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못보는 애널리스트, 월가 꿰뚫다

세계 첫 시각장애 재무분석사 신순규씨 ‘도전 인생’
  • 등록 2006-09-29 오전 9:36:56

    수정 2006-09-29 오전 9:36:56

[조선일보 제공] 1985년 봄 미국 뉴저지의 한 비행장. 경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했다. “데이비드, 제가 날고 있어요!” 조종간을 잡은 18세 청년이 흥분해 소리쳤다. “제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봤죠?” 옆에서 조종을 도와주던 후견인 데이비드의 눈에 눈물이 스쳤으나 청년은 보지 못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좌절금지(挫折禁止). 신순규(39·‘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 애널리스트)씨를 위한 말이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월가(街)의 애널리스트로 활약 중인 사람.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 CFA(재무분석사)…. 태어날 때부터 안압(眼壓)이 높았다. 10세 무렵 시력을 잃었고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쪼개 피아노를 선물했다. 볼 수 없기에 악보를 외워야 했다. “하루 종일 외우고 또 외웠더니 듣고 외우는 능력이 생겼어요. 전화번호와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잘 잊지 않아요.”

■시련 닥쳐도 꿈은 크다
10세때 시력 잃고도 악보 외워 피아니스트 15세때 홀로 미국으로

신씨와의 인터뷰는 매일 1시간씩 닷새에 걸쳐 국제전화로 진행됐는데, 그의 또렷하고 자신감에 찬 음성은 듣는 사람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운명의 연주’는 1981년 시작됐다. 시각장애인 중창단의 피아노 반주자로 미국 공연을 간 신씨에게 미국의 맹(盲)학교에서 초청장이 왔다. 이듬해, 15세 소년은 혼자 미국으로 갔다. 맹학교에 만족할 수 없어 후견인으로 나선 데이비드(76)씨 부부의 도움을 받아 1년 만에 일반 고등학교로 옮겼다.


▲ 신순규씨가 월가에 있는 자기사무실에서 컴퓨터 시각장애인 프로그램으로 신문 기사를 듣고 있다. 그는 매일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을‘들으며’일과를 시작한다/신순규씨 제공
■불가능을 뛰어넘다
하버드대~MIT 박사후 재무분석사까지 도전 4시간 자고 미친듯 공부

열심히 공부했다. 1986년과 87년에는 학생회장까지 했다. 졸업성적은 250명 중 5등.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뒤, MIT에서 경영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다녔다. 하루 3~4시간씩 자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담당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너처럼 치밀한 사람은 애널리스트(증시 분석가)가 좋을 것 같아. 도전해 봐.”

1994년, 월가(街)를 돌아다니며 입사원서를 냈다. 시각장애인이 애널리스트라니, 찾아가는 금융회사들마다 놀라는 눈치였다. 자본주의의 총아로 각광받지만, 무한경쟁을 치러야 하는 피 말리는 직업 아닌가. 수백만 달러 연봉을 받는 스타도 있지만 저조하면 바로 도태되는 분야다.

게다가 애널리스트는 기업·시장분석을 위해 수많은 통계수치와 그래프를 봐야 한다. 사람들이 걱정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만 깔아 준다면 무슨 일이든 자신 있습니다.”

투자은행 JP모건에서 연락이 왔다. “애널리스트가 아니라 대출 심사역이었어요. 그렇지만 하는 일이 비슷했어요. 기업을 분석해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었거든요.”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은 화면에 뜬 수치를 음성으로 읽어준다. 컴퓨터에 분석할 기업들 실적을 띄워 놓고 이를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으로 읽게 만든 뒤 중요한 것은 점자로 기록했다.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회사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기업의 실적도 수십 번씩 다시 들으며 통째로 외웠다.

“월가는 워낙 경쟁이 치열해 집에 안 들어가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쉬면서 일하겠어요.”

1998년 꿈에 그리던 애널리스트가 됐다. 400억 달러를 굴리는 미국 최고(最古)의 프라이빗뱅크(부유층을 위한 전문은행)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이 그를 채용한 것이다. 신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2000년 CFA 시험에 도전했다. CFA는 금융 분야 최고의 자격증으로, ‘금융계의 국제여권’으로 불린다. 시험도 1년에 한 번씩 3년에 걸쳐 봐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 그런데 점자 교재가 없었다. 출판사를 찾아가 교본을 CD에 담아 달라고 사정해 ‘절대 복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CD를 얻었다. 듣고 또 들었다.

걸림돌은 또 있었다. CFA 시험 출제위원회가 보안을 이유로 점자 출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문제와 계산기의 답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둘 수 있도록만 해주세요.” 간청에 간청을 거듭해 받아들여졌다. 결국 2002년 CFA 자격증을 땄다. 세계 최초였다.

■‘금융 정글’ 뛰어들다
통계수치·기업 실적 수십번 듣고 외워 분석 3년 수익률 상위 10%

실적은 어떨까? “제가 추천하는 종목을 따라 투자하는 펀드가 5개쯤 됩니다. 이 펀드들의 최근 3년 수익률이 미국에서 상위 10%에 들 수 있는 수준이에요.”

그의 종목 추천은 유연하면서도 과감하다. 2003년에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폐암소송에 걸려 흥망의 기로에 있을 때 그는 담배회사 투자를 권했다. 소송이 끝나려면 7~8년은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큰 이익이 났다.

“기업분석은 시각장애인에게 정말 이상적인 직업입니다. 기업의 가치를 분석하기 위해서 꼭 ‘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치밀한 분석력이죠.”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결혼한 지 10년 만인 지난해 아이가 태어났고, 이렇게 재미있게 일하면서 돈을 받아도 되나 생각할 정도다.

“되돌아보면 가장 좌절했을 때가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됐던 거 같아요. 당장의 불행에 슬퍼하지 마세요. 꿈을 가지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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