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사겠다 줄선 미국 투자자…거물도 참전
스팩은 미국에서 ‘백지수표(Blank check)’ 기업이라고 불립니다. 스팩은 인수합병(M&A)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페이퍼컴퍼니인데요, 주식시장에 상장돼 모은 자금으로는 상장 뒤 3년 안에 기업을 인수해야 합니다. 이 때 스팩은 어디에 투자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상장돼 돈부터 모읍니다. 일종의 블라인드 펀드 개념으로, 백지수표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스팩 주식을 사면서 M&A에 투자할 수 있고요, 만약 3년 안에 스팩이 기업을 인수하지 못하면 펀드가 청산돼 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팩 상장이 요즘 잇따르고 있습니다. 1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해 스팩을 통해 기업공개(IPO)를 한 회사는 20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수소트럭 업체로 최근 주가가 급등한 니콜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 스포츠게임회사인 드래프트킹스(Draftkings) 역시 올해 스팩을 통해 증시에 데뷔했죠.
이런 선전에 월가의 거물들도 스팩 시장에 참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헤지펀드의 거물이자 행동주의 투자자로 유명한 빌 애크만입니다. 그는 곧 스팩회사를 하나 상장시킬 예정인데, 이를 통해 30억달러(3조 6000억원)를 조달할 계획입니다. 스팩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장이 될 전망이죠. 그는 IPO 보고서를 통해 어느정도 현금 흐름이 창출되면서 사업 규모가 큰 성숙한 유니콘(Mature Unicorns) 기업을 M&A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코로나에 늘어난 스팩합병…정점 징후일까
사실 스팩 시장이 쑥쑥 크는 이유를 보면 그리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전통적인 방식의 IPO가 어려워진 탓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IPO는 착수부터 실제 상장에 이르기까지 2~3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이 기간 혹독한 평가를 거치게 되죠. 버는 돈이 이만큼밖에 안되니 공모가는 이정도만 받아야 한다든지 등등…. 심지어 시장이 폭락해 있거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라면 평가는 더욱 박해집니다. 장이 안좋은 상황에서 공모가를 높이면 투자자들의 매력을 끌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데 코로나19가 닥치면서 상장 예정 기업들에 대한 평가 잣대가 더욱 까탈스러워졌고, 많은 기업들은 일반적인 IPO 절차를 포기하고 스팩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상장돼 있는 스팩과 M&A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상장할 수 있는 데다, 이런 과정에서 혹독한 평가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니콜라가 창사 이래 5년 간 차를 단 한 대도 팔지 못하며 만년 적자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증시에 단숨에 데뷔해 한때 포드 시총까지 넘볼 수 있었던 이유죠.
한국에서도 스팩 합병을 통해 증시에 진출하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올해 코스피·코스닥 신규 상장 기업(스팩 제외)은 총 23곳인데, 이중 스팩합병으로 상장한 기업이 6곳입니다. 지난해엔 88곳이 상장, 이중 11곳이 스팩합병을 통해 증시에 입성했습니다. 즉 코로나19에 신규상장 기업 자체는 대폭 감소했지만, 스팩합병만큼은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스팩합병 상장의 이면을 잘 뜯어보고 투자 가치를 면밀히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