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간판·아파트까지 외국어 천지…노년층 ‘新문맹’ 우려

[576돌 한글날…우리말·글 현주소]②
경비실·경로당 놔두고…인포메이션·시니어라운지
옥외간판 병기도 안 지켜져
“강제보단 시민 자발적 노력 필요”
  • 등록 2022-10-07 오전 6:00:00

    수정 2022-10-07 오전 9:02:23

[이데일리 황병서 기자] “솔드아웃? 뭔 말인지 알아야 누르든가 말든가 하지. 답답하네.”

개천절 연휴 가족들과 카페를 찾은 황모(70·남)씨는 키오스크(무인 주문기)를 눌러대는 자녀 뒤에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다루는 데에도 서툴지만 ‘솔드아웃’, ‘베버리지’, ‘더블샷’과 같은 외국어를 이해하지 못해 선뜻 나서지 못했다고 했다. 황씨는 “까막눈이라 도통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생활 속에서 넘쳐난다”며 “자식 없으면 음료수도 주문 못할 처지가 됐다”고 씁쓸히 웃었다.

서울 한 유명 카페에서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하며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사진=트위터 갈무리)


한국인의 기본 문맹률은 1% 수준이라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알아도 황씨 같은 이들은 일상생활이 불편하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가 일상 속 깊숙이 침투한 까닭이다. 외국어 사용이 과도하게 이뤄지면서 외국어 이해도가 젊은층보다 낮은 노인층은 소외·불편이 커지고 있다.

당장 아파트 이름부터 외국어 천지다. 시공능력 평가 상위 50위 내 건설사 중 주거 단지 이름에 우리말만 사용하는 건설사는 단 한 곳도 없다. 아파트 이름에 순우리말 상표를 사용해왔던 코오롱건설(하늘채)과 한화건설(꿈에그린)도 각각 ‘더 프라우’, ‘포레나’로 대체됐다. 외국어로 된 긴 아파트이름이 유행하면서 “시어머니는 헷갈려 못 찾아온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주민 공동시설에서도 영어 표기가 야금야금 늘고 있다. 아파트 경비실은 ‘인포메이션’으로, 쓰레기 분리 배출장은 ‘리사이클’, 경로당은 ‘시니어 라운지’로 바뀌는 식이다.

집 밖을 나서도 외국어 일색이다. 카페의 메뉴, 가게들의 간판, 기업들의 이름 등이 그렇다. 최근 SNS(사회 연결망 서비스)에선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한 카페 메뉴판이 논란이 됐다. “신선한 아이디어”란 반응도 있었지만, “이건 젊은이도 못 알아본다” “영어라고 무조건 좋아 보이나”는 지적도 많았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상 간판 등 옥외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외국 문자로 표시할 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을 적고 그 옆에 외국어를 같이 써야 하지만 이런 간판은 드물다. 한글문화연대가 2019년 12개 자치구 7252개 간판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외국어 간판은 1704개로 23.5%를 차지했고, 한글과 외국어를 병기한 간판은 1102개(15.2%)에 불과했다. 서울 강서구 김모(72)씨는 “ABC는 배웠지만 다 까먹었으니 뭐라고 읽는지 모른다”며 “간판이 외국어로 쓰여진 가게엔 들어가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외국어 남용의 이유는 뭘까. 국립국어원이 2020년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외래어·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유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41.2%),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 있어 보여서’(22.9%), ‘우리말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기 때문’(15.7%)으로 꼽혔다.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쓴단 이들이 적지 않은 셈이다.

서현정 세종국어문화원 선임연구원은 “정부 정책, 사업까지 외국어가 남용된 사례들이 많은데 시민들이 문제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홈트’를 ‘집콕운동’으로 바꿔 부르는 식의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노력으로 국민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2020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자료=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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