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프리즘]검찰을 발전시키는 '축적의 시간'

법무법인 바른 조재빈 변호사
  • 등록 2023-05-25 오전 6:20:00

    수정 2023-05-25 오전 6:20:00

법무법인 바른 조재빈 변호사.
[조재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검찰에는 인재가 많다. 특수, 공안, 강력 등 분야별로 뛰어난 검사들이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검찰 조직에는 그런 검사들의 경험과 역량이 제대로 축적되거나 공유되지 않는다. 경쟁도 치열하고 민감한 내용이라 보안이 요구되는 탓이다. 조직이 발전하려면 경험의 축적과 공유는 필수적이다.

필자는 초임검사 시절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출신 수석검사와 함께 근무한 행운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행운이 오지는 않는다. 당시 ‘누구나 뛰어난 검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수사경험을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형사부 검사 시절에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검사실에 앉아서 여권위조조직 인지하는 방법’, ‘검사실에 앉아서 도박단 인지하는 방법’, ‘검사실에 앉아서 선불금 사기단 인지하는 방법’ 등을 게재했다. 한때 ‘앉아서’ 시리즈로 인기를 끌만큼 조직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고도의 수사기법을 배울 기회는 주요사건 수사팀에 발탁되거나 선배들의 술자리에 동석해 귀동냥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소수 검사만 그런 혜택을 누렸다. 세월이 흘러 공인전문검사제도가 도입되고 업무 분야별로 전문 검사 커뮤니티가 만들어졌지만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사를 어떻게 진행했고,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공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유죄판결을 이끌어 냈는지 알려주는 시스템은 부족했다. 그러니 선배 검사의 유용한 수사 경험도 파편적으로 전달될 뿐이었다.

2018년 법무연수원 용인분원에서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 이 부분을 시스템적으로 보완하고자 애썼다. 초임과 저년차 검사 시절에 수사한 사례를 선별해 PPT 수백 장의 강의안을 만들었다. 강의안만 보면 누구나 유사한 사건을 잘 수사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송치사건 수사방법(1강), 변사·진정사건 수사방법(2강), 살인사건 수사방법(3강)을 3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10시간 분량의 강의를 기회가 날 때마다 강행했다. 법무연수원 7·8기 제자들에게는 직강했고, e-PROS(검찰 내부망)에 게재해 누구든 공유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또한, 10개 유형의 사건을 선별한 다음 조서, 수사보고서, 영장청구서, 의견서, 정보보고, 보도자료, 공소장, 공판 관련 서류 등 모든 양식을 정리한 ‘놀라운 검사 Project’ 파일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배포했다. 수사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 수 있는 자료를 공유해 수시로 참조할 수 있도록 했다. 필자가 제공한 자료를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제자들의 연락을 받을 때면 큰 보람을 느꼈다.

2020년 부산·인천지검의 제1차장검사로 근무하면서 이를 더 보완하고자 힘썼다. 차장 검사는 검사 수십 명이 처리하는 주요한 사건을 보고받고 결재하는 자리다. 70년간 축적된 검찰의 역량이 필자와 검사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공소장, 불기소장 등의 형식으로 국민에게 전달됐다. 부족하지만 필자가 매월 결재한 내용을 검찰 조직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건을 결재한 내용을 정리해 매월 초 필자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딴 ‘Bin’s Talk’라는 이름으로 검사들에게 배포했다. 공소장, 불기소장, 압수물 처분, 압수수색 영장, 보도자료 및 정보보고, 실체관계 규명을 위한 다양한 지도 내용을 담았다. 2년 동안 거의 매월 작성한 자료를 전국 검찰청의 제자들에게 배포했다.

지난해 6월 사직의 글을 e-PROS에 올리면서 ‘Bin’s Talk’를 첨부했다. 23년 동안 지속됐던 검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순간에도 경험의 축적과 공유를 잊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검사들이 그 일들을 계속할 것으로 믿는다. 형사 사법의 환경은 늘 만만치 않다. 많은 뛰어난 검사들이 축적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검찰 조직 역량이 강화되고, 이로써 국민을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이부진, 장미란과 '호호'
  • 그림 같은 티샷
  • 홈런 신기록
  • 꼼짝 마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