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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1>구석서 늘 일하는 사람…부엌데기, 바로 여자

▲아드리안 드 렐리,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들여다본 '부엌'
'생존한다'는 것, '먹고산다'와 동일시하면서도
부엌서 밥짓는 일은 여자몫으로 하찮게 여겨
커리어와 집안일 갈등하는 현대여성 보는 듯
  • 등록 2021-09-10 오전 3:30:00

    수정 2021-09-16 오후 6:09:09

아드리안 드 렐리가 그린 ‘팬케이크를 굽는 여인’(1780~1810 추정). 부엌이란 공간이 화가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시절, 그 ‘특이한 공간’에 붓을 들이댄 화가 덕분에 얻어낼 수 있었던 귀한 ‘부엌 그림’이다. 정갈하게 정리해 벽에 매단 조리도구와 그림까지 걸어둔 것으로 미뤄 중산층 이상의 가정집 부엌풍경을 짐작케 한다. 후대가 기록으로 삼을 만한 가장 놀라운 요소는 벽면과 바닥에 깔린 타일이다. 근대화돼가는 부엌의 모습이라 할 만하다. 나무패널에 유채, 52×42㎝, 네덜란드 라익스뮤지엄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소는 누가 키우냐’면서 웃음을 줬던 과거 코미디 프로그램 속 세속의 명언은 요즘에도 농담으로 간간이 회자된다. 이 농담을 알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토론장에서 여성 대표가 나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남성 대표는 “그러면 말이야, 소는 누가 키우냐고!” 하면서 역설적인 웃음을 이끌어냈던 그 코미디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말이다. 사람이 홀로 살든 가족을 이루든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는 것은 ‘소 키우는’ 일에 단단히 발목이 잡힌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거주하는 집의 모양과 구조가 어떤 식으로 다양하든, 빼놓을 수 없는 필수공간 중 하나가 부엌이다. 생존한다는 것을 시쳇말로 ‘먹고산다’라고 말할 정도로,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먹을 것을 보관하고 조리하는 부엌은 그림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려져 왔을까.

한마디로 별로 중요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다지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아닐뿐더러, 아름답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개 부엌은 여성만의 공간으로 남았던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말이다. 그 여성만의 공간에 붓을 들이대는 화가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부 특이한 소재에 관심을 갖는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간간이 현실 부엌의 모습이 나타난다.

네덜란드 화가 아드리안 드 렐리(1755∼1820)의 ‘팬케이크를 굽는 여인’(1780∼1810 추정)은 어느 가정의 간소한 부엌 내부를 샅샅이 보여준다. 제목처럼 나이 든 여인이 긴 손잡이의 무쇠 팬을 두 손으로 들고 팬케이크를 굽고 있다. 실내지만 추위 때문에 어깨에는 보온용 덮개를, 발치에는 따끈한 난로 역할을 하는 발받침을 두고 한쪽 발을 올렸다. 조리대는 작은 테이블인데, 그 위에 구워놓은 팬케이크와 행주, 양파와 주전자가 놓여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부엌의 벽과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최대한 실내를 아늑하게 꾸미기 위해 벽에는 그림도 한 점 걸려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이전 시기의 부엌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위치했다. 냄새나는 각종 재료를 보관하고 물을 써야 하는 곳이어서다. 부엌이 주요 공간이 아닌 배경이 될 수밖에 없던 것은 성경 속 에피소드를 그린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이야기다. 이야기는 예수와 제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자매의 집에 들르면서 시작된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붙어 앉아 말씀을 들었고 언니 마르다만 음식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음식준비를 하던 마르다는 슬슬 화가 치밀었고 예수에게 “마리아도 앉아만 있지 말고 음식 준비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말씀을 좀 해달라고 ‘건의’를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로부터 “왜 그렇게 걱정이 많으냐”며 “마리아는 좋은 일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는 뜻밖의 충고를 듣게 된다. 이 메시지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18). 성경에 전하는 에피소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재해석해 그렸다. 당시 여느 화가들이 늘 해오던 해석을 뒤집어 ‘그림 속 그림’이란 형식으로 풀어냈다. 스무 살 청년화가답지 않게 잘 조련된 화면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구도·구성이 압권이다. 캔버스에 유채, 63×103.5㎝,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화난 얼굴로 절구를 찧지만… 밥 짓는 일, 거부할 수 없는 숙명

