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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⑩김계동 산업은행 팀장(상)
  • [edaily] 모든 시장이 그렇지만 채권시장을 구성하는 3대요소는 물건(채권)을 만드는 사람(발행자)과 물건을 사는 사람(투자자)과 그 둘을 연결해주는 장사꾼(브로커)이라고 할 수있다. 채권발행자, 다시 말해 기업이나 기관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채권투자자 이상으로 시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시장 자체를 뒤흔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우리 채권시장에서 중요한 발행기관의 하나인 산업은행에서 산금채 발행을 담당하는 자금기획부의 김계동 시장조달팀장이다. 우리 채권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발행자라고 하면 국채를 발행하는 정부, 통안채를 발행하는 한국은행 등 국가기관과 회사채를 발행하는 일반 기업체, 정부투자기관 등이 될 것이다. 산업은행도 정부투자 은행으로서 산금채라는 중요한 상품을 채권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산금채 발행의 역사와 변화 과정, 그리고 산금채 발행을 일선에서 처리하는 산은맨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우리 채권발행시장의 현주소를 잘 알 수 있다. 김 팀장은 금리자유화의 기운이 돌던 90년대 중반, 산업은행의 수신구조가 바뀌는 시점에 채권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산업은행은 일반은행에 대한 금융채 발행이 허용되면서 산금채를 시장에 매각해야하고 예금을 끌어와야하는 변혁기에 있었다. 김 팀장에게도IMF 외환위기 이후 시장 친화적으로 산금채를 발행해야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임무가 맡겨졌다. 초창기 김 팀장은 산금채 세일즈를 위해 무작정 기관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20년 산은맨으로서 처음 경험하는 시장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한 때 산금채는 우리 채권시장의 지표채권으로 대접받았다. 지금은 국채 시장이 활성화돼 산금채의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지만 산금채를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해야하는 김 팀장의 임무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 채권발행 담당자들은 시장상황이 유리할 때 채권을 발행하면 좋겠지만 그때는 자금에 여유가 있고 꼭 시장상황이 나쁠 때 발행을 고민해야하기 때문에 시장이 좋아도 고민, 나빠도 고민이다. 산금채가 유통되는 채권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산금채도 몇차례 발행 방식에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다. 산금채는 다시 시장변화에 맞춰 변화를 꿈꾸고 있다. 김 팀장이 경험한 채권발행담당자의 고통과 산금채 변화의 역사를 들어봤다.(김 팀장 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정보요원을 꿈꿨던 산은맨> -자금기획부로 오시기 전에는 어느 부서에 근무하셨나요. ▲뱅커 22년차입니다. 산업은행 입행 후 초반 10년 간은 기업금융을 담당했습니다. 여신업무, 사업성 검토 같은 일을 주로 하다가 대리 4년차 정도 됐을 때 국제금융으로 옮겨갔죠. 국제금융 부문에서는 해외여신 공여를 담당헀고 차장승진으로 현재 부서에서 만 7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저희 부서가 이름도 많이 바뀌었어요. 과거에는 수신개발부. 증권사업부 등으로 불렸죠. 특히 증권회사 사람들은 대부분 수개부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수신기획부, 자금조달부라는 명칭을 거쳐 현재 이름으로 확정됐습니다. 원래 한 부서에 이렇게 오래 있는 일은 드문데 채권관련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입행을 80년에 하셨군요. 대학졸업과 동시에 산업은행 입행이 이루어진 겁니까. ▲그런 셈입니다. 잠깐 증권사이 입사했다가 산업은행 입행 시험을 봤습니다. 그 전까지는 은행원이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정보요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안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에 흥미도 느끼게 됐고 꼭 한 번 그곳에서 일해보고 싶었어요. 중앙정보부 시험을 보러 가는 날 10.26이 터졌어요. 아침에 버스를 타고 시험장소로 향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방송이 막 나오더라구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러면서… 시험장 가다가 다시 돌아왔죠. 하하. -전공은 경제학을 하셨는데요. ▲학교들어갈 때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했어요. 경제학을 전공으로 결정한 것도 당시의 트렌드르 따른 측면이 많아요. 비즈니스 쪽과 관련도가 높은 상경대에 진학하는 것이 진로를 결정할 때 운신의 폭을 넓혀주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선택했죠. 대학때는 겨우겨우 진도를 따라가는 수준으로 공부했어요.(웃음) 70년대 대학은 유신 이후 철권통치가 강화되던 시절이어서 데모도 많이 했지요. 저희 과 학생들은 영리하달까 약삭빠르달까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거드는 정도였습니다.(웃음) 제가 중정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정권 자체를 유지하려고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안위를 위해서는 정보 계통이 발달돼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첩보나 안보에 관련된 개인적인 관심이죠. -산은에서 처음 맡으신 일은 뭐였습니까. ▲투자부에서 일했습니다. 