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컬렉션, 아름답게 해체했다…'위대한 약속' 된 2만3000점

소장품 2만3000여점 국립기관 기증
"문화유산 수집, 시대적 의무" 완성
'인왕제색도' 등 국보·보물만 60건
모네·달리·샤갈…해외 거장 작품도
막대한 기증품 관리·운영은 숙제로
기증 미술품 6월부터 대중에 공개
  • 등록 2021-04-29 오전 3:30:00

    수정 2021-04-29 오전 7:54:37

이건희 회장이 개인소장했던 미술품 1만 1023건, 2만 3000여점이 국립기관 등에 기증됐다. 위에서부터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1805),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890s),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이중섭의 ‘황소’(1950s),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1751)(사진=삼성·문화체육관광부).


[이데일리 오현주·장병호 기자]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으레 할 수 있는 연설쯤으로 여겼을 거다.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하던 날 “한 말씀”을 부탁한 청중에게 했던 축사 말이다. 설마 진짜 속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거란 뜻이다.

이건희(1942∼2020) 삼성 회장의 말은 현실이 됐다. 이 회장 유족 측이 생전 이 회장이 개인소장했던, 이른바 ‘이건희컬렉션’으로 불리던 1만 1023건, 2만 3000여점의 미술품을 국립기관 등에 기증했다. 삼성가를 떠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갈 근대미술품은 1226건 1400여점,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을 고미술품은 9797건 2만 1600여점이다. 또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작가의 연고지가 있는 지자체 미술관을 비롯해 제주 이중섭미술관, 강원 박수근미술관 등 5곳의 지방 미술관과 서울대 등에도 143점이 간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이건희컬렉션’의 규모와 가치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근대미술품 중에선 당장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이중섭의 ‘황소’(1950s), 장욱진의 ‘소녀’(1939) ‘나룻배’(1951) 등 한국 대표 근대미술품 460여점이 눈에 띈다. 여기에 더해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890s),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1975) 등 ‘세계걸작선’이 이름을 올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미술품 중에는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지정문화재만 60건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금동보살삼존입상’(국보 제134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등을 비롯해 국내 유일의 문화재와 최고(最古)의 유물, 고서·고지도 등이 리스트에 들었다.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1940). 이건희컬렉션에 들어 있던 세계미술거장들의 작품 1600여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다(사진=삼성·문화체육관광부).


‘세기의 기증’에 미술계 “대환영”

이 회장 유족 측이 기증 결정을 알린 28일, 기자회견까지 자처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번 미술품·문화재 기증을 계기로 국내 미술계가 보다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갖춘 프로그램으로 아시아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부문은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60점의 국가지정문화재”라며, 아울러 “근대미술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한국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들”에도 반색을 표했다.

가히 ‘세기의 기증’에 미술계 역시 환영하는 분위기다. “우려하던 문화재·미술품의 해외유출을 막고 국보급 문화재와 세계 거장의 작품들을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국민들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크게 넓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국내 다른 기업에도 이런 문화적 공헌을 장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 “전례 없는 규모의 기증품을 어떻게 관리·운영해 나갈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숙제를 풀어야 한다”는 거다. 실제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이래 총 1만 200여점의 작품을 수집했고 이 가운데 5400여점이 기증품으로 그중 이번 1400여점은 역대 최대 규모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사정이 비슷하다. 1946년 개관 이래 총 43만여점의 문화재를 수집했고 이 가운데 5만여점이 기증품으로 이번 2만 1600여점은 기증문화재의 약 43%에 달한다. 이와 관련해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이건희미술관’으로 정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황 장관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수장고도 부족하고 미술관 추가 건립도 필요한 상황”이라며 다만 “근현대로 카테고리화할지 기증자 이름으로 할지는 즉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국가지정문화재 60점을 앞세워 이건희컬렉션에 들어 있던 고미술품 2만 16000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다(사진=삼성·문화체육관광부).


10조원 가치만큼 과제도 산적해

이번 기증품은 오는 6월부터 순차적으로 대중에게 공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6월 대표 기증품을 선별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가제)을, 내년 10월에는 기증품 중 대표 명품을 뽑아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명품전’(가제)을 연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은 8월 서울관에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명품전’(가제)을 시작으로, 9월에는 과천관, 내년에는 청주관 등으로 옮겨가며 특별전과 상설전을 연다는 계획이다.

이건희컬렉션은 아름답게 해체했다. 감정평가결과를 근거로 2조 5000억∼3조원을 말하고 있지만 미술계에선 그 가치를 10조원으로 내다본다. 차라리 가격 따위로는 환산하지도 말라는 것처럼 들린다. 금전보다 더한 문화·예술성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거다.

유족 측은 이번 결정을 두고 기업가면서 예술애호가였던 이 회장의 평소 철학과 소신을 따른 것이라고만 밝혀뒀다. 다만 이 회장이 입버릇처럼 올렸다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국내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이를 한 데 모아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젠 넘겨받은 이들의 공이란 뜻으로 읽힌다. 사상 초유의 ‘위대한 유산’이 사상 초유의 ‘무거운 숙제’도 함께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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