대개 화가들은 이 장면을 그릴 때 예수의 발 옆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와 부엌에서 일하다가 나온 마르다를 비교하면서, 예수가 마리아 쪽이 옳다고 손짓하는 모습을 그려 왔다. 아마 그것이 신학적으로 옳은 맥락이리라. 하지만 어떤 화가들은 이 이야기를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완전히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마르다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궁정화가로 왕가 사람들과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여러 작품으로 미술사에 굵직하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궁정화가로 추천 받아 마드리드에 가기 전, 그는 세비야란 작은 도시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대단한 실력을 짐작케 하는 그림들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그 에피소드를 재해석해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18)다. 갓 스무 살 청년화가의 그림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전체 화면이 잘 조련돼 있고, 무엇보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수수께끼에 휘말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압권이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면의 왼쪽에 있는 두 인물이다. 그중 젊은 여인은 부엌 조리대에 온갖 재료를 늘어놓고 손질 중이다. 볼이 상기된 채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꽉 다문 여인은 잔뜩 억울하고 화가 난 표정으로 절구를 찧고 있다. 젊은 여인의 뒤에 바짝 붙어 선 노인은 뭔가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여인이 있는 부엌은 서서 일하는 환경에다가 벽은 컴컴하고 창은 좁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위치한 공간을 여유롭게 두지 않고 두꺼운 벽 쪽으로 밀친 것처럼 보이게 한 화가의 의도가 보이는데, 부엌이 후미진 공간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동으로 만든 절구 속에는 화면 아래 놓인 깐 마늘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옆에는 붉은 고추와 달걀 두 개, 아직 손질하지 않은 생선 네 마리가 보인다. 사실 달걀과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하는 사물이기도 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18)의 오른쪽 하단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달걀과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한다. 알을 깨고 부화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유비되고, 물고기는 기독교 박해 시절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두운을 따서 축약하면 ‘물고기’란 말이 된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 그림의 뜻을 모호하게 만든 원인은 인물들 오른쪽에 있는 또 다른 작은 그림, ‘그림 속 그림’의 존재다. 작은 그림 속에서 예수는 의자에 앉아 있고 그의 발밑에 앉아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한 여성, 또 예수에게 손짓을 하는 또 다른 여성이 보인다. 예수는 이 작은 그림 속에서도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서 있는 여성의 말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이 두 여성이 마르다와 마리아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에피소드를 그린 거의 모든 그림은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벨라스케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기서 이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가 생긴다. 이 그림 속 그림이 창인가, 벽에 걸린 그림인가, 아니면 거울인가. 이에 대한 논의는 학자들 사이에 분분하다. 해석에 따라 울상의 여인이 마르다가 될 수도, 아니면 제3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는 법… 부엌에 갇힌 여성의 권리

울상을 한 여인이 누구이든 간에, 그녀가 가진 불만은 자신도 예수의 발치에 가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누군들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싶을 것인가. 게다가 가르침을 주는 상대가 예수 같은 인물일 땐 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는 법, 예수와 함께 온 제자들을 굶겨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18)의 오른쪽 상단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성경 속 에피소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 속 그림’이다. 대부분 화가들이 그려왔던 이 형식을 벨라스케스는 별도로 구성해 자신은 그들과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마리아는 부엌일보다는 배움을 선택했고 마르다는 부엌일을 채근하다가 예수에게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을까. 예수의 곁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부엌일을 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예수의 가르침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배움과 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은 그들이 밥상을 차려야 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상이 된 마르다의 얼굴을 보면, 커리어와 집안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늘날 여성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니까 말이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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