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집에서도 軍 막사에서도…`가스라이팅의 덫` 피할 수 없었다

['널 위해'라는 덫, 가스라이팅]②
최근 2년간 판결문 전수 분석
여성 피해자 비중 72.1%, 미성년자 44.2%
남성·성인도 예외 없어…한 사건에 22개 범죄도
부부·연인 등 가까운 관계서 발생하는 경우 많아
  • 등록 2024-02-09 오전 10:00:00

    수정 2024-02-09 오전 10:00:00

가스라이팅 범죄는 과거 사이비 종교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부·연인 관계는 물론 사제 및 선·후배 관계 등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데일리는 최근 2년간 관련 판결문 전수 분석을 통해 가스라이팅 사례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모색했습니다. <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영민 박기주 기자]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범죄가 연일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데일리가 최근 2년간 관련 판결문을 전수 분석하며 확인한 사례를 보면 현실은 더욱 처참했다. 미성년자인 여아가 십여 년간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성범죄 등 강력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은 물론 성인, 심지어 남성까지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희생양이 됐다.

가스라이팅은 불안정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특히 가정과 학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피해자는 공포심에 짓눌려 주위에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하지 못하고, 장기간 가스라이팅이 이어진 경우가 많아 복수의 범죄에 노출된 이들이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데일리는 최근 2년간 가스라이팅 관련 사건의 판결문을 전수 분석했다.(사진=손의연 기자)
여성·미성년자 노린 성범죄…심리 불안 클수록 취약

이데일리는 가스라이팅 범죄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스라이팅’과 ‘심리적 지배’가 명시된 판결문 121건을 분석했다. 이 중 가스라이팅 특징이 뚜렷한 판결문 42건을 살펴본 결과, 가스라이팅 범죄는 주요 타깃은 여성(72.1%), 미성년자(44.2%)였다. 판결문을 통해 피해자의 성별이나 나이를 확인 할 수 없는 경우(각각 14.0%, 16.3%)도 상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비율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우울 등 심리적 불안을 가진 정신질환자나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가진 지적 장애인을 상대로 한 범죄(25.5%)도 적잖았다. 범죄 유형별로는 강간 등 각종 성범죄가 전체 사건의 81%(34건)에서 발생했다.

분석한 판결문에는 이 같은 ‘가스라이팅 범죄’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가 다수 등장했다. 미성년자인 여성 A씨는 지난 2020년 1월 교제하기 시작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는데, 해당 남성은 ‘안 맞은지 오래됐지’ 등 발언을 하며 깨진 소주병으로 협박을 했고, 성범죄를 자행했다. 이후 A씨는 ‘분리불안 관련 증상이 있어서 가스라이팅 등의 피해에 취약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진단을 받았다.

이처럼 가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불안’과 ‘공포’를 파고들었다. 부산지법은 지난해 2월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이용해 지적장애인 여성에게 접근한 뒤 불특정 다수의 남성과 성매매할 것을 지시해 대금을 갈취한 B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B씨는 피해자가 성매매를 거절하면 헤어지거나 죽을 것처럼 협박하고, 피해자가 평소 먹는 간질약을 먹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범행을 이어갔다. C씨는 2019년 10월 당시 17세였던 여성 피해자를 유인해 함께 마약을 투약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교도소에서도 심리적 지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랑한다’, ‘함께 살자’라는 내용의 편지 144통을 피해자에게 보냈고, 마약에 중독된 피해자에게 가출과 성관계, 성매매를 종용했다.

(그래픽= 김일환 기자)
성인·남성도 피하지 못한 덫…‘범죄 폭탄’에 노출

그렇다고 성인이나 남성이 무풍지대인 것도 아니다. 남성은 14.0%, 성인은 39.5%로 비교적 적긴 하지만 이들 역시 가스라이팅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해자가 됐다.

군복무 시절 범행이 시작된 사례도 있었다. 2018년부터 공군교육사령부에서 공군 병사로 복무한 D씨는 당시 후임인 피해자(23)의 미숙한 업무와 거짓말 때문에 간부들에게 혼날 때마다 피해자를 윽박질렀다. 그는 전역 후에도 피해자 때문에 군 복무가 힘들었다며 자신을 두려워하는 피해자에게 청소를 시켰다. 또 ‘가족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폭행해 피해자가 담배 100개비를 한번에 흡연하거나 자신의 배에 담뱃불을 지져 2도 화상을 입게 했다. E씨는 2019년부터 고등학교 동창인 피해자(남·20세)를 지속적으로 협박하거나 폭행하는 방식으로 소변을 마시거나 유사성행위를 하도록 강요했다.

가스라이팅의 더 큰 문제는 하나의 범죄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원이 가스라이팅과 심리적 지배에 의한 피해를 인정한 사례 중 2개 이상 범죄가 발생한 사건은 10건 중 9건(38건)에 달했다. 가장 많은 혐의가 걸린 사건의 경우 강간과 상해, 사기 등 총 22개 혐의가 적용되기도 했다. 실제 F씨 부부는 2012년부터 친구인 피해자와 8년간 한집에 살면서 그와 유사성행위를 하고, “성폭행으로 고소하겠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의 잘못이 더 크다”며 피해자를 협박해 가스라이팅했다. 피고인들은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느낀 피해자를 폭행해 코뼈를 부러뜨리고, 소변과 곤충을 먹도록 강요했다. 이들은 쇠사슬로 피해자의 몸을 묶어 출입을 제한하고, 8000만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이 부부가 받은 혐의는 9개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양형 때 가스라이팅을 범죄 수단이나 가중처벌 조건으로 인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부연구위원은 “가스라이팅이나 심리적 지배는 사실 이전부터 여러 범죄에서 발생했지만 그동안 법원은 가해자의 범행 방식을 나타내는 위계나 위력으로 이 현상을 뭉뚱그려 표현해왔다”며 “판결문이나 뉴스에서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피해자의 심리와 착취 구조에 집중하는 모습은 유의미한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스라이팅을 독자적인 범죄로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폭행이나 협박처럼 심리적 지배를 범죄의 중요 기제로 이해하는 분야를 넓혀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김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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