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렬
  • 영역
  • 기간
  • 기자명
  • 단어포함
  • 단어제외

뉴스 검색결과 3,721건

  • 더존디지털, 전산세무회계시험 국가공인 획득
  • [edaily] 더존디지털웨어(대표 김택진)는 자사의 솔루션인 "네오 플러스(Neo-plus)"를 활용해 한국세무사회 주관으로 그동안 민간자격으로 시행해 오던 "전산세무회계자격시험"이 노동부로부터 국가공인을 획득했다고 21일 밝혔다. 민간자격 국가공인제는 자격기본법에 따라 우수한 민간자격을 국가가 공인해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이다. 국가 공인을 받은 민간자격은 국가자격과 동등하게 취급돼 산업대 및 전문대 입시의 전형자료로 활용되는 한편 학점 인정, 국가기술자격 검정 때 검정과목 면제 등의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이번 국가공인의 획득에 따라 더존디지털(45380)웨어의 시장지배력은 크게 향상되고 다양한 관련 수익 사업의 전개로 매출도 큰폭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미 5만여 일반 기업체와 세무회계사무소 시장의 85%를 점유하는 등 세무회계솔루션 부문에서 독보적인 시장지배를 보여온 더존디지털웨어는 그동안 이 자격시험이 민간자격임으로 인해 수업을 망설여온 상업계 고등학교 및 전문대, 대학 등에서 활발한 강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종전 상업계 고등학교 및 각급 대학 관련학과 학생들의 필수 취득자격 항목이던 "부기자격시험"이 "전산세무회계자격시험"으로 대체되는 현 상황에서 학교에서 이 과목의 교육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더존디지털은 이번 국가공인을 계기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모델을 개발, 직접적인 수익도 크게 실현 할 계획이다. 우선 그동안 전국 5개소의 교육센터에서 관련 교육사업을 영위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전산세무회계학원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다. 즉 가맹학원을 모집해 소프트웨어 제공, 강사교육, 모의고사 실시, 홍보대행 등 온/오프라인의 교육솔루션을 지원하고 가입비 및 수강 학생수에 따른 로열티를 받게 된다. 이미 100여개 학원에서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고 이 과목의 학교수업 활성화에 따라 총 700여개 규모의 가맹학원 모집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에서만 올해 50억원, 내년 이후에는 연간 100억원의 매출을 기대했다. 더존디지털은 22~24일 서울, 부산 등 전국 6개 지역에서 관련 학원을 대상으로 전산세무회계학원 프랜차이즈 사업 설명회를 개최한다.
2002.01.21 I 문병언 기자
  • 건강보험수가 인하방안 3월까지 마련(상보)
  • [edaily] 정부는 건강보험수가 인하방안을 원가검증을 거쳐 3월까지 확정짓기로 했다. 교통요금 등 여타 공공요금은 공기업의 경영합리화를 통해 인상요인이 최대한 자체 흡수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정부는 16일 김대중 대통령 주재 민생관련 장관회의를 열고, 올해 소비자물가를 연평균 3%내외에서 안정시키기 위해 이같은 내용으로 종합안정대책을 수립했다. 교육비 안정을 위해 정부는 이달중 교육인적자원부 주관으로 대학총장회의와 교육감회의 등을 열어 신학기 학교납임금 안정방안을 강구하고, 다음달에는 학원비에 대한 실태점검에 나서 물가불안 심리를 잡는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소비자단체의 시장 감시·견제 기능을 강화해 신학기 학원비와 월드컵 기간중 숙박요금 등의 급등을 막기로 했다. 최근 전체 실업률의 두배를 초과하는 청소년 실업 문제와 관련, 단기적 대책으로 올 1분기중 청소년 실업대책 예산의 40% 이상을 조기에 집행해 1분기 중 청소년실업자 12만명 이상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할 방침이다. 정부는 궁극적으로 청소년 실업률을 5%대로 묶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산업수요에 부응하는 교과·학사 운영을 유도하는 한편, 기업의 채용관행 변화에 맞는 학사운영을 위해 ▲학제·휴학요건의 유연화 ▲재학중 산업현장 연수시 학점인정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건강보험은 2006년 재정안정화라는 목표아래 약제비 증가억제 대책 등 미진한 분야를 계속 보완하되, 중증 질환자의 본인부담(50%)을 경감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경로연금의 지급대상은 작년보다 8만5000명 늘려 80만명으로 확대하고, 월 5만원 미만 수급자에 대해서는 지급액을 5000원 인상했다. 장애인의 경제사회활동을 돕기 위해 장애인수당 지급액을 월4만5000원에서 5만원으로 확대하고 2048명에게 장애아동 부양수당 4만5000원을 신규지급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장애인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중증장애인에 대한 고용기회를 확대하기로 했다.
2002.01.16 I 오상용 기자
  • (화제)취업 못하면 학비 되돌려준다
  • [edaily] 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졸업에서 취업, 재교육까지 전담하는 학교가 있어 화제다. 한국정보통신전문학교는 취업률 100%를 위해 올해 학사일정부터 '취업전담 매니저 제도'를 도입해 졸업생들의 취업을 책임진다고 3일 밝혔다. 또 끝까지 취업이 안 될 경우 수업료 전액을 돌려주는 '환불제'를 실시한다. 한국정보통신전문학교는 30명의 취업 전담 매니저를 두고 학생들의 기본적인학교 생활에서부터 학과외적인 부분인 자격증 취득, 기업체 파견 실습, 기업체 프로젝트 참여를 통한 경력 쌓기, 헤드헌팅 등 밀착 관리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 기업체 내에서 교육을 담당할 실무교수 선정 등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최신장비나 고가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해 취업 후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실무 능력 배양에 주력한다. 특히 최근 많은 기업체에서 경력사원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학생들에게 졸업 전 다양한 실무경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이번 취업 전담 매니저의 중요한 역할이다 . 한국정보통신전문학교는 IT 전문 교육기관으로 게임 그래픽과 3D CG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컴퓨터 그래픽 학부와 시스템엔지니어, 프로그래밍이 전공인 정보처리학부로 나누어 2개 전문 학부에 매년 400여 명의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또 학점은행제 도입으로 전문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으며 4년제 대학 3학년으로 편입도 가능하다. 또 전교생들에게 1일 1∼2시간씩의 외국어 수업으로 영어와 일어를 필수로 이수케 하여 외국어 실력을 배양하는 것은 물론 희망자에 한해 2학년부터 일본 고베전산전문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을 통해 일본 내 취업도 보장하고 있다.
