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앙큼한 것을 봤나! 등칡

①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 ''등칡 나무''
등칡만 보고 가실 건가요?
봄밤 비추는 ''야광나무''
나만 보세요 ''함박꽃나무''
  • 등록 2008-05-29 오후 12:03:00

    수정 2008-05-29 오후 12:03:00

▲ 등칡 꽃의 생김새는 독특하다 못해 괴상망측하다. 둥글게 휘어진 꽃송이에 기어들어간 곤충은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고 꽃 동굴 속에서 버둥대기 마련이다. 이 발칙한 식물이라니! / 사진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조선일보 제공] '나무해설도감'을 쓴 윤주복씨와 등칡나무를 보기 위해 찾아간 곳은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에 솟아오른 화악산(華岳山). 한 시간을 걸어올라 등칡과 마주했다.

등칡은 다릅나무 혹은 느릅나무 줄기를 비비 꼬며 휘감고 있었다. 수줍음이라도 타는 걸까. "그럴 리가요. 등칡은 그렇게 얌전한 녀석은 아니에요." 윤주복씨가 고개를 젓는다.

얌전하지 않은 나무라…? 나뭇잎 그늘아래 꽃을 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꽃은 알파벳 U자처럼 휘어진 모양새다. 뭘 닮은 것도 같았다. 꽃을 향해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던 사진기자가 멈칫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너무 야한데…."

■ 야릇한 매혹… 등칡을 만나다

등칡 꽃은 사실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구석이 많다. 등칡에 대한 문헌을 뒤져보면 '처녀는 보면 안 되는 꽃'이라는 얘기도 있고, '향기가 독특해 딱정벌레나 파리가 많이 꼬이는 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옆에서 보면 남성의 상징을, 꽃나팔이 있는 정면에서 보면 반대로 여성의 국부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음흉한 상상력이라고 흉보기엔 생김새가 꽤 그럴듯 하다.

악기를 닮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박상진 경북대 임산공학과 명예교수는 등칡을 두고 "손가락 굵기의 아기색소폰을 닮았다"고 썼다. 트럼펫을 닮았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 그것 참 독한 꽃이로세!

등칡 꽃은 살펴볼수록 더욱 오묘하다. 고개를 돌려 꽃송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 노란색 꽃잎 세 장이 맞붙어 나팔꽃처럼 작은 동굴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굴은 새끼손가락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크기, 곤충은 향기의 꾐에 빠져 이 동굴로 제 몸을 집어넣는다. 들어가긴 쉬워도 빠져 나오긴 쉽지 않다. 수꽃가루를 몸에 묻히고 꽃송이의 동굴로 기어들어간 곤충은 아마도 다시 꽃나팔의 입구로 나가기 위해 버둥거릴 것이다. 그러나 둥글게 휘어진 동굴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쉬울 리 없다. 곤충의 몸에 붙은 수꽃가루는 덕분에 아낌없이 등칡의 암술로 떨어져 내릴 테고, 등칡은 곤충이 버둥거릴수록 수정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 위부터 무당개구리, 도깨비 부채, 다릅나무.
윤주복씨는 "등칡 꽃송이 속에 더욱 놀라운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꽃송이를 세로로 잘라 봤다. 등칡의 단면은 겉모습보다 화려했다. 암술이 붙어 있는 꼭지부분과 꽃잎이 감싸고 있는 동굴의 입구는 자줏빛이 감도는 갈색, 꽃송이가 휘어진 가운데 부분만 흰 빛깔이다.

단면을 아래에서 바라보면 더욱 재미있다. 암술이 붙어있는 꼭지 부분은 좀 더 밝고 환한 빛인데 비해 꽃잎으로 열려 있는 동굴의 입구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어두워 보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곤충의 눈에서 보면 아무래도 더 밝은 곳으로 나가려고 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기어올라간 곳이 동굴의 입구가 아니라 정 반대인 암술꼭지인 거죠."

탈출할 수 없는 꽃의 동굴…, 한번 들어온 곤충은 아무리 밝은 빛을 향해 기어올라도 그 곳이 바깥세상이 아닌 꽃의 중심일 뿐임을 깨닫고 절망했을까.

알면 알수록 야릇한 나무, 등칡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직도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우리가 '나무기행'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등칡을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등칡, 살짝 들춰보니

■ 요것, 이름 값 좀 합니다

'등칡'이라는 이름에 등나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칡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등칡은 등나무도 아니고 칡도 아니지만, 두 식물 모두를 조금씩 닮았다.


