2014-05-26 오전 7:05:00

이강백 작가는 유쾌하다. 연극 ‘챙!’에서도 곳곳에 웃음이 터진다. 한 남자 관객에게 함석진의 장모 역을 맡겨 무대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직접 심벌즈도 치게 한다. 다만 글 앞에서는 엄격하다. 이 작가가 대학 강단에 섰을 때 졸업학기가 된 학생들에게 꼭 했던 말이 있다. “애인을 만들지 마라.”(사진=김정욱 기자 98luke@)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1997년 11월 19일. “이리떼가 나타났다.” 세상이 숨죽이는 수능 1교시 언어영역 듣기평가 시간. 소년과 촌장이 객관적 사실의 은폐를 놓고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 전국 중·고등학교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희곡 ‘파수꾼’ 얘기다. 작가는 이강백(67). ‘파수꾼’ 외에도 그의 ‘결혼’ ‘들판에서’ 등이 교과서에 실렸다.

고희를 앞둔 작가가 새 얘기를 들고 왔다. 교향악단 심벌즈 연주자의 삶을 다룬 연극 ‘챙!’(6월 9일까지 산울림소극장)이다. “새 작품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했을 때” 쓴 작품이라고 했다. 지난해 2월 서울예대 극작과 교수직에서 퇴임한 이 작가는 “어서 빨리 정년이 오길 기다렸다”며 웃었다. “10년 동안 강단에 서다 보니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신작의 소재가 특이하다. 왜 심벌즈일까. 물었더니 독일 유학 때의 얘기를 꺼냈다. 1987년 우리나라 광부들이 많이 갔던 보훔으로 독일어를 배우러 갔을 때다. “5층짜리 허름한 어학원 기숙사에 묵었다. 어느날 터키에서 온 음대생이 기숙사에서 심벌즈를 쳐대자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정말 시끄러웠거든. 그런데 그 학생은 사람들의 박대를 받고도 악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더라. 연주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심벌즈는 대접받는 악기가 아니다. 대부분 침묵한다. 교향곡에서도 소리 한 번 안 나올 때가 있다. 연극 속 대사처럼 ‘무당이 굿할 때 치는 바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 작가는 그런 악기 심벌즈가 던지는 철학적 의미를 길어 올렸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절정의 순간 ‘챙’ 울리는 게 심벌즈다. 그게 참 멋있더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오케스트라와 닮았다. 당신은 어떤 악기인가. “난 심벌즈라면 좋겠다”는 이 작가는 관객에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연극은 극중 오케스트라 심벌즈 연주자인 함석진이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뒤 그의 아내와 지휘자가 나누는 대화를 차분하게 풀어낸다. 파탄과 갈등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다. 마치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한 슬픔을 위로하듯 따뜻하다. ‘인생의 멘토를 만난 것 같다’ ‘추억하며 아프지 않게 떠나보내는 법을 알려줬다’ 등의 평이 많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오랜만에 착한 걸 봐 즐기는 것 같다. 또 요즘 관객들이 워낙 웃는 연극에 질려 조용하게 생각하게 하는 연극을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작가는 극단 산울림 대표인 임영웅(78) 연출과 ‘챙!’ 소리를 냈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두 거목의 만남이다. 서로 ‘믿고 가는’ 사이다. ‘주라기 사람들’(1982), ‘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1987), ‘자살에 관하여’(1994) 등의 작업을 통해 여러 번 호흡을 맞춘 덕이다. 알고 보니 친해진 계기는 따로 있다. “내가 다녔던 직장 그만두고 전업작가 선언을 했을 때다. ‘유료관객 입장료 5%를 작품료로 받겠다’고 했다. 방자했지(웃음). 그때 들어온 돈이 얼마 안 됐다. 이거 갖고 어떻게 먹고 사나 싶더라. 술도 못 마시는데 잔뜩 마시고 홧김에 ‘산울림서 공연하면 성을 갈겠다’고 했다. 객기를 부린 거지. 몇년 지나 임 선생이 ‘산울림서 공연하면 성 간다고 했다며?’라고 그때 일을 기억해내곤 웃더라.”

‘대한민국문학상’(1986)에서부터 서울연극제 희곡상(1989)까지. 1971년 신춘문예에 희곡 ‘다섯’으로 등단해 44년 동안 주목받는 작가로 살아온 비결은 성실함이다. 이 작가는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영감이 작가를 만드는 건 아니란다. “글은 근육이 쓰는 거다. 그만큼 습관이 돼야 한다”는 이 작가는 아직도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책상 앞에 앉는다. “머리가 좋아서 작가가 아니다. 약간 멍청해야 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처마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갯돌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노 작가는 지난해만 세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한국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데 주력해온 그가 ‘챙!’에선 차분히 삶을 돌아본다. 다음은 뭘까. “‘즐거운 복희’다. 서늘한 반전을 볼 수 있을 게다. 하하하.”

연극 ‘챙!’의 한 장면(사진=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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