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진의 Tour & Culture)흰 국화 한 송이와 가위

  • 등록 2009-06-01 오전 11:21:25

    수정 2009-06-01 오전 11:21:25

[이데일리 정장진 칼럼니스트] 국민일보가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를 인터뷰했다. 재임 기간 동안 매주 한 번씩 청와대로 들어가 머리를 손질하신 분인데,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아내와 함께 울어버렸고 봉하 마을에도 문상을 다녀왔다고 한다. 흰 국화 한 송이와 가위가 함께 놓여 있는 사진이 곁들여진 이 기사를 보니 언젠가 봤던 영화 <효자동 이발사>가 떠오른다.

어쩌면 가장 슬펐을 사람인지도 모른다.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만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접촉이었겠지만 손님이 대통령이었으니 직업적인 접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고인이 되셨으니……

퇴임이 임박했을 때 이발사 아저씨께서 "고향 가셔도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서 머리 만져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는 "허허. 그럴 필요 없어요. 번거롭기만 하죠.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했단다. 또 "그냥 말씀 낮추세요."라고 해도 노 전 대통령은 "그게 잘 안됩니다. 그냥 갑시다."라며 웃어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젠 서민적이고 소탈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좀 참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쏟아내던 직설적인 화법도 이젠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자전거 타는 모습도, 밀집모자 쓴 촌노 모습도, 구멍가게에서 담배 문 모습도, 여대생들과 개다리 폼으로 사진 찍던 모습도 사진으로만 남았다.

머리칼의 의미

프랑스 소설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소설에 <고리오 영감>이라는 가슴 뭉클한 소설이 있다. 두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몹쓸 세상을 만나 두 딸로부터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아 개처럼 죽어가는 한 노인을 그린 소설이다. 이 노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속옷을 벗기니 젊어서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을 잘라 만든 목걸이가 나왔다. 목걸이 끝에는 아내가 죽었을 당시 코흘리개 아이들이었던 두 딸의 연한 머리칼을 잘라 담은 작은 합이 달려있었다. 고리오 영감은 이 목걸이를 수십 년 그렇게 목에 걸고 살아왔던 것이다.

▲ 발자크의 생전모습과 그의 묘

19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 소설은 소설보다 200여 년 앞서 쓰여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자본주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평생 고리오 영감의 목에 걸려있던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로 만든 목걸이와 두 어린 딸의 머리칼은 사실은 죽은 아내를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한 단순한 정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걸이는 평생 고리오 영감의 목에 걸린 채 고리오의 목을 조여왔던 것이며 죽을 때가 된 그 시점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고 그리고 영감은 죽는다. 죽은 여인의 머리칼은 죽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목걸이 끝에 걸려있던 어린 두 딸의 가녀린 머리칼은 반대로 삶이었다. 평생을 두 딸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며 새 장가드는 것도 마다하고 귀족집 자녀들 못지않게 키워낸 고리오였다. 최고급 마차에 태워 최고급 가정교사를 붙여서 공부를 시켰고 시집을 갈 때도 엄청난 지참금을 쥐어 보냈으며 사위들이 싫어한다고 스스로 물러나 하숙집에 들어와 홀로 살았다. 시집 간 두 딸이 어려운 눈치를 보이면 갖고 있던 채권, 연금 증서 등을 팔아 목돈을 쥐어 보냈고 나중에는 죽은 아내와 함께 사용하던 은식기마저 팔고 급기야는 곰팡이가 슨 불어로 ‘망사르드’라고 하는 다락방으로 옮겨 살다가 숨을 거둔다. 그런데도 두 딸은 장례식에도 와보지 않았다. 무도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몹쓸 놈의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 딸을 무릎 위에 앉힌 고리오 영감 (소설의 삽화)

▲ '망사르드'라 불리는 파리의 다락방

이 소설에서 두 딸은 삶 그 자체였다. 고리오는 두 딸 때문에 살았던 것이다. 두 딸은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난 두 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고도 했고 “두 딸을 멀리서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고도 했다. 그 아버지를 두 딸은 버린 것이다. 수의 살 돈이 없어 하숙생 청년 한 사람이 대신 돈을 내고 장례까지 치러준다.

이 소설에서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로 만든 목걸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다름 아니라 아내의 유일한 체취가 남아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이 현실에 대한 그것과 같을 수 없지만, 때론 현실 속에 숨어서 상징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상징은 죽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발사 아저씨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고인을 만지고 숨결을 느꼈던 그 분의 슬픔이 어떤 누구보다 각별하고 컸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면도도 해드렸을 것이고 귀소지도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귀도 만졌고 넓적한 노짱의 코도 만졌을 것이다. 이발사 아저씨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멀리서 TV나 사진을 통해서 눈으로만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노짱의 모습이 냄새와 감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많은 사람들이 너무 슬퍼한다. 이 슬픔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눈물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전직 대통령들은 국가 재산인데 왜 이렇게 어른들로서의 그리고 상징으로서의 존엄과 위엄을 지키지 못 하는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이 존엄이나 위엄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직들도 있다. 그러나 노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 않았는가. 차떼기 같은 것도 하지 않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살벌한 세상이 되었는지. 왜 이렇게 국민들을 애타게 만들고 조마조마하게 하는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은 전직이든 아니든 모두 대통령인 것이다. 그들은 자살할 자유도 권리도 없다.

그리고 상징은 죽지 않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 상징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민심도 이 상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효자동 이발사>의 입에서는 불식간에 “각하도 너무 오래 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각하께서 “같은 머리를 너무 오래 하지 않았나?”라고 말하자 답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인데, 감독은 어쩌면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인식은 의외로 예리하며 그 인식은 언젠가 말이 되어 입에서 툭 튀어나온다. 국화 꽃 옆에 가위가 놓이고, 불 붙인 담배가 놓이고 소탈한 사진들이 뒤를 잇고 있다. 이 언어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문화·예술 포탈 레 바캉스(www.lesvacances.co.kr) 대표 정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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