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버 넌 "진지한 연극과 상업적 뮤지컬? 구분이 되나"

세계의 거장들을 찾아서<4> 뮤지컬 '캣츠'·'레미제라블' 연출가
"공연도 세상도 좌우 흔들리며 균형잡는 시계추같은 것"
'캣츠'의 주제가 '메모리' 작사… 뮤지컬·오페라 모두 장악
  • 등록 2008-09-25 오전 9:51:45

    수정 2008-09-25 오전 9:51:45

[조선일보 제공] "공연도 세상도 시계추 같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극단(RSC)과 국립극장(NT)의 예술감독을 지낸 트레버 넌(Nunn·68)은 이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허공에 꽂았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가장 잘 요리하는 연출가이자 《캣츠》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 히트작들을 세계 초연한 이 거장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진지한 연극과 상업적인 뮤지컬 사이의 경계? 그런 건 없다. 좌우로 흔들리며 균형을 잡고 전진할 뿐이다. 적어도 나는 둘을 분리하지 않아 성공했다."

영국의 자부심인 RSC에서 뮤지컬을 연출·공연한 것은 트레버 넌이 처음이었다. 24일 오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만난 그는 "누나가 미술대회에 입상해 받은 티켓으로 여덟 살 때 처음 본 보드빌(vaudeville·이야기와 춤, 노래가 어우러진 쇼)이 인생의 항로를 결정지었다"며 "연극을 공부하면서도 록그룹에서 기타를 치고 보컬을 했다"고 말했다. T S 엘리엇의 시(詩)를 노랫말로 옮긴 뮤지컬 《캣츠》에서도 주제가 〈메모리〉는 그가 작사했다.

이 거장은 "경험을 쌓아도, 나이가 들어도 결코 쉬워지지 않는 게 연출"이라고 고백했다. 연출가는 숱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고 드라마의 길을 잡아야 하는 자리다. 그 괴로움을 넌은 이렇게 빗댔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팽팽한 줄이 있다고 치자. 연출가는 저글링을 하면서 그 줄을 타야 한다. 뒤를 돌아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추락한다."

성공 비결이나 공식은 없다고 했다. "연출가는 어느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하지는 않는다"고 전제한 그는 "인물과 사건, 이야기를 분석해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결과는 당연히 부침(up and down)이 있다"고 말했다. "연출할 텍스트를 놓고 적어도 30개 이상의 '길'을 뽑아내고 최종적으로 하나를 결정한다"고 했다.

《포기와 베스》 《코지 판 투테》 같은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연 장르에서 정상급 연출가가 됐지만 그가 지난 봄 뉴런던씨어터에 내놓은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79회를 끝으로 조기 폐막했다. 넌은 그러나 "평단의 반응과 관계없이 난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국립극장 예술감독은 영국 축구 대표팀 감독 자리만큼 돌팔매질을 당하고 스트레스도 갑절"이라고 불평했던 그는 "비평을 기대하고 작품을 만든 적은 없다"고 말했다.

"《레미제라블》은 평단의 뭇매를 맞았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제롬 로빈스가 연출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초연의 평가와 달리 시대를 앞서간 걸작으로 남았다. 비평엔 맹점이 있다. 20년간 RSC 예술감독을 지내며 미공연작들을 여러 편 올려 성공했는데, 그 작품들이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게 바로 평단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처럼 과거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느냐."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는 짐작대로 셰익스피어였다. 넌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시대착오적이면서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옛날 얘기를 가지고 동시대 관객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극에서는 당구 치는 클레오파트라, 안경 쓴 리어왕이 다 가능하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연출할 때는 현대적인 복장도 중요하지만 특정 대사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내한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오후 서울 디지털미디어센터(DMC)에서 개막한 제1회 대한민국 콘텐츠페어에 강연자로 초청된 넌은 스토리텔링과 공연의 미래에 대해 강연했다.

연극의 생존에 대해 묻자 그는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50년 전에 비해 극장과 연극의 수가 줄었다. 손 안에서 구현되는 모바일(mobile)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매혹적인 환자'다. '연극'이 병들어 죽었다고 해서 장례식에 가보면 맙소사, 이건 축제다. 죽음조차 새로운 시작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교감하는 연극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는다."

트레버 넌은

스물여덟에 英왕립극단 감독… 기사 작위도

처음에는 배우를 꿈꿨다. "사람들 앞에서 낭독하고 싶은 문장이 많아서" 어릴 적부터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는데 《반지의 제왕》에 나온 간달프(이안 맥켈런)가 동급생이었다. 졸업 후 피터 홀(Hall)에 이어 로열셰익스피어극단(RSC) 예술감독이 됐을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1980년대 뮤지컬로 진출해 《캣츠》 《레미제라블》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히트작을 내놓았다. 1990년대에는 국립극장(NT) 예술감독이 돼 재정적으로 NT를 강화시켰고 대중적인 공연으로 극장 문턱을 낮췄다. RSC 시절부터 작업해온 무대미술가 존 네이피어와는 "나와 결혼한 사이"라고 할 정도로 콤비다. 2002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가려지지 않는 미모
  • "내가 몸짱"
  • 내가 구해줄게
  • 한국 3대 도둑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