2002.01.03 I 권소현 기자
  • "백세주 세계화에 주력"-국순당 배중호 사장
  • [edaily]"올해가 백세주를 한국 대표술로 키우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난해 창사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한 국순당의 배중호 사장은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백세주 맛을 세계인들에게 어떻게 각인시킬 지에 대해 고심중이다. 백세주가 각종 단체가 주관하는 히트상품에 선정됐을 뿐 아니라 배 사장도 베스트 CEO로 꼽혔다. 경기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해, 그는 매출액 960억원, 경상이익 285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각각 46.1%와 69.6% 신장시켰다. 배중호 사장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저 알코올주의 선호현상과 20대 후반 연령층까지 확대된 고객층의 하향화로 창사이래 최대 경영성과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배중호 사장의 경영철학과 비전에 대한 인터뷰 내용이다. -올해 경영목표를 어떻게 잡고 있나 ▲올해 목표는 매출액 1300억원에 영업이익 358억원으로 잡고 있다. 외형증가율은 35.4%로 지난해에 이어 고성장세가 지속될 것이다. 특히 올해에는 월드컵을 맞아 외국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홍보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른바 "백세주 세계화 프로젝트"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적어도 한번쯤은 백세주를 맛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제까지는 틈새시장을 공랙했는데 앞으로 전략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백세주는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틈새시장 공략에 성공, 백세주가 전통주시장을 만들어 냈다. 최근에 소주와 백세주를 섞어 마시는 분들이 많다. 백세주를 마시던 고객들이 소주와 섞어 마시는 것보다는 기존에 소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백세주를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주가 저도주화돼 가는 추세라 소주 고객들을 잠식해 갈 것으로 본다. -대기업도 전통주시장에 뛰어드는 등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데 대응방안은 ▲동생이 하는 배상면주가가 있고 최근에는 대기업이 백세주와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기업들의 물량공세가 예상되는데 우리를 능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기업들의 참여는 오히려 시장의 볼륨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차별화를 통해 우위를 유지해 갈 방침이다. -해외진출 현황은 ▲현재 미국과 일본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50%와 25%에 달하고 있다. 이중 역점을 기울이는 곳이 일본이다. 교포들을 상대로 하는 여타 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을 직접 대상으로 삼아 영업할 계획이다. 특약대리점을 계약했고 일본인 영업사원을 뽑아쓸 방침이다. 일본에서는 국내와 달리 20대 초중반이나 여성을 주요한 타깃으로 삼고 있다. -코스닥에 등록할 때 애로점이나 등록 전후의 차이점은 ▲경영에 있어 투명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코스닥시장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큰 애로는 없었다. 다만 당시 공모가를 산정할 때 기관들의 담합이 심해 가격산정을 받는데 불이익을 받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업의 공신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또 코스닥시장의 시가상위종목이라 언론에 자주 언급되기 때문에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고 있다. -현재 국순당의 주가는 적정하다고 보나, 또 주가관리에 대한 생각은 ▲주가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다. 상대기업들과 비교해 보면 적당하다고 볼수 있지만 기업의 성장성 등 장래가치를 봤을 때 아직 주가에 덜 반영된 부분이 있다. 시가총액 상위기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가관리를 위해 회사가 손대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지난해 고배당을 실시했는데 ▲ 지난해에는 경영성과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주식 배당 5.14%, 현금배당 110%를 실시키로 했다. 주주중시의 경영 실천을 위한 차원이며 고객만족 및 주주중시의 경영 실천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직원들을 사기진작을 위한 후생복지나 인센티브는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1인당 96학점 이수제도"를 통해 위탁교육 및 강사를 초빙한 자체교육에 신경을 쓰고 있다. 복지후생의 경우는 각각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월급을 올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우명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 손해를 본다는 반박도 있지만 길게볼 때 결국 원칙을 지키는 쪽이 승리한다. 원칙을 지키는 게 쉽지 않은 것은 꾸준한 노력과 부지런함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후배 CEO에게 조언을 한다면 ▲조직에서 계장은 과장의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하고 과장은 부장의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치로 한 기업의 CEO라고 한다면 업계 전체를 생각하는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전체를 위하지 않는다면 꼭 망한다는 것을 진리처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술에대한 부정적 인식이 적지 않은 데 ▲술을 만들어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음주문화를 새롭게 바꾸고 싶다. 우리 조상들은 주도라는 것을 배워 지켜왔고 발전시켰다. 즐기되 예절과 격식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모습, 이것을 복원하는 것이 국순당과 술을 만드는 모든 업체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술로써 돈을 벌었는데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정부나 정책당국에 하고픈 말은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체계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 곪아터질 때까지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신속한 처리시스템이 절실하다. 기관들이 장기적인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체제도 확립돼야 한다. ◇배중호(裵重浩) 사장 프로필 - 53년5월18일생 <학력> - 71년3월: 서울 용산고등학교 졸업 - 78년2월: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졸업 - 99년: 뉴밀레니엄 디자인혁신정책과정 수료 <경력> - 78년~ 80년:롯데상사 무역부 - 80년1월: 국순당 입사 - 86년4월: 국순당 부설연구소장 - 93년~ 현재: 국순당 대표이사 - 95년6월: 산업진흥협회 부설연구소장 - 98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총동문회 이사 - 00년:한국미생물학회 이사, 한국산업미생물학회 감사, 문화예술후원회 회원 - 01년2월15일: 2001년도 제2기 코스닥등록법인협의회 정기총회 이사회 감사 <수상> - 94년11월:농림수산부장관 장려상 수상 - 95년12월:화성군수 표창장 수상 - 00년3월: 우수기업부설연구소 과기부장관상 수상 - 00년12월: 고대ICP 자랑스런 고대인상 수상 - 01년1월: 연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최고 경영인상 수상
