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여인, 팔리는 여인[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22>

▲피터르 아에르천, 에드윈 롱의 '시장'
아에르천의 풍속화 '시장'과 '요리사'
주체적인 상인여성의 강인함 표현해
에드윈 롱의 '바빌로니아의 결혼시장'
고대 매매혼 풍습 속에 참담한 여인들
파느냐 팔리느냐, 여인 향한 양극시선
  • 등록 2022-02-05 오전 12:01:01

    수정 2022-02-05 오전 10:09:21

피터르 아에르천이 1569년에 그린 ‘시장’. 종교·신화적 작품이 주를 이뤘던 16세기, 생기 넘치는 정물들의 ‘시장풍속화’로 이름을 날린 아에르천은 상인·농부의 삶과 일상 역시 많이 남겼다. 그 시장풍속화 중 한 점인 작품은, 지금으로 치면 청과물상 풍경쯤 된다. 한순간 멈춰 세운 ‘사진기법’인 양 선명하고 또렷한 묘사가 특징이다. 매대에 늘어놓은 다채로운 채소·과일 외에도, 부부 상인과 뒤쪽에서 내다보는 손님 등 인물을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무패널에 유채, 86×169㎝, 스웨덴 스톡홀름 할빌박물관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큐레이터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시장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점포를 가지고 가지런히 물건을 내놓은 상인들도 있지만, 가판대에 소쿠리를 얹어 빼곡하게 농수산물을 늘어놓고 즉석에서 손질해가며 손님을 불러모으는 상인들은 하루치를 떨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바쁘다. 한 줌을 팔고 기분이 내키면 한 줌을 더 얹어주기도 하고, 애매하게 매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이걸 저렇게 해서 먹으면 된다고 요리법을 조언해 주기도 한다. 이러저런 유통과정을 거쳐 예쁘게 포장해 판매히는 것보다 모양은 울퉁불퉁하지만 어쩐지 시장에서 산 것들은 더 맛있게 느껴진다.

세계 어디에서나, 또 과거나 현재나 시장의 모습은 비슷하다. 암스테르담과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던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아에르천(1508∼1575)은 시장의 다양한 먹을거리와 상인 모습에 매료돼 여러 점의 시장 그림을 남겼다. 1569년에 그린 ‘시장’에선 한 건물 앞에서 가판대를 만들어 각종 청과를 판매하는 부부 상인의 모습이 보인다. 당근을 비롯한 뿌리채소와 오이·호박·양배추·포도에 이르기까지 뒤엉킨 채소와 과일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비슷한 종류끼리 모아뒀지만 아직 완전히 정리가 된 것 같지는 않고, 막 도착해서 좌판을 펼쳐 정리하는 과정처럼도 보인다. 화면의 오른쪽에 여인이 한창 칼을 들고 양배추를 손질하는 중이다.

창을 든 무사를 연상케 하는 시장의 여인들

그림의 놀라운 점은 스냅사진을 방불케 하는 순간성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이러한 느낌은 과일이나 채소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기보다는 허리를 굽혀 채소를 손질하는 여인의 눈빛 때문이다. 손이 바쁜 중에도 자신을 쳐다보는 화가의 눈길을 맞받아치는 여인의 눈빛은 어딘지 매섭고 단단하다. 힘을 쏟느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지만 턱선과 눈 주위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강인한 인상이다. 뒤쪽에 당근을 든 사내가 산만해 보이는 것에 반해, 여인은 칼을 든 손의 팔꿈치를 낮은 담장에 걸치고 꽤 안정적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모습이다. 사진의 발명이야 수백 년 뒤라 화가는 시장에서 본 여인의 순간적인 표정을 기억에 담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을 쳐다보는 화가의 눈길이 거추장스럽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눈빛은 그림에 확실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의 장면을 바라보는 미술사가와 비평가의 ‘깊이 있는’ 해석은 종종 결을 달리하는 것 같다. 일종의 프로이트적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 남근을 연상케 하는 당근을 남성이 들고 있는 점, 둥근 양배추를 여성이 손질하고 있다는 점, 여성의 상의 앞섶이 잘 여며져 있지 않고 허리를 굽혀 가슴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그림에 에로틱한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과일이나 둥근 기물을 여성 신체의 유비로 사용했던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이런 해석에도 일리가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이 장면이 너무 분주하지 않은가.

일하러 집 밖에 나선 여성에게 수작을 거는 장면은 이 시기 장르화에서 많이 그리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칼을 들고 매몰찬 눈빛을 보내는 이 여인에게 지분거리다가는 혼쭐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에르천은 특이하게도 일하는 여성들, 흔히 말해 낮은 계급의 여성을 만만해 보이게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요리사’(1559)에는 일하는 여인, 아마도 어느 집의 하녀일 것으로 추정하는 여인이 쇠꼬챙이에 닭과 염소 고기를 꿰어 들고 등장한다.

