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슬펐을 사람인지도 모른다.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만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접촉이었겠지만 손님이 대통령이었으니 직업적인 접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고인이 되셨으니……
퇴임이 임박했을 때 이발사 아저씨께서 "고향 가셔도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서 머리 만져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는 "허허. 그럴 필요 없어요. 번거롭기만 하죠.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했단다. 또 "그냥 말씀 낮추세요."라고 해도 노 전 대통령은 "그게 잘 안됩니다. 그냥 갑시다."라며 웃어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젠 서민적이고 소탈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좀 참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쏟아내던 직설적인 화법도 이젠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자전거 타는 모습도, 밀집모자 쓴 촌노 모습도, 구멍가게에서 담배 문 모습도, 여대생들과 개다리 폼으로 사진 찍던 모습도 사진으로만 남았다.
머리칼의 의미
프랑스 소설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가 쓴 소설에 <고리오 영감>이라는 가슴 뭉클한 소설이 있다. 두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몹쓸 세상을 만나 두 딸로부터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아 개처럼 죽어가는 한 노인을 그린 소설이다. 이 노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속옷을 벗기니 젊어서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을 잘라 만든 목걸이가 나왔다. 목걸이 끝에는 아내가 죽었을 당시 코흘리개 아이들이었던 두 딸의 연한 머리칼을 잘라 담은 작은 합이 달려있었다. 고리오 영감은 이 목걸이를 수십 년 그렇게 목에 걸고 살아왔던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 소설은 소설보다 200여 년 앞서 쓰여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자본주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평생 고리오 영감의 목에 걸려있던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로 만든 목걸이와 두 어린 딸의 머리칼은 사실은 죽은 아내를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한 단순한 정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걸이는 평생 고리오 영감의 목에 걸린 채 고리오의 목을 조여왔던 것이며 죽을 때가 된 그 시점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고 그리고 영감은 죽는다. 죽은 여인의 머리칼은 죽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목걸이 끝에 걸려있던 어린 두 딸의 가녀린 머리칼은 반대로 삶이었다. 평생을 두 딸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며 새 장가드는 것도 마다하고 귀족집 자녀들 못지않게 키워낸 고리오였다. 최고급 마차에 태워 최고급 가정교사를 붙여서 공부를 시켰고 시집을 갈 때도 엄청난 지참금을 쥐어 보냈으며 사위들이 싫어한다고 스스로 물러나 하숙집에 들어와 홀로 살았다. 시집 간 두 딸이 어려운 눈치를 보이면 갖고 있던 채권, 연금 증서 등을 팔아 목돈을 쥐어 보냈고 나중에는 죽은 아내와 함께 사용하던 은식기마저 팔고 급기야는 곰팡이가 슨 불어로 ‘망사르드’라고 하는 다락방으로 옮겨 살다가 숨을 거둔다. 그런데도 두 딸은 장례식에도 와보지 않았다. 무도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몹쓸 놈의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두 딸은 삶 그 자체였다. 고리오는 두 딸 때문에 살았던 것이다. 두 딸은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난 두 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고도 했고 “두 딸을 멀리서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고도 했다. 그 아버지를 두 딸은 버린 것이다. 수의 살 돈이 없어 하숙생 청년 한 사람이 대신 돈을 내고 장례까지 치러준다.
이 소설에서 사별한 아내의 머리칼로 만든 목걸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다름 아니라 아내의 유일한 체취가 남아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이 현실에 대한 그것과 같을 수 없지만, 때론 현실 속에 숨어서 상징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상징은 죽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슬퍼한다. 이 슬픔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눈물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전직 대통령들은 국가 재산인데 왜 이렇게 어른들로서의 그리고 상징으로서의 존엄과 위엄을 지키지 못 하는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이 존엄이나 위엄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직들도 있다. 그러나 노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 않았는가. 차떼기 같은 것도 하지 않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살벌한 세상이 되었는지. 왜 이렇게 국민들을 애타게 만들고 조마조마하게 하는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은 전직이든 아니든 모두 대통령인 것이다. 그들은 자살할 자유도 권리도 없다.
그리고 상징은 죽지 않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 상징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민심도 이 상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효자동 이발사>의 입에서는 불식간에 “각하도 너무 오래 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각하께서 “같은 머리를 너무 오래 하지 않았나?”라고 말하자 답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인데, 감독은 어쩌면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인식은 의외로 예리하며 그 인식은 언젠가 말이 되어 입에서 툭 튀어나온다. 국화 꽃 옆에 가위가 놓이고, 불 붙인 담배가 놓이고 소탈한 사진들이 뒤를 잇고 있다. 이 언어들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문화·예술 포탈 레 바캉스(www.lesvacances.co.kr) 대표 정장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