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고 빠진' 광기의 낙서, 시대 아이콘 되다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전
32세 요절 80년대 미국 팝아티스트
굵고 간략하게 사람·동물 등 상징
에이즈 예방, 마약·폭력 경고 담아
'지하철 낙서' 등 평면·조각 175점
  • 등록 2018-11-26 오전 12:12:02

    수정 2018-11-26 오전 4:46:47

키스 해링이 홍콩 사진작가 쳉퀑치(1950∼1990)가 촬영한 ‘스케이트보드 위의 해링’(1986·2012년 재인화)이란 작품 속에 섰다. 오른쪽은 해링의 ‘무제’(1985). 인간 군상을 한 데 엉켜 놓아 ‘피플’로도 불리는 ‘무제’는 무슬린에 아크릴·오일의 현란한 색채로 꾸며낸, 가로세로 3m가 넘는 대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순식간에 치고 빠지는 식이었다. 역무원이나 경찰의 눈을 피해 잽싸게 그린 뒤 ‘튀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뭔가 그릴 만한 공간이 보이면 재빨리 내려 흔적을 남긴 뒤 유유히 사라졌다. 공공장소를 캔버스로 삼았으니 당연했다. 지금이야 스트리트아트니, 그래피티니, 공공벽화니, 제대로 된 이름도 달아주고 일부러 벽도 내준다지만, 그땐 1970년대 끝 무렵, 1980년대 초입이었다. 아무 데나 그려댄다는 이유로 잡혀갈 수도 있던 때였다. 실제 붙들려 수갑까지 차는 일도 ‘수시로’였단다.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후다닥 던지는 ‘낙서’였으니까. 굵고 간략한 형태로 단순하게 표현한 사람과 아기, 동물과 텔레비전. 가끔은 천사도 있고. 그런데 이 ‘지하철 낙서’가 서서히 입소문을 타면서 ‘대박’을 터트린 거다. 유심히 그를 지켜보던 한 화상이 나섰다. 상업적으로 승산이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뉴욕 소호 갤러리로 이끈 그 화상의 손을 잡고 ‘낙서꾼’은 1982년 대규모 첫 개인전을 연다. 온갖 낙서를 다 꺼내놓은 것도 화제였지만 더 주목받은 건 그 전시를 둘러보러 나타난 인물 면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당대 난다 긴다 한 거장급이 총출동한 것이다.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다시는 역무원과 경찰에 쫓겨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은 없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첫 개인전 후 8년,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에이즈 합병증이었다.

키스 해링의 ‘무제’(1982). 지하철 드로잉 느낌 그대로 검정 목판에 흰 분필로 그린 초기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키스 해링(1958∼1990) 얘기다. 낙서로 한 시절을 풍미하고 낙서처럼 사라진 미국 팝아티스트. 1980년대를 섬광같이 살다가 32세에 요절할 때까지 그는 ‘대중의 예술’로 ‘대중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하철 낙서판에서 키운 캐릭터는 판화로, 레코드 재킷으로, 포스터로, 매끈한 조각으로 치고 나왔다. 하나같이 성소수자 인권, 에이즈 예방, 마약·인종차별·폭력 등을 경고하는, 진짜 벽에 갇힌 이들을 대변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품고서 말이다. 시대의 아이콘을 창조하는 일, 바로 그거였다.

△‘낙서 악동’의 평면·조각 등 대표작 175점

해링의 작품과 일대기가 서울에 내려앉았다. 서울디자인재단과 지엔씨미디어가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꾸린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전이다. 해링의 작품 3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일본 나카무라키스해링미술관에서 옮겨온 평면·조각·영상 등 175점을 풀어놨다. 말로만 듣던 해링의 대표작이 대거 몰려온 거다.

지하철 드로잉 느낌 그대로 검정 목판에 흰 분필로 그린 초기작 ‘무제’(1981·1982·1983) 3점부터 나카무라키스해링컬렉션이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세 개의 석판화’(1985) 3점, 해링의 캐릭터 사전 같은 석판화 ‘빨강과 파랑의 이야기’(1989) 시리즈와 알록달록한 24개의 이미지로 구성한 실크스크린 ‘회상’(1989) 등. 여기에 평면 캐릭터를 입체로 세우고 알루미늄 도료로 산뜻하게 색을 입힌 조각 ‘곡예사’(1986), ‘무제’(1986·1987·1989) 등도.

키스 해링의 조각 ‘곡예사’(1986). 평면 캐릭터를 입체로 세우고 알루미늄 도료로 산뜻하게 색을 입혀 완성했다. 높이가 250㎝에 달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화룡점정은 타계 직전까지 매달렸다는 대형작품에 찍었다. 고대 기호로 원시에너지를 가득 채운 ‘피라미드’(1989), 이집트 파라오 관을 딴 콘크리트 모형에 미국 원주민과 토착민 부족의 상징을 넣은 ‘토템’(1989), 물감을 일부러 흘리고 튀겨낸 다이내믹한 구성의 실크스크린 ‘꽃’(1990) 5점, 마치 만화책을 펼쳐놓은 듯 흑백톤 심볼을 강렬하게 박은 ‘블루프린팅 드로잉’(1990) 17점 등.