2002.01.03 I 김희석 기자
  • (화제)신보 대졸공채, 고급인력 978명 탈락
  • [edaily] 신용보증기금 대졸 신입직원 공채에서 공인회계사(CPA) 80명, 세무사 20명, 석사이상 고학력자 878명(박사 6명 포함)이 탈락한 것으로 나타나 고급인력의 취업난을 실감케 했다. 신보에 따르면 70명을 뽑는 이번 공채에는 총 8826명이 지원, 126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합격자중에는 공인회계사 5명, 세무사 2명, 석사 17명, 토익성적 900점이상 26명, 학점 4.0이상 37명 등이 포함됐다. 반면 공인회계사와 세무사 등 전문자격증 소지자와 석사이상 고학력자 등 1000명에 가까운 고급인력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신보는 "대졸자 취업난을 반영하듯 지원자의 상당수가 대학 평균성적 최상위권에 있는 등 자질이 우수한 지원자가 많았다"면서 "이번에 탈락한 사람들도 우수한 인재들인 만큼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란다는 위로 편지를 발송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실시한 신입행원 채용시험에서도 토익만점자와 CPA 50여명이 무더기로 탈락, 높은 취업문턱을 증명했다. 은행권의 경우 취업 경쟁률이 최고 200대 1을 넘어섰고 MBA나 CPA 등이 대거 몰린 것으로 나타나 이들중 상당수도 취업문을 통과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LG연구원은 최근의 대졸 취업난은 시작에 불과하며 적어도 오는 2007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 11월 고용동향에서도 대졸 예정자들이 포함된 20대 계층의 실업률이 전달보다 0.8%P 급등, 정부가 청년실업 대책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2001.12.19 I 조용만 기자
  • (화제)증권사 신입사원 모집에 우수인력 "밀물"
  • [edaily] 증권사 신입직원 모집에 우수인력이 대거 몰려 화제가 되고 있다. 굿모닝 증권에 따르면 30명내외를 모집하는 신입사원 공채에 7500명이 지원, 무려 25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경쟁률도 경쟁률이지만 특이한 것은 지원자의 캐리어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눈길을 끈 것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까지 거친 소위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이 두명이나 들어있었다는 것(이번 모집에 나이제한 없음). 이들은 자기소개서를 통해 자신들이 취득한 자격을 내세우지 않고 똑같은 신입사원 차원에서 증권사를 택한 것이라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굿모닝증권이었다. 굿모닝증권은 고심 끝에 "신입사원 선발의 취지나 개인적인 장래 등에 맞지 않으며 이같은 인력이 필요할 경우 다른 경로로 영입하겠다"고 결론짓고 서류전형에서 과감히(?) 탈락시켰다. 고학력 경력자들은 사법 연수생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공인회계사 출신도 있었고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은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또 현지인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하거나 특수한 자격증을 보유한 예비 신입사원도 적지 않았다. 굿모닝증권 관계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우수한 인력이 너무 많이 몰려 우열을 가리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다른 관계자는 "경기침체로 실업문제가 심각하다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실업을 면키 위해서건 증권이 좋아서건 일단 증권사를 택한 이들에게는 아직도 치열한 경쟁이 남아 있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1차 합격생들은 실무 인터뷰와 임원 인터뷰를 거쳐야 하고 다음 단계로 이달 중순 세미나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등 세번의 관문을 더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1.11.02 I 김희석 기자
  • 4분기중 BBB이하 회사채 5∼6조 추가 보증(상보)
  • [edaily] 정부는 최근 회사채발행 여건이 악화됨에 따라 올 4분기중 BBB이하 회사채에 대한 신용보증 지원을 5조∼6조 늘리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관계부처간 협의를 거쳐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재원을 조속히 확충하기로 했다. 정부는 29일 오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경제장관간담회를 개최, 이같이 결정하고, 2조원 규모의 제2차 추경예산을 편성 4분기중 1만명 규모의 대학생 중활을 실시하는 등 동절기 고용안정 대책을 강화하기로 했다. 중활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에게는 학점의 80%까지 인정해 줄 수 있도록 교육부에 요청할 계획이다. 지금은 40%만을 학점으로 인정하고 있다. 진 부총리는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이달부터 BBB이하 회사채의 발행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4분기중 5조∼6조원 가량의 프라이머리 CBO 발행지원이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 부총리는 이어 "현재 추세로는 올 4분기와 내년 1분기중 실업이 새로운 경제,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추경을 통해 인턴제, 중활제 등 청소년 고용대책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지방자치단체들이 1차 추경예산을 조속히 편성, 연내에 지역사업과 고용흡수에 나설 수 있도록 행자부 등을 통해 독려하기로 했다. 정부는 또 중소기업에 대한 산업은행 등의 기존 자금이 만기연장 될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하는 등 경기둔화에 따른 중소기업 자금난을 사전에 예방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진 부총리는 "현재 국내 투자자들과 소비자들이 테러피해를 입은 미국보다 더 위축된 상황"이라면서 "경제주체들이 평상심으로 돌아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간담회에서 경제장관들은 국방부 소속 장성 2명을 불러 미국의 보복전쟁 전개 예상 시나리오를 설명 받았다. 진 부총리는 "현재로서는 미국 경제가 당초 예상보다 2분기 정도 늦게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일부에서는 비관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내년 하반기부터는 미국 등 세계경제가 가파른 회복을 보일 것이란 예측을 강하게 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1.09.29 I 안근모 기자
  • 펜타클아카데미,온라인 교육사업 진출..미국 ESI와 제휴
  • [edaily] 펜타클벤처아카데미(대표 임민수)는 미국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PM) 교육기업인 ESI 인터내셔널사(www.esi-intl.com)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온라인 교육서비스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제휴는 ESI 인터내셔널의 조지워싱턴대 PM 석사자격증 코스 및 국제공인 PM자격증인 PMP 시험 준비 코스, PM 컨설팅 방법론 등 ESI의 온오프라인 교육과정을 펜타클벤처아카데미에 도입하고, 공동 마케팅을 전개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펜타클은 ESI와의 제휴를 통해 올 연말부터 국내 온라인 교육사이트들과 연계, ESI 교육프로그램을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퓨전클래스로 운영하고, 장기적으로 국제공인 PM 전문 교육사이트를 구축할 방침이다. 1981년 설립된 ESI 인터내셔널社는 시스코, 컴팩, IBM, 모토롤라, 오라클, 루슨트테크놀로지, 나스닥, 보잉 등 표춘誌 선정 500대 기업 등 연간 200여 고객사를 대상으로 프로젝트매니저(PM) 및 계약관리자(CM)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ESI의 교육프로그램은 국제공인협회인 PMI의 공인 교육프로그램으로, 국제공인 PM자격증인 PMP의 준비과정임과 동시에 자격유지과정이며, 조지워싱턴大 연계 과정 이수 時, 해당 학점과 6개의 마스터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다. 임민수 펜타클벤처아카데미 사장은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프로젝트매니저의 양성과 역량 강화를 통해 기업과 공공기관의 경쟁력 강화에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제휴를 위해 방한한 ESI 인터내셔널사의 르로이 수석 부사장은 "인터넷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한국은 ESI의 글로벌 전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2001.09.10 I 이의철 기자