피터르 아에르천의 ‘요리사’(1559). 시장풍속화로 이름을 날린 아에르천이 활동한,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안트베르펜에는 농축산물은 물론 사치품, 상인들이 몰렸고, 그는 시대적 흐름과 풍경을 잘 잡아냈다. 작품은 쇠꼬챙이에 꽂힌 고깃덩어리와 대비되는 위풍당당한 시장여인을 등장시켜 시선을 끈다. 나무패널에 유채, 171×85㎝, 이탈리아 제노바 팔라초 비앙코 소장.


이 장면은 얼핏 보면 창을 들고 있는 무사의 자세를 연상케 한다. 여인의 모습에서 수줍어하거나 조아리며 굽실거리는 면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소매를 위쪽으로 바싹 걷어붙이고 쇠꼬챙이를 든 자세는 오히려 숙련된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 젊은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귀족처럼 당당한 품격이 느껴질 정도다. 비록 앞치마와 손에는 고기냄새가 배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들의 이러한 뚝심 있는 모습에 아에르천은 경외감을 표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성이 시장의 주체로 일을 하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상품이 돼 팔려나가는 시장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19세기 영국 화가 에드윈 롱(1829∼1891)은 역사책에 등장하는 과거 먼 나라 바빌로니아에서의 여성 매매 시장을 상상으로 그렸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행해졌다는 매매혼의 풍습을 전해 들은 뒤 헤로도토스의 역사기록에 영감을 받았다는 ‘바빌로니아의 결혼시장’(1875)이다. 이 장면에 박진감을 더하기 위해 롱은 대영박물관의 고대 유물을 정성 들여 관찰해 그림 속 배경으로 삼았다.

롱은 영리하게도 사려는 자와 팔리는 자, 모두를 잘 보여주기 위해 경매대의 뒤편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여성들을 화면의 전면에 내세웠다. 아마도 그중 한 명이었을 한 여성은 경매대에 서 있다. 머리에 드리운 반투명한 천을 걷어 얼굴을 보이는 중에 상인은 ‘상품’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치마 위에 둘러싼 천을 벗겨내고 있다. 연단에 있는 경매사의 자세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인다. 손을 내밀어 상품이 된 여성을 가리키며 특징을 설명하고 있고, 다른 손에는 작은 종을 쥐고 경매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있다.

에드윈 롱의 ‘바빌로니아 결혼시장’(1875). 롱은 19세기 빅토리아시대에 성공한 화가로 꼽힌다. 스페인과 이집트, 시리아 등 중동국가를 여행하며 서민의 일상을 그린 장르화, 동양적 분위기의 역사화나 종교화가 런던 미술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작품은 고대 바빌론·아시리아지역에서 경매로 여성을 사 결혼하던 풍습을 그린 역사화. 그리스 역사가인 헤레도토스의 기록 등에서 찾아낸 세부요소를 넣어 공감의 여지를 높였다. 캔버스에 유채, 172.6×304.5㎝, 영국 런던 로열홀로웨이 런던대 소장.


두려움·체념·분노…팔려가는 여인들의 각양각색 표정

남성들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신중하게 여성을 훑어보고 있으며, 자신이 가져온 귀한 물건과 바꿀 가치가 있는지 탐색 중이다. 화면 왼쪽 검은 수염의 남성은 눈길을 여성에게 둔 채 자신의 보석함을 열어 목걸이를 감정사에게 내밀고 있다. 과연 이미 거래를 시작한 이 남성이 여성을 차지할지, 중앙에서 두 손을 모으고 홀린 듯한 제스처를 취한 남성이 최종 낙찰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실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사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팔리기 위해 매대 뒤쪽에 줄지어 앉은 여성들이다. 여성들의 표정과 제스처는 제각각이다. 바로 다음 순서에 오르게 될 여성은 반쯤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고, 다음 여성은 거울을 보며 얼굴을 점검하고 있다. 어떤 남성이 자신을 사갈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뒤돌아 앉은 상태로 기다리는 여성들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암담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을 한 이들도 있으며, 맨 끝 여성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야 참담하지만 제3자가 보기엔 그저 진기한 풍경일 뿐이다. 재산으로 여성을 살 수 있던, 축첩도 허용한 고대 먼 나라의 풍습이라니. 게다가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은 경매에 참여한 남성들보다 자유롭게 무대 뒤 여성들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으니 훔쳐보는 재미까지 더하지 않겠나. 하지만 동시대의 모든 도덕감을 물리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이 그림은 무엇 때문에 그려졌을까.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억센 여인들보다, 팔리기 위해 치장하고 앉은 여성들이 눈을 더 즐겁게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벌어졌다면 당장 잡혀갈 일이지만, 까마득히 오래전 먼 나라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죄가 아니니까 말이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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