산업은행이 지분을 가지고 출자한 회사들을 관리하는 부서였는데 그 중에는 한국전력, 포항제철, 도로공사 같은 기관들이 있었죠. 제가 처음 담당한 업체는 한국전자통신이었는데 후일 삼성전자에 매각돼 삼성 반도체사업 근간을 이룬 곳이었습니다. 그 다음 용역사업부에 발령 받았습니다. 사업성검토, 기업진단과 같은 일을 하는 부서로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컨설팅 컴퍼니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중은행이 가진 부실기업채권에 대한 진단이 주요업무였죠. 그 당시 국내 상황이 consulting firm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힘든 때라 산업은행이 그 부분의 개척자역할을 하겠다는 차원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다소 성격은 좀 달라졌지만 한국기업평가의 전신이 됐습니다. 그 후 전주지점, 여신관리부, 금융2부 등 현업에서 일하다가 94년 자금조달부로 왔습니다. -해외근무 경험은 없으세요. 산업은행에서는 홍콩, 싱가폴 등으로 종종 파견근무를 나가시지 않습니까. ▲해외근무 경험은 없습니다. 그 대신 해외에서 열심히 놀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웃음) 95년 8월~96년 8월까지 미시간주립대에서 공부했습니다.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여행도 열심히 다녔죠. 다른 사람이 3년 동안 해외근무를 해도 저보다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을 겁니다. -산업은행 입사 22년차이신데요. 적지 않은 세월입니다. ▲사실 대리로 승진하기 전까지는 ‘이 곳이 내가 평생 몸 담아도 되는 곳인가’ 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안정감을 찾기 어려운 상황도 있었고요. 책임자가 되고 나이도 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게 됐습니다. 특히 은행업무는 다른 업종과 달라서 호환성이 무척 낮았고 이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딱히 평생직장이다 아니다라는 생각보다는 은행 생활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다보니 산은이 가진 여러가지 공적 기능도 눈에 들어왔어요.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만족감도 느꼈고 ‘내가 은행을 버리지 않는 한 은행이 나를 버리는 일은 없을거다’ 란 확신을 가졌습니다. 조직을 신뢰하기 시작하니까 저절로 소중한 마음이 들더군요. <변화의 시기에 채권시장에 입문> -자금조달 그러니까 산금채 발행과 관련된 부서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3급 승진으로 막 차장이 됐을 때 왔습니다. 당시 임원들이나 부장들께서 “원화 산금채 수신업무를 발흥시켜보자” 라는 생각을 하셨나봐요. 그래서 국제부 경험이 있는 사람중에서 추천을 받아 저를 보내신 겁니다. 사실 오기전까지는 수신이나 채권분야에 거의 관심이 없었어요. 제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이름인 수신개발부로 발령이 났죠(웃음) -94년 원화산금채 활성화를 목표로 이 부서에 오셨다는 말은 역으로 얘기하면 그 전까지는 원화산금채가 제 기능을 못했다는 말도 되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특별하게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조달부분에서 좀더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해보자라는 생각이었겠죠. 제가 원화산금채 발행과 관한 국제관련 커리어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당시에도 산업은행 수신구조는 산금채 중심으로 돼 있었나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현재는 예금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제가 입행하던 시절에는 일반 개인은 산업은행에 예금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 그것이 바뀌어서 개인들도 누구나 예금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제가 첫번째 한 일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업은행의 가장 중요한 수신처가 산금채이다보니 예금을 통해 방법을 다양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금리자유화 시행이니, 시중은행 금융채 발행 허용이니 해서 주변환경이 급박하게 변했어요. 산업은행은 예금시장 진입이 절박한 과제라는 것을 그 전부터 인식해왔지만 상황이 변화되면서 이러한 인식을 더욱 굳히게 된 거죠. 특히 IMF 외환위기이후 산은의 생각이 급변했죠. 이전에 한국은행 등의 반발도 있었지만 IMF 외환위기 후 경제전반 여건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예금시장 진입을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시중은행 금융채 발행 허용의 반대급부로 산업은행도 CD발행이 가능해졌습니다. 그 외에도 산업은행은 일반은행으로부터 거치식 예금을 받을 수 없는 규제들이 있었어요. 그것이 금리자유화로 인해 풀렸습니다. 98년6월 산업은행은 “수신업무 활성화와 관련된 마스터플랜” 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김영태 총재, 현 론스타코리아 회장이신 심광수 이사의 주도 하에 여러 변화가 일어났죠.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5.11 I 정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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