  •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이 초래한 인력난-BW
  • [edaily]비싼 대학 등록금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줄어들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 기업들이 충분한 인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비지니스위크가 최신호에서 밝혔다. 미국 기업들은 적당한 인재를 당장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15년뒤로 가보자. 대학은 태부족이고 빈부격차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1994년 캘빈 토마스와 그의 친구들이 세인트 루이스의 유니버시티 씨티 하이스쿨을 졸업할 당시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이 되는 꿈은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평균 3.1의 학점에 토마스와 친구들은 대학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6개의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던 토마스는 등록할 수가 없었다. 학생대출을 받고도 등록금을 내기에는 4500달러나 부족했다. 그와 두 동생까지 부양해야했던 그의 어머니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토마스는"많은 친구들이 대학을 가긴 했지만 등록금을 내지못해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토마스는 이제 25살이고 대학 4학년이 된다. 원하던 대학보다 훨씬 싼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지금에 오기까지 그는 몇년간 일해야 했다. 호황의 아이러니다. 지난 몇년간 유례없이 장기적인 경기팽창에도 가난한 학생들에게 미래의 성공이란 아직도 먼나라 얘기다. 90년대 중반이후 대부분의 등록금 원조 혜택은 중산층에게만 돌아갔다. 상류층 자녀들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보다 대학졸업장을 딸 가능성이 7배나 크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 자람에 따라 향후 10여년간 대학진학연령 인구는 15%나 증가할 것이다. 이중 85%는 소수민족이, 41%는 빈민층이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20세까지 흑인과 히스패닉이 대학에 다닐 확률은 각각 55%, 50%로 백인의 65% 보다 훨씬 적다. 또 하류층의 36%만이 대학을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지도 모른다. 고등 교육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줄어든다면 보다 능력있는 근로자를 충분히 양성하기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률은 98년부터 1.5% 감소했다. 이러한 추세는 능력있는 근로자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동안에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내셔널 얼라이언스 비지니스의 CEO로버트.T. 존스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의 공급은 아직도 필요에 훨씬 못미친다"고 경고했다. 수용능력도 한계에 부닥쳤다. 현재 고등학생 중 53%만 대학에 진학한다. 이 비율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대학의 강의실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요지는 지난 2월 학생 자금원조에 관한 의회 자문위원회가 내린 결론에 잘 드러나 있다. 위원회는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와 기회를 늘리지 않으면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숙련 노동자들을 양성해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계층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 교육 기회를 보장하려는 정부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중산층에 더 많은혜택을 부여했을 뿐이다. 클린턴의 1997 호프 장학금 프로그램은 대학 진학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취지로 대상 학생들에게 대학 2년간 3000달러의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빈민층은 혜택을 보지 못했다. 세금은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금 감면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매칼레스터 대학의 총장 마이클 맥퍼슨은 많은 대학들이 중산층 이상에게만 유리한 혜택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빈민층 학생들을 위한 최대 규모의 펠 교부금이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안이 된다. 그러나 75년 공립대학의 4년간 비용 중 85%를 지원해주던 펠 교부금은 작년에 전체 비용 중 39%만을 원조해주는데 그쳤다. 결국 펠 교부금의 확충이나 혁신적인 교육기회 증대책이 없는 한 능력있는 인력을 구하기 위해 사용자라도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2001.08.20 I 홍정민 기자
  • 정통부, 해외우수IT교육기관 대학생 파견연수 확대
  • [edaily] 정보통신부는 국내 우수 IT 잠재인력인 대학생들의 해외 우수 IT교육기관에서의 파견 및 연수를 지원하는 "해외 우수 IT교육기관 파견·연수 지원사업"을 확대 실시한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사업은 지난 4월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120명을 선발한데 이은 제2차 사업으로 총 44.5억원을 투입, 880여명의 대학생들이 해외 우수 IT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정통부는 대학생들이 인도의 Aptech, NIIT 등 세계 최고 수준의 IT교육기관에서 현지 교육을 받을 경우 교육비 및 체류비 등의 50%(1인당 한도 500만원 한도)를 지원할 예정이다. 정통부는 이번 사업을 위해 국내 2년제 이상 대학중에서 세계 우수 IT교육기관과 IT교육을 실시하기로 상호 협약을 맺고, 해당 교육과정을 이수한 대학생에게 학점교류를 인정하는 대학을 "해외 우수 IT 파견·연수 지원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할 계획이다. "해외 우수 IT 파견·연수 지원사업 수행기관"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대학은 오는 30일부터 수시로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http://www.kipa.or.kr)에 사업참여 신청서류를 제출하면 된다. 정통부는 이번 사업을 통해 IT전문지식은 물론 외국어 능력과 국제적 감각까지 구비한 국제경쟁력 있는 IT 전문가가 많이 양성되어 향후 국내 IT전문인력의 부족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우리 IT인력의 해외 진출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1.07.27 I 이경탑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⑬박광철 금융감독원 팀장(상)
