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 우리에게는 일곱 색이지만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귤이 바다를 건너 탱자가 되는 ‘귤화위지(橘化爲枳)’와 같은 이치다. 유럽은 5색(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영어권은 6색(남색 제외), 아프리카는 2색(검정과 빨강)이다. 오행사상을 바탕에 둔 우리도 이전에는 5색이었다. ‘목화토금수’를 상징하는 오방색을 표현했다. 화려한 빛깔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오색찬란하다”는 그 흔적이다.
우리정치에 대입해보자. 일상에서 접하는 정치지형은 우편향에 가깝다.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겉보기엔 진보에서 보수까지 펼쳐 있지만 실상은 오른쪽에 몰려 있다”고 했다. 제대로 된 진보 세력 없는 극우보수 과두지배라고 규정했다. 우리정치가 시끄러운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쪽으로 치우친 데다 극단화돼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 인정하고 보듬는 대신 배척하고 밀치는 데 익숙하다.
나만 옳다는, 우리만 정의라는 독선이 지배한다. 극단적인 진보, 극단적인 보수가 판치고 있다. 정의를 독점할 때 정상적인 대화는 끊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 반목도 여기에 있다. 서로 인정하지 않은 채 척결 대상으로 여긴다. 정치보복 악순환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 그는 수정 헌법에서 극단을 배격했다. 대신 견제와 균형 원리를 담았다. 덕분에 미국 민주주의는 200년 넘는 세월을 지탱해왔다. 관용과 절제는 핵심 덕목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저자는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관용과 이해,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는 미국 민주주의 기반을 강화해왔다”고 설파했다.
국민들은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을 호소한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보복의 서막임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퇴행적 정치를 되풀이할 것인가. 새내기 대학생에게만 관용과 절제를 당부하기엔 민망하다. 그들에게만 극단적인 생각을 경계하라는 건 공허하다.
새봄이다. 관용과 절제는 그나마 각박한 정치현실을 완화하는 길이다. 청년세대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야 모두 관용과 절제의 언어를 습득할 필요가 있다. 청년에게 미래를 열어주지 못한다면 진보든 보수든 ‘꼴통’이다. 캠퍼스에 봄볕이 가득하다. 언제까지 해묵은 겨울에 갇혀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