이들 중 인간 군상을 한 데 엉켜 놓아 ‘피플’로도 불리는 ‘무제’(1985)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삼을 만하다. 무슬린에 아크릴과 오일의 현란한 색채로 꾸며낸, 가로세로 3m가 넘는 대작이다.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그렸다는데, 군상이 춤을 추고 있는지 다투고 있는지, 보는 사람의 입맛에 따른 ‘열린 해석’으로도 유명하다.

초기작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서서히 대중사회와 예술계에 영향력을 확장한 해링의 궤적. 전시는 살아 있었다면 ‘회갑’을 맞은 해링을 위해 기꺼이 차려준 ‘블록버스터급 생일상’처럼도 보인다.

키스 해링이 ‘몽트뢰재즈음악페스티벌’(1983)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 3점. 음악과 사람을 결합한 특유의 캐릭터를 박았다. 해링은 자신의 전시홍보는 물론 어린이교육·콘서트·상품광고까지 100여점이 넘는 포스터를 ‘예술작품’처럼 만들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키스 해링의 ‘피라미드’(1989). 금속에 아크릴을 얹어 완성했다. 인물과 동물·태양 등 무수한 고대 기호로 원시에너지를 가득 채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누구나를 위한 예술철학’ 일대기 복원

이번 전시를 위해 서울에 온 카즈오 나카무라 나카무라키스해링재단 대표는 “1980년대 미국, 극심한 인플레에 경제·사회적으로 불안했던 시대에 활동한 뉴욕 아트의 에너지”로 해링을 소개한다. 지금 시대야말로 “휴머니티를 향한 광기 어린” 그의 예술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사실 미술과는 동떨어진 의약품 개발사업을 한다는 카즈오 대표가 자신에게 선물하듯 한 점씩 해링의 작품을 모아온 계기는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단다. 뉴욕에 출장을 갔을 때 한 화랑에서 봤다는, 만화같이 생긴 작품 한 점이 이상하게 눈과 마음을 흔들더란 거다. 여섯 겹씩 무등을 태운 두 부류의 사람탑이 흔들흔들 위태로운 모양. 바로 ‘세 개의 석판화’ 중 한 점이었다. 화랑주인이 할부로 사라고 권할 만큼 “비쌌다”는 그 작품을 그는 나중에 기어이 컬렉션에 포함시켰고, 이번에 서울로 데리고 왔다.

카즈오 나카무라 나카무라키스해링재단 대표가 키스 해링의 ‘세 개의 석판화’(1985) 옆에 섰다. 나카무라키스해링컬렉션이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작품이다. 두 부류의 사람탑이 흔들흔들 위태롭게 서 있는 모양. “1987년 처음 본, 만화같이 생긴 작품 한 점이 이상하게 눈과 마음을 잡더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키스 해링의 ‘앤디 마우스’(1986) 4점 중 3점. ‘앤디 마우스’는 해링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던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 친구이자 멘토였다는 ‘앤디 워홀’을 합쳐 탄생시킨 캐릭터다. 작품마다 아래 왼쪽에는 워홀, 오른쪽에는 해링의 사인이 들어가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해링의 예술철학은 ‘그들만의 예술’에 도전하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예술은 수많은,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나의 예술세계를 정의하려면 우선 예술에서 목적이라는 것을 없애야 한다”고 외쳐댔으니까. 소수의 특정인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예술”이란 말은 입버릇에 가까웠다. 그렇게 10년 남짓 ‘누구나를 위한 예술’을 열정적으로 쏟아부은 뒤 홀연히 사라졌으니 그 흔적이 쉽게 지워질 리가 있나. 대중의 아쉬움이 적잖았나 보다. 하지만 “좀 더 살았다면”이란 가정 역시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사람의 인생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하지 않나. 짧고 굵게, 평생의 작업량은 다 채우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하루에 많게는 40여점을 지하철역에 휘갈기고 도망 다녔던 시작부터 죽기 하루 전까지도 붓을 못 놨다는 마지막까지. 전시는 ‘미치게 튀었던’ 한 예술인의 꿈을 대신 복원한다. 내년 3월 17일까지.

키스 해링의 ‘블루프린트 드로잉’(1990). 마치 만화책을 펼쳐놓은 듯 흑백톤 심볼을 강렬하게 박은 17점이 전시장 검은 공간에 둥둥 떠있다. 1980년 12월부터 불과 몇 주 만에 완성했다는 드로잉을 해링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실크스크린 포트폴리오의 최종판으로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키스 해링의 예술철학은 ‘그들만의 예술’에 도전하는 데서 비롯됐다. 소수의 특정인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예술”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해대고, “예술은 수많은,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작업 중인 키스 해링을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전속 사진작기이기도 했던 앨런 타넨바움이 촬영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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