  • [edaily]금융감독원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구조조정과 기업구조조정을 현장에서 직접 처리한 조직이다. 정책구상은 재정경제부나 금융감독위원회에서 하더라도 금융시장의 실태와 정책의 실질적인 집행 방법 등은 금감원의 실무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율됐다. 금감원의 자산운용감독국은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투신산업의 문제를 처리하고 시장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금감원 자산운용감독국의 박광철 팀장이다. 박 팀장은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사건과 사고가 있는 곳”에 늘 나타나서 일을 처리한 베테랑 ‘해결사’다. 증권감독원 시절,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촉발된 삼보증권 사태를 처리한 것을 시작으로 외환위기 이후에는 투신권 구조조정, 대우사태, 시가평가제도 적용 등을 담당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의 한 축을 이루는 투신권은 IMF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폭풍의 눈’이었다. 투신권의 자금이 어떻게 이동하느냐에 따라 채권시장을 비롯한 금융권이 초긴장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올 2월 채권수익률이 급등할 때도 투신권의 MMF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아 시장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박 팀장은 “투신사들이 MMF를 마치 전략상품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반 국민들이 신탁상품의 특성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금융시장이 고도화되고 자산운용시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금융권에 흩어져 있는 규정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연기금을 활성화 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금융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연금과 보험권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한다”고 말했다. 우니라나 금융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투신권의 변화를 현장에서 바라봤고 새로운 정책시행을 주도했던 박 팀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박광철 팀장 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반골기질 강한 법학도, 증권감독원에 입사> -증권감독원에 입사하신 것은 몇 년도입니까. ▲1982년 7월입니다. 198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한답시고 엉뚱한 일을 하다가(웃음) 입사가 좀 늦었어요. 석박사는 입사 후에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1975년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그해에 건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75년 당시 덕수상고를 졸업하셨다면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 취업해서 예정된 코스를 밟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제가 약간 반골기질이 있어서요. 누가 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가 고집해서 덕수상고를 들어가긴 했는데 입학하고 나니까 저랑 영 안맞는 겁니다. 졸업조건이니까 주산, 부기자격증도 따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구요. 친구들이 좋은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죠.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은 했는데 그 당시 상업고등학교의 과목 중 대학입시와 관련된 것은 영어 하나였습니다. 수학같은 과목은 아예 수업을 들어본 적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혼자 영어공부만 하다가 장난삼아서 재학중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상고에서는 3학년 때는 취업이 되면 학교수업을 제대로 듣지않아도 감안이 되거든요. 그래서 "됐다. 이제는 대학공부만 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입시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언제 마치셨나요. ▲학교 입학하자마자 군대에 갔죠. 1975년 7월인가 8월에 말입니다. 78년에 제대하고 그 이듬해 복학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6개월 동안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사법고시 준비인가요. ▲물론입니다. 증권감독원 입사 후에도 계속한걸요. 계속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증감원 입사 후 업무에 젖어들다 보니 어느 순간 그 꿈과 멀어졌어요. 제가 증감원에 입사하자마자 "증권산업 전산화"가 시작됐습니다. 당시가 82년이었으니까 국보위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죠. 국보위가 국가 전산작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에서 유니백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기기를 들어오게 된 배경에는 구구한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 비싼 기기를 들여와서 활용할 길을 찾다가 "증권산업 전산화에 사용하자" 고 결론이 났던 겁니다. 업무를 담당하면서 위탁자원장과 신용거래장까지 모두 제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석사는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처음에 들어와서는 업무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어요. 사법고시에 대한 미련도 포기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시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자 "아 이래선 안되겠다. 공부라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85년에 석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88년에 석사를 마치고 일이 바빠서 한 해 쉬다가 89년 다시 박사코스를 밟았죠. 그런데 일 때문에 아직까지 학위논문을 못 쓰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허허 -사법고시를 준비하시던 분이 어쩌다가 증권감독원에 들어오게 됐나요. 궁금합니다. ▲제가 법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두 분의 은사가 계십니다. 한 분은 지금도 건국대학교에서 상법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이시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양병회 교수님이시죠. 제가 양 교수님을 무척 따랐는데 양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입사를 권하셨습니다. 추천서가 왔는데 거기 가라고 말씀하시면서요. "거기 들어가서도 고시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증권감독원 공채 3기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보니까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더군요.(웃음) -그럼 증권감독원이 뭐하는 곳인지를 모르고 입사하셨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시험볼 때는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들어와서 일을 하다보니 공부가 더 필요한 직장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석사를 양 교수님 밑에서 마쳤죠. 그런데 박사과정에 진학하려고 하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제가 해온 공부가 좀 달랐어요. 대부분 석사와 박사를 같은 지도교수님 밑에서 밟지만 저는 박사는 다른 교수님 밑에서 했습니다. 