등칡은 낙엽이 지는 덩굴나무다. 덩굴지는 줄기는 등나무처럼 친친 감기면서 10m까지 뻗어나가고, 잎은 칡처럼 생겼지만 좀 더 작다. 그래서 등칡이라고 이름 붙었다는 설도 있다.


등나무는 자기 힘으로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어딘가에 의지해 자라는 식물이다. 이런 성질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등나무가 '부부의 애정'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한국의 나무 문화'의 저자 송홍선씨는 '예부터 사이가 나쁜 부부에겐 등나무를 삶은 물을 마시게 하는 풍습도 전해 내려온다'고 썼다. 한편 칡은 덩굴줄기가 워낙에 질긴 덕에 강원도 영월지방에서 줄다리기 끈으로 쓰기도 했다.

등칡도 이 두 식물의 성질을 조금씩 닮았다. 둥글게 말린 나뭇잎은 온전한 하트 모양, 그야말로 등나무처럼 '애정의 상징'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줄기는 또 어떤가. 칡보다 질긴 것은 기본, 그런데 줄기의 감촉은 보드랍고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줄기의 껍질이 두꺼운 코르크 질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요게 겉과 속이 다른 대표적인 줄기에요. 만지면 말랑말랑하지만 속을 까보면 놀랍죠." 윤주복씨가 등칡의 죽은 줄기 하나를 채집해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 어딜 보나 '팜므 파탈'

"이야…" 탄성이 나왔다. 껍질을 벗은 등칡 줄기는 앙큼하기 짝이 없다. 말랑말랑한 피부 아래 납작하고 단단한 노끈을 겹겹이 포개놓은 것 같은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구, 이거 보통이 아닌데…." 혀를 내두를 만큼 질기디 질기다.

그러고 보니 등칡은 참 어딜 보나 '팜므 파탈'을 닮았다. 야릇한 꽃송이의 생김새는 그렇다 치고, 곤충이 지칠 때까지 밖으로 쉽게 내보내주지 않을 만큼 독한 데다, 끈질긴 속살의 줄기까지 감추고 있지 않나. 이뇨 작용을 돕고 통증을 막아주는 한약재로 쓰이는 동시에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성분도 살짝 몸에 품고 있어 사용이 제한된다고 하니, 과연 등칡은 쉽게 볼 나무가 아니다.

▲ ①등칡 꽃을 자른 단면. 가운데만 희고 꼬투리와 꽃나팔 입구는 자줏빛을 띤 자갈색이다. ②아래에서 바라본 단면. 환한 동심원처럼 생긴 부분이 암술이 있는 꽃의 중심부다. 꽃 동굴에 들어온 곤충이라면 밝은 곳을 입구라고 착각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끝내 나가지 못하고 낙담하지 않을까. ③단단한 노끈을 겹쳐놓은 것 같은 등칡의 속줄기

■ 혼자 잘났다고? 층층나무

화악산 숲으로 올라가는 길, 눈 돌릴 때마다 더 높이 더 길게 가지를 뻗은 나무가 눈에 띄었다. 가지마다 자잘하게 매달린 흰 꽃 무더기가 어찌나 풍성한지 마치 양탄자 조각을 덧대놓은 것만 같다. 한 눈에도 튀는 이 나무는 다름 아닌 층층나무.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윤주복씨는 "숲 속에 빈터가 생기면 먼저 들어와 쑥쑥 자라고 가지를 펼쳐 햇빛을 독차지하는 나무"라고 했다.

이런 나무를 숲의 선구자라는 뜻으로 '선구수종'이라고 부르거나, 숲의 무법자라는 뜻으로 '폭목(暴木)'이라고 부른다고. 역시 저 혼자 잘난 녀석은 결국 폭군이 되는 법인가.

■ 티 나게 생겼다, 난티나무

화악산에선 느릅나무의 사촌 격인 '난티나무'도 쉽게 볼 수 있다. 잎사귀만 봐도 난티나무는 이름처럼 티가 난다. 잎 끝부분이 뾰족하게 튀어나오면서 3~5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꼭 물갈퀴처럼 생겼다. 나뭇가지에 개구리 발바닥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같다.

