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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아이, 씨X.” 국민엄마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나도 내 마음대로 말할 권리가 있다고.”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 세워 ‘손가락욕’도 했다.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무대. 배우 김혜자(72)의 얼굴에 익살이 돌았다. 골수암에 걸린 10세 소년에서 아이를 돌보는 간호사 장미할머니까지 1인 11역이다. 노배우의 얼굴이 11개의 초상화가 됐다. “처음엔 죽는 줄 알았다.” 김혜자가 쏟아내야 하는 대사만 A4 43장 분량이다. 무대를 오가며 왈츠도 추고 아이처럼 노는 것도 쉽지 않다.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여기에 우리 인생이 다 있어서”다.
“10년 전에 이 작품 하자는 제의가 왔을 때는 별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데 이번에 다시 대본을 받았을 때 ‘이건 내가 해야 해’ 싶더라. 대본 보면서 ‘아 그래. 삶이란 이런 거야’란 생각도 많이 했고. ‘삶이 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걸까’ ‘알지도 못하면서 왜 두려워하지?’ 같은 고민을 소년 등의 입을 통해 돌아보는 게 흥미로웠다.”
연극 ‘다우트’ 이후 6년 만의 무대 복귀다. 그간 드라마와 영화 외출도 뜸했다. 자상함 뒤에 숨겨진 광기를 보여준 영화 ‘마더’(2009) 이후 출연한 작품이라곤 시트콤 한 편(‘청담동 살아요’)이 전부다. 김혜자는 “해가 지날수록 작품 고르기가 어렵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다. 김혜자는 “여기서 제대로란 말이 중요하다. 작품 선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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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드라마 ‘전원일기’ 출연 후 30년 넘게 ‘국민엄마’로 불렸다. 훈장 같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배우로서는 좋지만 엄마로서는 내가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싶다. 누군가 어떤 자리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주위의 헌신이 필요하잖나. 난 연기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남편과 자식에게는 미안했고.”
알고 보면 속에 불이 있다. 무던해 보이지만 일할 때면 불이 붙는다. 김혜자는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소품 팀이 준비해 온 인형 눈을 떼 달라고 했다. 원작에 ‘눈코 입이 다 떨어졌다’고 나왔는데 말끔한 새 인형이라 통일성이 흐트러진단다. 그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우리나나 경제학박사 2호이자 미 군정 때 재무부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책임감을 새기며 자라왔다. 50년 넘게 큰 탈 없이 연기활동을 이어온 비결이다. “젊어서는 실수해도 괜찮지. 웃으면서 넘겨줄 수 있으니. 하지만 난 이제 실수하면 안 될 나이지 않나.”
22년 동안 양촌리 김 회장댁 부인으로 살다 가출(드라마 ‘엄마가 뿔났다’)했고 살인(영화 ’마더‘)까지 했다. “바로 이 맛이야.” 27년 동안 조미료 광고 속에서 포근함을 속삭였던 배우의 그 다음은 뭘까. “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정해진 답이 어딨나. 나한테는 그게 답이다. 대본에 ’처음 느낌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란 말이 있다.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12월29일까지 서울 영등포동 타임스퀘어 CGV신한카드아트홀, 1588-0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