일과 관련된 쪽으로 공부방향을 바꾼 거죠. -유니백 시스템 업무를 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당시 저는 유통시장국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윗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한 제가 유용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회계와 법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 삼보증권의 완매사태가 터졌습니다. <사건이 있는 곳에 늘 나타나는 해결사> -그것이 언제죠? ▲82년입니다. 81년에 그 사건이 터져서 82년까지 계속됐어요. 요즘 환매조건부채권있죠? 그것을 당시에는 완매채라고 불렀습니다. 일명 전매라고도 하죠. *편집자 주 : 환매조건부채권(RP, Repurchase Agreements) 금융기관이 일정기간 후에 다시 사주는 조건으로 팔고 경과 기간에 따라 이자를 붙여 되사는 채권을 말한다. 채권 투자의 약점인 환금성을 보장한 것으로 지난 1981년 미국에서 예금은행의 단기자금 조달방식으로 처음 도입됐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중앙은행과 예금은행간의 유동성 조절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앙은 행인 한국은행과 예금 은행사이에 시중 통화 수위와 예금은행의 유동성 상황에 따라 수시로 RP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RP 만기는 보통 1∼15일 이내이며 자금 결제는 주로 한국은행에 예치된 지급준비금의 대차거래로 이뤄진다. 채권가격은 계속 떨어지는데 빌린 돈은 점점 늘어나 채권을 다 팔고도 돈을 갚을 수 없게 됐습니다. 평가손실이 이자부분만큼 계속적으로 누적됐고 이것이 뻥하고 터져버린 것이 바로 삼보증권 완매사태입니다. 이 사건이 회계시스템을 금융거래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고 그 업무에 매달렸습니다. -그 때도 어쨌든 채권과 관련된 일을 하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증권업계 전산화 업무도 같이 했으니 정신없었죠 뭐. 원장 만드는 일, 대체전표 다루는 일 등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일을 시작하려니 무척 힘들었어요. -그 다음 다른 부서로 이동한 건 언제입니까. ▲삼보사태 처리 후 검사총괄국에서 잠깐 근무했습니다. 검사국에 있으면서 대리 승진시험을 봤는데 시험성적이 나쁘지않은 편이어서 상사 중 한 분이 정보분석과로 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가 증권감독원의 조사국이 막 창립되려는 단계였어요. 조사국에서 초기화단계 업무정립을 하고 다시 검사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검사국에서 2년 정도 일하자 이번에는 분쟁조정위원회 신설이라는 것과 마주치게 됐어요. 분쟁조정위원회로 갈때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분쟁조정위원회의 제도를 도입하고 규정을 일일이 만들고 겨우 한숨 돌리고 나니 투신 각서파동 사태와 직면했습니다. -투신 각서사태가 몇 년도인가요. ▲95년에 터졌습니다. 그 당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수습하느라고 이리뛰고 저리뛰었습니다. 96년까지 계속 그 뒤치닥거리를 했는데 위에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어느 지역에 있었습니까. ▲콜로라도였어요. 콜로라도 주 덴버에 1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1년 동안 43학점이나 땄죠. 그 곳의 학제는 1년이 3학기로 이뤄져있는데 매학기마다 3학점 과목을 서너개씩 듣곤 했습니다. 골프도 배웠구요.(웃음) <외환위기의 한가운데에서 투신사 구조조정을 담당> -귀국해서 맡은 업무는 어떤 일이었나요. ▲97년 돌아오니 바로 고려증권 일이 터졌어요. 증권업계에 IMF 여파가 들이닥친 것이죠. 대통령 선거와 관련돼 증감원의 계좌추적 사건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어요. 청문회 열리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때 일을 마무리하고 고려증권, 동서증권이 터지면서 현장으로 파견을 나갔습니다. 대책반에서 기획업무를 맡으면서 자금조달, 수습방법 제시를 하다가 "현장감독이 필요하니 현장으로 나가라"고 하셔서 나가게 된 겁니다. 이번엔 신세기 투신이 터진다고 해서 인천으로 가라고 해서 인천으로 갔죠. 금감위가 98년 4월 2일부로 발족되니 그 업무를 이관받으라고 해서 98년부터 또 투신과 일하게 됐어요. 한남투신 사태가 터졌구요. 현대투신과 맞물려서 일하던 중 금융감독원 자산운용감독국에서 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사건이 터지는 곳에만 있었던 셈이죠.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
2001.06.01 I 정명수 기자
  •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⑨박성진 삼성투신 차장(중)
  • [edaily]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입니다. (인터뷰 상편에서 이어짐) <운명의 장난(?) 교수의 꿈이 증권사 채권맨으로> -그럼 신영증권에 입사한 것은 어떤 계기에서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요. 제가 준비했던 학교가 인디애나 주립대였어요. 미국 내에서도 빅 10에 들어가고 무엇보다도 한국학자들 중 여기서 학위받은 분들이 많은 곳이죠. 제 석사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원서를 넣었더니 그 쪽에서 “좋다. 너는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죠.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다시 석사부터 시작하려면 좀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까. 의기양양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더니 아까 그 여자 면접관이 “your job responsibility is not enough guarantee to come back.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enough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이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죠. 그때가 12월이었어요. 1월에 미국으로 가서 2월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이미 결혼을 해서 기혼자용 기숙사에 제 피 같은 돈 100불을 예치금으로 송금까지 한 상황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했죠. 그런데 전혀 안 통해요. 안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경을 불러서 끌어낼 태세에요.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한 남자의 꿈과 인생이 일개 미 대사관 직원의 손에서 박살이 난 겁니다. 인디애나 주립대에 전화를 했습니다. 창피해서 비자가 리젝트됐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에는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 2년 안으로만 다시 하면 된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나면 토플과 GRE를 새로 시험 봐서 최신 성적을 보내주면 또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낙담한 마음을 조금은 지울 수 있었죠. 그 때 병도 좀 앓았는데 가장이니 어떡합니까. 먹고는 살아아죠. 신문을 탁 펼치고 구인광고를 막 뒤졌어요.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니 12월에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딱 두 군데였어요. 신영증권이랑 디지털조선. 처음에는 당연히 디지털조선에 가고 싶었습니다. 대기업공채는 이미 가을에 끝났고 신영증권은 회사 자체에 일이 있어서 12월로 늦춰졌다고 하더군요. 신영증권의 일정이 먼저 시작됐는데 모집분야에 연구/조사 분야가 있었어요. 일단 두 곳에 모두 원서를 넣었죠. -증권이 무엇인지는 아는 상태에서 입사를 결정한 것은 아닐텐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유학준비를 하면서 잠깐 토플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그 학원 바로 옆에 동서증권이 있었어요. 학원에서는 초급반 영어랑 주부회화를 담당했습니다. 아침에만 좀 바쁘고 오후에는 내리 놀아요. 그리고 학생들 수업끝나고 직장인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시간에 연이어 수업이 계속되는 거죠. 