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견제 없는 남양 '홍원식 왕국'의 추락…'보스경영' 부메랑

44년 유업계 헌신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불명예 퇴진
임원 최소화한 실리 경영 추구하고 의사결정 주도
제품으로 승부하다 전략 실패 반복하며 연거푸 타격
"의사결정 분산·검증은 기본…남양유업은 기본의 문제"
  • 등록 2021-05-05 오후 5:30:17

    수정 2021-05-05 오후 9:17:57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남양유업 임직원은 두 부류다. 회장과 직원. 입바른 소리 할 임원이 없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지난 4일 임기를 남기고 물러나자 이런 평가가 나온다. 그는 이날 두 아들에게도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히며 흐느꼈다. 44년을 유(乳)업계에 헌신한 이의 말로치고는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밀어내기’, ‘경쟁사 비방’, ‘과장광고’ 등 패착을 반복한 탓이다. 그를 사의로 몰고 간 표면적인 원인은 여럿이지만, 근원은 한 가지다. 그릇된 의사 결정을 바로잡을 만큼 조직을 건강하게 키우지 못한 탓이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에서 ‘불가리스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남양유업은 최근 자사 유제품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억제에 효과적이라고 발표해 물의를 빚었다.(사진=방인권 기자)
카리스마로 장악한 조직

남양유업 임직원 조직도를 보면 그의 퇴진은 예견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6일 남양유업 사업보고서를 보면, 지난 3일 사임한 이광범 사내이사는 사내에서 대표이사(직책) 상무(직위)를 맡아왔다. 대외적으로 조직을 대표하는 대표이사에게 상무 직위는 가벼운 편이다. 물론 직책에 따른 직위는 회사 재량이다. 그러나 경쟁기업인 매일유업의 김선희 대표이사의 직위가 사장인 것과 비교된다.

최근 안팎으로 조직이 흔들려서 직위가 내려간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 회사는 홍 회장이 경영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임원 자리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고자 애써왔다. 특히 회사의 부사장과 사장 직급은 사사(社史)를 거슬러보더라도 공석인 경우가 많았다. 홍 회장이 1990년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200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 이래 빈자리로 두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1990년부터 올해까지 사업보고서 상에 부사장은 2004~2008년 박건호 대표이사가 유일했고, 사장은 없다. 남양유업에서 전무를 다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조력자 없는 ‘카리스마 경영’은 ‘홍원식 리더십’으로 평가받았다. 임원이 주도(형식)하는 조직은 품질(실질)을 좇기 어렵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고 업계는 전한다. ‘부사장 없는 회사’는 한때 남양유업의 자랑이었다. 배경을 홍 회장의 검소한 행실에서 찾기도 한다. 그는 사장 승진 이래 책상과 소파만 둔 열 평 남짓한 집무실에서 비서도 없이 일했다고 한다. 홍 회장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소탈한 행보에 대해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이 아닙니까”라고 했다.(동아일보 1998년 1월3일자)

제품과 전략, ‘갈림길’에서

그의 카리스마 경영을 앞세운 남양유업은 유업계 부동의 1위를 달렸다. 남양유업이 환란을 겪은 1998년 매출과 영업익이 성장하고, 숱한 기업이 부도하는 와중에 은행빚을 모두 갚는 ‘무차입 경영’을 편 것은 홍 회장(당시 사장) 수완으로 꼽힌다. 의사결정과 실행을 주도한 덕에 이런 대응이 가능했다. 홍 회장이 사장으로 취임한 남양유업은 경쟁사 매일유업을 늘 매출로 앞섰다. 매출 1조원 달성도 남양유업(2010년)이 매일유업(2012년)보다 빨랐다.

(그래픽=김정훈 기자)
둘의 전세가 역전한 것은 2013년 ‘밀어내기 영업’이 도마에 오르면서부터다. 코너에 몰린 홍 회장이 선택한 것은 제품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관행으로 자행하던 강매가 드러났는데, 남양유업의 대응은 뜻밖이었다. 피해자 가맹점주에게 사과하는 대신 고소로 맞선 것이다. 남양유업 불매 운동이 일었다. 김웅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뒤늦게 사과했다. 홍 회장은 없었다. 그해 매일유업이 남양유업을 사상 처음으로 매출에서 앞질렀다.

유업계 관계자는 “홍 회장은 대표적인 은둔 기업인”이라며 “제품만 믿었던 인물이 전략에 손을 대면서 스텝이 꼬였다”고 평가했다.

비방 전략도 회사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해 터진 ‘경쟁사 비방’은 부메랑이 돼 회사에 타격을 줬다. 유업계는 출생률이 저하해 모두가 생존을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홍 회장만 유독 초조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기를 제품으로 돌파할지, 전략으로 우회할지는 선택 사항이었다. 매일유업은 단백질을 내세워 건강·기능식 시장을 창출하고 선점했다. 남양유업은 반대였다. 한 식품회사 임원은 “남양유업 마케팅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의사결정 ‘분산·검증’ 미비

돌이켜보면 남양유업을 둘러싼 갖은 풍파 가운데 제품에서 탈이 난 사례는 없었다. 앞서 식품회사 임원은 “유업계가 아무리 어려워도 남양유업이 인수합병 매물로 나오면 흥행할 것”이라며 “제품 퀄리티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사 결정 과정이 문제였다. 실수는 반복하면 악수가 된다. 남양유업은 실수가 쌓이는 동안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물론 업계 관계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기업에서 오너 지시를 반박할 샐러리맨은 없다”. 결정이 곧 실행이라는 의미다. ‘부사장도 없고 사장도 없는’ 실리를 표방하는 동안 남양유업은 ‘제동 장치’라는 최소한의 형식마저 갖추지 못했다. 카리스마 경영의 반대말은 독단 경영이다.

이사회가 허술하기도 마찬가지였다. 구순이 넘은 홍 회장 모친이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것은 후진 지배구조의 단면이다. 모자 관계로 얽힌 상황에서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감시했다. 그나마 그의 모친은 이사회에 매해 불참했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이번 ‘불가리스 파동’은 시점의 문제였을 뿐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지배구조가 흔들리는 동안 남양유업의 지난해 매출(9489억원)은 2008년(8833억원) 수준으로까지 쪼그라들었다. “구시대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홍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사퇴의 변이다.

익명을 요구한 지배구조를 연구하는 학자는 “경영진의 의사 결정 권한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하고, 이사회가 검증하도록 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것은 주식회사 경영의 기본”이라며 “남양유업 사태는 기본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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