■ 보송보송 솜털 가득한 다릅나무

하얗게 센 할머니의 머리칼 같은데, 이게 나무의 새순이다. 다릅나무의 새움은 잿빛인 동시에 보랏빛이고 은빛으로 빛나는가 싶은데 초록빛이다. 이렇게 오묘한 빛깔을 내는 건 다름아닌 보송보송한 흰털이 잎사귀 표면에 가득 붙어 있기 때문.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면 이 솜털도 점점 사라져, 나중엔 진한 초록색으로 변한다고. 

▲ ④수꽃이 샹들리에처럼 주렁주렁 늘어진 가래나무. ⑤물갈퀴처럼 생긴 잎사귀가 특이한 난티나무. ⑥봄밤을 환히 밝히는 야광나무. ⑦소담한 꽃송이가 탐스럽다, 함박꽃나무. ⑧긴 병을 닮은 붉은병꽃나무. ⑨무당개구리, 등은 점박이 초록색이지만 배는 새빨갛다. ⑩거품 속에 몸을 감추는 거품벌레.
 
■ 봄밤을 밝힌다, 야광나무

"푸른 하늘 아래에선 귀룽나무를 봐야 하고, 봄밤엔 야광나무를 봐야 하죠."

윤주복씨의 말이 시처럼 들렸다. 야광나무는 눈부신 흰 꽃이 밤에도 환하게 빛나, 이 나무 아래 서면 어두운 줄 모른다. 나무와 꽃을 좋아하는 이들은 '봄밤에 야광나무 아래 둘러앉아 술 한 잔 나눠 마시는 것이야말로 낭만의 극치'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다.

■ 한눈에 반하는 함박꽃나무

주먹만한 크기의 꽃이 소담하게 피었다. 눈부신 꽃송이가 함박꽃(작약)을 닮았다고 해서, 함박꽃 나무. 죽은 김일성 주석이 이 꽃 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북한의 나라꽃으로 정하기도 했다.(북한에선 '목란'이라 부른다)

활짝 벌어진 수술은 수평으로 붉게 벌어졌고, 눈부신 꽃잎은 한데 모여 풍성하다. 미처 벌어지지 않은 꽃봉오리가 마치 케이크 위에 짜놓은 생크림 같았다. 산에 피는 목련이라, 산목련나무라고도 한다. 간혹 일본 목련나무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 자생꽃이다.

■ 날 때부터 타오른다, 붉은병꽃나무

화악산 어귀 여기저기 피어있는 붉은 꽃들은 대부분 병꽃나무였다. 병꽃나무는 날 때부터 붉은 녀석이 있고, 희게 피었다가 점점 붉게 타오르는 녀석이 있다. 날 때부터 붉은 꽃을 '붉은병꽃나무'라고 부른다. 꽃도 세워놓은 병을 닮았지만, 열매도 사이다병처럼 생겼다.

■ 새빨간 배 예쁘기만 한 무당개구리

숲으로 난 오솔길 중턱, 웅덩이에 개구리가 잔뜩 모여 있었다. "앗, 청개구리인가요?" "아뇨, 이건 무당개구리인데요."

검은 점무늬를 뒤집어쓴 개구리 하나를 살짝 들어 뒤집었다. 세상에 배가 새빨갛다! 스파이더맨이 뒤집어쓰는 변신 의상을 연상시켰다. 배가 이렇게 새빨간 것은 적이 나타나면 몸을 뒤집어 위협하기 위해서라는데. 웬걸, 예쁘기만 하잖아.

■ 살아남기 위해 숨는다, 거품벌레

나무마다 거품이 잔뜩 붙어 있었다. 무식한 탓에 첨엔 누가 숲에서 비누방울이라도 엄청 불고 갔나 보다 했다. 이건 거품벌레의 소행이다. 배 끝에서 나오는 액체를 공기로 부풀려 흰 솜털 같은 거품을 내는 건 천적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살아남기 위해 거품벌레는 부지런히 그렇게 숨고 또 숨는다.

◆ 화악산에 등칡 보러 가려면

서울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내까지 진입, 화악리 방향 대신 가평군 도대리 방향으로 간다. 강원도 화천군으로 진입해, 도마치 고개를 넘어 화천군 사내면에서 삼일계곡으로 올라가면 화악산 중턱으로 들어서는 작은 숲길이 나온다.
길 초입부터 고추나무와 박쥐나무, 가래나무, 병꽃나무, 난티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한 시간 가량 걸어 올라가면 길 끝에 여러 그루의 등칡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이번 주가 지나면 화악산 등칡 꽃은 질 가능성이 높다. 등칡 꽃을 보러 나선다면 서두르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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