학원강사가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건강도 많이 망쳐요. 낮에 시간 많겠다 바로 옆에 증권회사 있겠다. 그래서 순진한 집사람을 꾀서 주식을 하겠다고 졸랐어요. 당시 집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20개나 해서 2000만원을 모았거든요.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 돈을 불려서 유학가자는 결심을 하고 증권계좌를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잘 되더라구요. 금방 2500만원으로 돈이 불어났거든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고 기업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들어본 회사라고는 아버님이 다니셨던 동아건설이 고작이었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사태 때문에 동아건설주가 무척 쌌어요. 그래서 “음 저건 낙폭과대주야” 라고 매입했죠. 하하. 그리고 당시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LG계열사 주식도 샀고요. 그런데 첫끗발이 개끗발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웃음) 그 후 손절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못했어요. 개미투자자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죠. ‘손절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를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류의 생각들. 되긴 뭐가 됩니까. 유학 갈 날짜는 다가오고 점점 돈은 줄어드는 지경이 됐어요. 대충 정리를 해보니까 150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 남았더군요. 속으로는 “그래도 선방했다. 이게 다 내가 블루칩과 낙폭과대주를 산 덕택이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유학이 취소되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주식투자에 실패했는지 증권회사에 들어가서 몸소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죠. 전 그 당시만해도 증권회사 직원들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는데 그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디지털조선은 어떻게 됐냐구요? 제가 학부는 놀아서 학점이 나쁜데 대학원은 all A였어요. 대학원 all A지, 토플 점수 우수하지…나름대로는 서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디조에 원서를 보냈어요. 그런데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지금도 조선일보는 감정이 좋지 않아요. <우연의 연속, 채권분석가가 되기까지> -신영증권에 들어자마자 바로 채권부로 갔습니까? ▲연수를 받고 신입사원들에게 지원부서를 적으라더군요. 1순위는 무조건 조사부 적었죠. 한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국제부. 폼 나잖아요. 3순위. 주식부. 왜 주식을 하다가 망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발령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박성진 채권부” 하고 부르는 겁니다. 인상 팍 쓰면서 ‘도대체 채권부가 뭐하는데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부장께 물었죠. 채권부가 뭐하는 곳이냐고.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아파트 분양하잖아. 거기서 채권받거든. 분양하고 나오는 사람들 앞에서 채권, 채권 하면서 소리지르고 가서 팔아. 너 명동이나 주택가에서 채권, 채권하면서 팔러다니는 사람들 본 적 없냐? 그거하는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다르지않게 전해드리는 거에요. 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황당했어요.(웃음) 채권이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데다 신입사원 교육 때 채권시간이 무지 재미없었거든요. 수학공식 막 쓰고 계산도 복잡하고. 채권부에 갔더니 지금 LG투신에 있는 최원녕 과장이 “네가 채권부냐?” 라고 인상을 쓰면서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선배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꽉 잡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죠. 하하. -결국 전공이나 희망사항과는 전혀 상관없이 채권판에 들어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도결제죠뭐.(증권사가 채권매매 중개시 현물 채권과 대금을 교환, 결제해주는 것) 처음 증권사 채권부에 가면 하는 일이 그거 밖에 더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인생이 완전히 골로 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을 논하던 나름대로 먹물먹은 지식인이라고 제 딴에 자부했는데 말이죠. 하하.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냥 전공살려서 기자나 됐으면 폼이라도 날 거 아니겠어요. (웃음) -수도는 얼마나 했습니까? ▲9개월 정도? 한 일년 가까이 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어요. 다행인 것은 저랑 한 조가 된 친구가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그 친구가 막 뛰어다니는 일을 했죠(웃음) 제가 어떤 건물 앞에 차를 탁 세우면 그 친구는 미친 듯 뛰어올라가서 도장 찍어오고. 수도를 직접 해 봐야 채권의 비애를 몸소 체험할 수 있어요. 길이 막힐 때는 원효대교를 뛰어서 여의도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어요. 그때 거래가 많았거든요. 선배들이 “야 이 자식아 빨리빨리 처리 못해? 느려터져 가지고선” 뭐 이렇게 혼이났죠. 저도 열이 받으면 “우리 회사에서 매매보고서 나보다 더 빨리 작성하는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없으니까 늦는다고 갈구지 마” (웃음) 이렇게 맞받았죠.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기술적 분석이나 한번 해봐라”> -채권의 기술적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그것도 제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신영증권 황 부장께서 “너는 컴퓨터도 잘 다루니까 이거 한번 해봐라”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셔서 하게 된 겁니다. 입사하고 3개월 후부터 수도업무랑 채권분석을 같이하기 시작했어요. 채권단가, 이론부터 알아나갔죠. 실제로 해보니까 제가 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잘 맞을 때까지 조정도 이리저리 해보고. 여하튼 재미있었습니다. -채권관련 책은 몇 종류나 봤습니까. ▲기술적 분석에 관한 책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아요. 거기에 나오는 공식들을 보는거죠. 제가 좀 컴퓨터를 다루니까 그 공식들을 프로그램으로 짜고 그것을 또다시 엑셀에서 구현하는 작업들을 했어요. 조정과정을 몇 개월 거치니까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거에요. 그때 당시에는 족집게처럼 들어맞는다고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그게 몇 년도인가요. ▲입사하던 해였으니까 96년이군요. 그런데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당시 시장은 지금처럼 시가평가(market to market) 시장도 아니었고 대부분 시장참가자들이 기관투자가다 보니까 현재에 비해 모멘텀이 훨씬 분명한 시장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동성이 큰 것이 아니라 한 번 모멘텀이 생기면 관성에 의해서 일정 기간은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된 거죠. 단기 딜링을 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막 생겨났습니다. 아침회의에서 “금리 어떻게 될 것 같나?”