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는 이같은 한 남성 정치인의 연설로 시작한다. 지금으로선 선동적으로 들리지만, 당시 대개 시민들의 인식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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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세계 최초로 뉴질랜드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건 120여년 정도 됐다. 미국에서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건 50여년 전이다. 심지어 영국에서 처음으로 평민 남성들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것도 불과 140년 전 일이다. 참정권은 헌법 상 부여된 신성한 권리이지만, 역사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참정권을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절한 투쟁으로 쟁취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18세 청소년들의 참정권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지난 1992년 대선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측 고교생 활동가들이 처음 선거연령 하향을 의제로 던진 이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까지 무려 20여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어려서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어`라거나 `학생이 무슨 정치냐`는 폄훼와 `젊은 친구들이 표를 던지면 우리에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하는 계산속이 저 1910년대 영국에서처럼 청소년들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깔아 뭉개왔던 셈이다.
전체 유권자 중 1.2%뿐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일부 소수야당이 내세운 그루밍 성폭력 방지법이나 학생 인권법 제정 공약을 빼고 나면 학교와 지역사회에서의 청소년을 타깃으로 한 차별화된 공약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의외다. 집권여당과 제1야당은 대학입시에서의 정시 모집 확대라는 약속 하나 던지는 것만으로 청소년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생애 첫 투표인데도 청소년에 대한 사전 선거교육도 사실상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정당이나 이념을 떠나 청렴함과 신뢰성, 정직함 등 후보들이 지닌 인물됨과 그들이 내건 공약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일관되게 답하고 있는데도, 학교를 이념 선전의 장으로 악용하려는 어른들의 욕심이 되레 학교 내 정치와 선거교육 부재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이념과 지역감정과 같은 낡은 정치를 벗어버릴 수 있는 첫 세대인 청소년들이 만들어낼 선거혁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