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 없는 3.1 운동 주도체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공개한 '독립운동사 제2권'은 3.1 운동의 주도체를 종교 단체와 학생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은 "1919년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협력에 불교와 학생들의 합류가 이어져 3.1 운동의 주도체가 비로소 단일화되었다."고 설명하며 "2월 28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이 선정되었고 독립선언서의 인쇄, 배포 등 거사에 필요한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고 당시 상황을 덧붙였다.
3.1 독립선언서 선포와 함께 만세 운동이 시작됐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현장에 없었고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이 전 대통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3.1 운동이 준비 단계이던 당시 이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있었다. 박은식, 김도형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수일이 지난 3월 10일 서재필로부터 3.1 운동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은 약 한 달 전에 선포된 2.8 독립선언서였다. 국가기록원의 국가지정기록물인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에 따르면 이 선언은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재일본도쿄조선YMCA 회관에서 낭독됐다. 도쿄 유학생이었던 이광수가 대표로 집필했고, 국내에 반입되어 3.1 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2.8 독립선언 역시 이 전 대통령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YMCA가 국제단체인 점을 고려할 때, 같은 단체에서 활동한 이 전 대통령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95년 중앙일보가 기획한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기사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의 YMCA 주 활동은 국내에서 이뤄졌다.
이 전 대통령이 당시 3.1 운동 계획에 함께했던 김성수에게 보낸 '밀서'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지난 2015년 8월 인터넷 언론 '오늘의 한국'은 당시 중앙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이 전 대통령이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라는 밀서를 보냈다고 전했다. 뉴데일리도 지난달 25일 칼럼에서 김성수의 회고록을 토대로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밀서를 다룬 연구 자료는 3.1 운동 연구 전체에 비해 상당히 부족했다.
정치집회 된 범국민대회…설득력 갖기 어려워
CBS 뉴스는 지난 3월 1일 뉴스에서 이 행사를 두고 '사실상 정치 집회'라고 보도했다. 3.1 운동 행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강한 정치, 종교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이 3.1 운동을 일으켰다."라는 주장이 불편부당성과 객관성을 갖춘 시선에서 나온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중심에서 '일으킨' 활동 없어…대체로 사실 아님
자료를 전반적으로 검토했을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이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에서 중심이 되거나,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역사는 없다. 3.1 운동을 다룬 기존 연구에서도 일부 보수 매체가 주장하는 '밀서' 자료를 제외하면, 이 전 대통령과 큰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33인 민족대표 자료에서도 이 전 대통령이 '일으켰다'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또한 범국민대회 행사가 문재인 정권 탄핵을 주장하며 당파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3.1 운동을 일으켰다."라는 주장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따라서 스냅타임 팩트체크는 전광훈 목사의 발언을 '대체로 사실 아님'으로 판단했다. /스냅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