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코멘트를 하고. 그러면서 “아 나는 이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봐. 분석의 천재라니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됐죠(웃음). 그 시절에는 어디 인터넷이 있습니까. 나오는 모든 금융데이타를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어요. 한국은행 데이터, 경기동향, 통계청 데이터를 수기로 입력했다는 거 아닙니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였군요.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비자받을 때 흠 잡히지 않고 돈 모아서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웃음) 학원강사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증권회사라면 미국사람들도 job responsibility가 어쩌니 저쩌니 못할 거 아니겠어요. 2년간 괜찮다는데 금방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학위받는 일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됐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학계만큼 정치적인 곳도 없잖아요.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인데. 수도하면서 도장받으러 다니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했나. 이런 생각들. 그래서 대학때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뜸하게 되고. 저는 토요일 교회모임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그 흔한 MT도 한번 안 간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모셨는데 생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다 잘되고 나는 남들 다 가는 유학 한 번 못 가나’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위에서 뭐하라고 시키면 죽어라 하거든요.(웃음) 제가 바로 그랬어요.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하라면 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자네를 유학 보내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시키시려고 일부러 여기 남게 하신 거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에 관한 재능을 주신거다. 네가 경제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나님이 메꿔 주실거다.” 이렇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조직 안에서 전문적으로 분석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수도일이 끝나고 나서는 상품운용팀에 들어갔어요. 말이 상품운용이지 일반고객들을 상대로 채권을 파는 거였죠. 전자계산기도 무지 잘 써야했구요. 세금계산을 손으로 하는데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손동작을 놀려야 했습니다. -아니 엑셀이 있었을텐데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관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네요(웃음). 엑셀쓰자고 어른들에게 건의하면 무조건 손으로도 할 줄 알아야 된대요. 컴퓨터 없을 때는 네가 어떡할거냐는 거죠. <”상상력과 재치” 시황으로 이름을 얻다> -그럼 시황을 본격적으로 쓴 건 언제입니까. ▲브로커팀으로 옮기면서 시황을 쓰게 됐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3개월 정도 전이었어요. 97년 9월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데일리 한편 조그만 귀퉁이에다가 제 이름으로 시황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평이 너무 좋은 거에요. (웃음) -제 기억으로도 호평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네요.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코멘트도 최초로 나왔었죠 아마? 지금도 그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제작한 툴을 가지고 하니까 제 예측이 잘 맞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나름대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도 많이 넣었죠.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때는 그게 장점이었죠. 지금은 단점이 됐지만(웃음) 제가 지금도 “너는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상상을 먼저 해. 그래서 안돼” 질책을 받아요. 그러면서 맨날 깨지거든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데일리 말고 따로 리포트를 쓴 적은 없나요. ▲사실 저는 데일리를 쓸 만한 내공도 가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채권계에 입문해서 뭔가 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정도겠죠. DB 만들고 상관관계 분석하는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첫번째 프리젠테이션은 어디서 했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나요. 한때 많이 불려다니긴 했는데 어디서 처음 했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자주 갔던 곳은 외환, 한미은행 등 은행권이었습니다. -혼자 갔습니까. ▲아뇨. 담당부장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말해주고. 사실 맞았던 적보다 틀린 적이 훨씬 많았어요. 틀렸을 때의 그 창피함, 짜증남이라는 건 말로 못해요. 틀린 것만 가지고도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채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한다고 전해주는 정보가 채권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거죠. 시장도 좁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빤한 곳이 이 바닥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가서 이러저러 말을 하니까 “쟤는 채권수도도 해 본 녀석이고 말은 좀 통하네” 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건 절대 아네요. 전 지금도 투신, 은행권이 어떻게 채권을 사고 파는지 잘 몰라요. 많은 선배들은 제게 “네가 말은 참신하고 조리있게 했지만 실상 은행이나 보험이 그렇게 단순하게 자산운용을 하는 곳이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해줬죠.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뭡니까. ▲우리 시장이 좀 건조하다 보니..제가 장난기가 좀 심한 편이라 의도적으로 코믹하게 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용의 본질은 놓치지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는데. 별루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시황제목을 무척 재미있게 달았던 걸로 기억됩니다만. ▲음 그런 건 있었어요. 외환위기 이후 IMF 고금리 정책을 계속 고수했잖아요. 그 후 분기마다 정책 내용을 바꾸게 됐는데 한번은 영문을 읽어보니까 이번엔 고금리 정책 완화기조로 간다 뭐 이렇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리고 진짜 금리가 내렸습니다. 마침 금리가 하락하는 날 IMF 서울사무소장의 금리하락 멘트도 나갔죠. 그 시점에서 제가 뭐라고 코멘트를 했냐면 “IMF는 Immediate Money-market Fever 다“ 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해 준 거죠.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인터뷰 하편으로 이어짐)
2001.05.04 I 정명수 기자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