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정상까지 갈 필요 있나?… 즐거운 ''언저리 산행''

  • 등록 2008-10-16 오전 11:41:02

    수정 2008-10-16 오전 11:41:02

[조선일보 제공] 어쩌면 이건 "산 좀 탄다"는 분들에겐 비웃음 사기 딱 좋은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등산을 했다면 모름지기 땀을 주룩주룩 흘려야 맛이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아래 한 번 굽어보고는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역시 "한심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찍이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올랐던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도 등산을 하는 이유를 두고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고 말했다지 않습니까.

한데요, '게으른 산행'의 저자 우종영씨는 "사람들이 믿건 말건 전국엔 지금 하루 종일 산행을 했는데도 산 중턱까지도 올라가지 않고 밑에서만 맴돌며 산행을 하는 소위 '초입산악회' 회원들이 곳곳에서 암암리에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새벽 일찍 일어나 배낭에 등산화까지 단단히 신고 산을 오르는데도 정상까지는 올라가지도 않고 올라갈 필요도 못 느끼는 산행인들이 도처에 있다는 겁니다.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이 이 소리를 무심코 들었다면 그들은 "운동화 등산객"이라고 폄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400만명의 등산객 중엔 '리복 등산객'―차를 주차한 뒤 350m쯤 걷다가 다시 차로 돌아오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비꽜던 그가 아니던가요.

우종영씨는 그러나 "흔히들 춤 중에서도 '정중동(靜中動)'을 표현해야 하는 학춤이 가장 어렵다고 하듯 정상까지 오르지도 않으면서 하루 종일 산에서 있는다는 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자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산 중턱까지만 올라가면서도 산행을 충분히 즐기는 방법! '산 좀 탄다'는 고수들도 함부로 흉내내지 못할 이들의 게으르기 짝이 없는 '언저리 산행'의 비결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쉬엄쉬엄, 따라오세요.

▲ 정상까지 꼭 올라갈 필요가 있나. 북한산 중턱 언저리에서도 시간은 이렇게 잘만 가는 걸. 차곡차곡 쌓인 낙엽, 좋아하는 노래만 담은 MP3, 차갑고 알싸한 공기, 진홍빛 단풍….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 목 마른 당신이라면, 지금 당장 언저리 산행인을 자처해 봐도 좋겠다. /조선영상미디어

■ 정상보다 언저리가 전망이 좋다

우종영씨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정상보단 언저리 중턱 지점이 더 낫다"고 말한다. 산 꼭대기에 올라서면 오히려 가려지는 아득한 봉우리나 화려한 단풍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언저리 '포인트'가 어느 산이나 있다는 말씀. 때로는 반대편 낮은 산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가령, 태백 두위봉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두위봉이 아니라 두위봉 건너편에 있는 민둥산 정상. 민둥산은 차를 끌고 정상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산으로 차를 세워놓고 딱 30분만 걸어가면 민둥산 정상이 나온다. 두위봉의 흘러내린 병풍 같은 능선 그림자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 생태는 언저리에서 숨쉰다

나무나 꽃에 관심이 많은 사람 역시 정상보단 언저리가 낫다. 대개 다양한 수종과 꽃은 햇빛이 많이 드는 능선 부근 중턱이나 산 언저리에 살고 있기 때문.

우종영씨는 "나무나 꽃 사진을 찍으면서 하루 종일 숲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언저리에서 다양한 생물체를 만나는 게 낫다"고 말했다. 

▲ 언저리 산행하기 좋은 북한산과 청계산에서. /조선영상미디어

■ 1시간에 1㎞ 이상 걷지 마라

스스로를 '초입산악회' 회원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1시간에 1㎞ 이상을 걸어가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정상을 꼭 밟으려는 욕심만 버리면 청설모, 바람 소리, 수피가 벗겨진 거제수, 열매를 가득 떨어뜨리는 신갈나무…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등반거리가 짧을수록 볼 건 더욱 많아진다"는 충고 때문이다. 언저리 산행을 처음 시작하려는 초보자라면 산행 코스도 편도 3㎞ 이상으로 잡지 않는 게 좋다.

너무 게으른 것 아니냐고? 언저리 산행이란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일어나서 어슬렁대는 산행이 아니다. 새벽밥 먹고 산에 올라서서 가급적 많은 시간을 오래도록 산에서 보내는 행위다. 생물에 관심이 전혀 없거나 목적 없는 산행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언저리 산행이야말로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산을 유기체처럼 온몸으로 느끼면서 천천히 걷고 대화를 나눌 때 진정한 산행이 시작된다"는 우종영씨의 말을 떠올린다면 한 번쯤 꼭 해볼 만한 산행이지 않을까 싶다.

미생물에서 머리 위 새까지 관찰… 숲이 재미있어지는 준비물

언저리 산행엔 어울리는 준비물이 따로있다. 빈손으로 갔다간 대충 둘러보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몇 십분 만에 내려오게 될 수도 있으니까. 언저리 산행인들이 꼽아준 '나만의 언저리 산행' 아이템을 소개한다. 

▲ ①새소리 나사, ②루뻬, ③망원경

①새소리 나사|팔지 않는다. 직접 만들어야 한다. 코르크 마개, 또는 그것보다 조금 큰 크기의 나무를 잘 깎아서 손잡이가 있는 돌림나사를 박아 넣는다. 나사를 돌리면 '삐걱삐걱'대면서 새소리 비슷한 소리를 낸다. 이 새소리 나사는 언제 쓰느냐, 말 그대로 새와 대화를 나눌 때 쓴다. 지빠귀가 지저귈 때 그 앞에서 나사로 비슷한 소리를 들려주면 지빠귀는 화답을 한다. 참새 소리를 미묘하게 만들어내면 참새 역시 짹짹 대답한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

②루페|흔히들 '루뻬'라고 부르는 오목거울 확대경. 2000~1만원까지 가격이 다양한 편이다. 숲 속 미생물이나 작은 식물들까지 관찰하고 싶지만 현미경을 가지고 다닐 순 없을 때 언저리 산행가들이 선택하는 물건. 끈끈이주걱 같은 작은 생물체를 관찰하기 좋다.

③망원경|높은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열매나 독특한 잎사귀까지 찬찬히 보고 오려면, 또는 방금 내 머리 위로 날아오른 가슴팍이 붉은 새를 좀 더 관찰하고 싶다면, 망원경이 필수다. 우종영씨가 표면이 맨질맨질해질 때까지 썼다는 카슨(Carson)망원경의 배율은 8×21. 숲에선 너무 배율이 높은 망원경보단 초점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망원경이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④식물도감 소책자|식물도감, 구름도감, 나비도감은 있으면 금상첨화. 방금 지나친 숲 속 친구들의 이름을 찾아보고 외우는 데 효과적이다. 도서출판 '이비락'에서 나온 '오감으로 찾는 우리 풀꽃'(3만원), 도서출판 진선에서 나온 '가을꽃 쉽게 찾기'(9800원) 등이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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